“여름낮의 열기가 지나가고, 새로운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느낌이랄까요.
웅크린 채 응집해온 것들을 펼칠 날을 앞두고 있는 거죠.”
보다 자유로울 채종협의 내일.

채종협 배우 ChaeJonghyeop チェジョンヒョプ Eye Love You
스트라이프 셔츠 WOOYOUNGMI, 네크리스 Damiani, 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채종협 배우 ChaeJonghyeop チェジョンヒョプ Eye Love You
스트라이프 셔츠 WOOYOUNGMI.
채종협 배우 ChaeJonghyeop チェジョンヒョプ Eye Love You
니트 톱 STU, 쇼츠 JUUN.J, 네크리스, 링, 브레이슬릿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번 화보는 여름 끝자락의 해 질 무렵을 떠올리며 준비해보았어요. 실제로 그 시간대에 만나기도 했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대예요. 이 시기를 떠올리면 노을 지는 고요한 풍경이 가장 먼저 연상돼요. 여름낮의 열기가 지나가고, 새로운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느낌이랄까요. 웅크린 채 응집해온 것들을 펼칠 날을 앞두고 있는 거죠. 실제로 올여름이 제게 그런 계절이었어요.

곧 ‘여름잠’에서 깨어나겠군요.(웃음) 전작 촬영을 마친 후 꽤 오랜 휴식기를 보냈다고요.

그동안 작품을 마치고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1년 넘게 쉬었어요. 매 순간 코앞의 일만 보면서 달리다 보니 한숨 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시간이 주어지니까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웃음) 한 번쯤은 일 생각을 내려놓자는 마음으로 지냈어요.

그게 가능하던가요? 휴식이 주어져도 일 생각을 배제하는 게 은근히 어렵더라고요.

그렇죠.(웃음) 그래도 이 기간을 온전히 만끽하려고 했어요. 전작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새로운 기운을 얻으면서. 비우는 동시에 채우려 한 거죠. 평소의 활동 반경을 조금이라도 벗어나서 스스로를 환기하려고도 해봤어요. 최근의 행선지는 올해 초에 다녀온 더블린이에요.

더블린, 좋죠. 저도 몇 년 전에 다녀왔어요.

진짜요?(웃음) 어떻게요? 잘 알려진 곳은 아닌데.

영국을 여행하는 김에 더블린에 3일 동안 머물렀어요. 그런데 저와 달리 더블린이 목적지였던 거죠?

맞아요. 어느 날 휴대폰으로 구글 지도를 돌려보고 있는데, 아일랜드가 문득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여긴 어딜까?” 하다가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었죠. 일주일 정도의 여정이었는데도 계획이 전혀 없었어요. 입국 심사 때 어디서 뭘 할 거냐는 질문을 받고 나서야 급하게 이것저것 찾아봤어요.(웃음) 초반 며칠은 숙소에서 드라마 보면서 쉬다가 거리로 나가서 많이 걸었어요. 사진 찍고, 버스킹 보고, 근처 공원에도 가보고. 기차 타고 북아일랜드로 넘어간 날도 떠오르네요.

그 여행에서 무엇을 얻었어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 이렇게 정처 없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보고 느끼는 게 내가 여태껏 추구해온 쉼이구나.’ 어젯밤에도 오랜만에 긴 산책을 했거든요. 늘 그래왔듯 음악 한 곡만 무한 반복으로 들으면서, 발길이 가는 대로. 아무 잡념도 들지 않아 좋더라고요. 공백의 시간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명확히 느꼈어요.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민호’, <무인도의 디바>의 ‘보걸’, <우연일까?> 의 ‘후영’ 등을 표현해온 채종협 배우의 차기작을 기다리는 분이 많은 것 같아요. 작품을 선택할 때 어떤 점을 유심히 살펴왔나요?

캐릭터의 ‘중심’을 생각해왔어요. 중심이 올곧게 서 있는지, 그 지점을 제가 표현했을 때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를 파악하려고 하는 거죠. 그게 잘 보이진 않아요.(웃음)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대본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표를 마침표나 느낌표로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이런 식의 선택을 이어가지 않을까 싶어요.

일의 영역을 벗어나 일상에서는 어떤 작품에 애정이 가나요? 그 호오가 한 사람의 시선과 성향을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라 묻고 싶어요.

음! 개인적으로는 잔잔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을 좋아해요. 그런 작품 속 인물과 서사에 자연스레 마음이 가더라고요.

2년 전 본인에 대해 “의외로 차분하고 과묵한 편”이라고 말한 게 떠오르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가요?

차분하기보다는 신중한 것 같아요. 주변에서는 “마냥 좋은 건 아니야~”라고 할 때도 있는데, 제가 느끼기엔 신중함의 장점이 분명 있어요. 무모하게 행동하는 대신 좀 더 조심스럽게, 충분히 고민하다 보면 경우의 수를 많이 따지게 되더라고요. 스스로 선택지를 늘리는 편이에요.

신중한 편이지만, 도전을 주저하진 않는 것 같아요. 어릴 때 갑작스러운 유학 생활을 했고,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은데도 지난해 방영한 일본 드라마 <Eye Love You>의 주연을 맡기도 했어요.

유학 생활이 제게는 아픈 기억들이에요.(웃음) <Eye Love You> 촬영은 정말 쉽지 않았고요. 일본어 대사를 통째로 외워서 하니까 슛 들어갔을 때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어려웠지만, ‘감정이라도 잘 전달해보자’는 마음으로 부단히 노력을 쏟았죠. 그 결과물이 큰 사랑을 받으니 더더욱 감사하게 되더라고요.

채종협 배우 ChaeJonghyeop チェジョンヒョプ Eye Love You
니트 톱 STU,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낯선 상황을 스스로 돌파해온 만큼, 이제는 보다 의연하게 도전할 수 있을 법도 한데 어떤가요?

…(웃음) 사실 속마음은 이래요. 낯선 상황에 자꾸 놓이는 게 달갑진 않죠. 피하고 싶을 때가 많고, 두렵기도 해요. 하지만 매 순간 도망칠 수는 없잖아요. 되든 안 되든 일단 그 자리에 놓였고, 그렇다면 이 경험을 밑거름 삼아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색다른 도전 과제에 계속 부딪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꾹 참고, 악착같이.

두려움을 딛고 도전할 힘을 얻기 위해 스스로 자주 되뇌는 말이 있다면요?

“해내야만 해.” 물론 가끔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라고 말해주고 싶기도 하죠. 그런데 어릴 때부터 하나씩 해내면서 자라다 보니, 이겨내겠다는 마음가짐이 몸에 밴 것 같아요. ‘포기할 거야!’ 하다가도 어느새 다시 애쓰고 있는 저를 보면(웃음) 어찌 됐건 하겠다 싶어요.

살아온 날들을 통해 훈련받은 면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잘해낸 스스로를 칭찬해준 적도 있나요?

그러려고 했는데…(웃음) 스스로를 칭찬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여전히 저 자신에게 당근보다 채찍을 주거든요. 촬영을 잘 마쳤을 때 당근을 줘보려고 했지만, 한국어로 티키타카 하는 연기가 너무 하고 싶어서 오히려 더 몰아붙이게 되더라고요. 푹 쉬었더니 처음부터 시작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다시 데뷔 한다는 생각으로(웃음)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어요.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경험이나 감정을 접할 수 있어 이 일에 관심이 생겼다고 했어요. 그렇게 연기해온 10년 가까운 시간이 현재의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감정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이 일을 하면서 눈물이 점점 많아졌어요.(웃음) 원래 잘 우는 편이 아니었는데 슬플 때도, 기쁠 때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감정이 깊어지다 보니 한편으론 예민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이런 변화가 전 되게 좋아요.

배우라는 직업을 대하는 마음에 생긴 변화도 있나요? 배우라는 수식어가 여전히 어렵게 느껴진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제는 달라졌는지 궁금해요.

아직도 어려워요. “배우 채종협입니다”라는 말을 제 입으로 딱 두 번 했을 거예요. 너무 떨려서 무심결에 프롬프터의 문장을 읽었을 때랑 일본에서 열린 자리에 유일한 한국 연기자로 갔을 때. 저 자신을 배우라고 일컫는 걸 의식적으로 피해온 거죠.

놀랍네요. 본인을 배우라고 소개해야 할 순간이 그동안 참 많았을 텐데.

저라는 사람을 섣불리 정의 내리고 싶지 않은가 봐요. 제가 연기하는 이유는 더 좋아하는 걸 찾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저 나름의 방식으로 어떤 표현을 했을 때 그 섬세한 시선과 호흡, 감정을 누군가 알아봐준다는 게 참 좋아요. 지금의 저한테는 연기가 제일 재미있고,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제가 가장 흥미를 느끼는 일을 하면서 나아가려고 해요.

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의미로도 들리네요. 최근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 떠올라요. 다시 태어난다면 구름이 되고 싶다면서 “자신만의 속도 로 흐르는 자유로움을 동경한다”라고 했어요.

우리가 평소에 구름을 일부러 찾아다니진 않잖아요. 문득 하늘을 봤는데 구름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고, 가끔은 보이지 않기도 하고. 제 삶도 그렇게 구름처럼 흘러가면 좋겠어요. 조용하고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어떤 것에도 떠밀리거나 얽매이지 않는 상태로. 그게 궁극적인 자유 아닐까 싶어요.

채종협의 삶에서 지향하는 가장 큰 가치도 자유인가요?

음… 네. 예전엔 아니었고, 나중에 바뀔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이 순간에는 그래요.

그 자유가 마침내 실현된다면, 행복할까요?

행복할 것 같긴 한데, 실제로 어떨진 모르죠. 진짜 자유로워져봐야 비로소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재로서는 그저 오늘에 충실하면서 살아가려고 해요. 현실을 직시하자… 이 말, <마녀식당으로 오세요>에 나왔던 대사네요.(웃음)

채종협 배우 ChaeJonghyeop チェジョンヒョプ Eye Love You
니트 후디 Maison Margiela, 비즈 네크리스 Numbering.
채종협 배우 ChaeJonghyeop チェジョンヒョプ Eye Love You
채종협 배우 ChaeJonghyeop チェジョンヒョプ Eye Love You
스웨이드 재킷과 데님 팬츠 모두 Valentino, 첼시 부츠 Jimmy Choo,
네크리스 Tom Wood, 링과 브레이슬릿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