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낮의 열기가 지나가고, 새로운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느낌이랄까요.
웅크린 채 응집해온 것들을 펼칠 날을 앞두고 있는 거죠.”
보다 자유로울 채종협의 내일.



이번 화보는 여름 끝자락의 해 질 무렵을 떠올리며 준비해보았어요. 실제로 그 시간대에 만나기도 했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대예요. 이 시기를 떠올리면 노을 지는 고요한 풍경이 가장 먼저 연상돼요. 여름낮의 열기가 지나가고, 새로운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느낌이랄까요. 웅크린 채 응집해온 것들을 펼칠 날을 앞두고 있는 거죠. 실제로 올여름이 제게 그런 계절이었어요.
곧 ‘여름잠’에서 깨어나겠군요.(웃음) 전작 촬영을 마친 후 꽤 오랜 휴식기를 보냈다고요.
그동안 작품을 마치고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1년 넘게 쉬었어요. 매 순간 코앞의 일만 보면서 달리다 보니 한숨 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시간이 주어지니까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웃음) 한 번쯤은 일 생각을 내려놓자는 마음으로 지냈어요.
그게 가능하던가요? 휴식이 주어져도 일 생각을 배제하는 게 은근히 어렵더라고요.
그렇죠.(웃음) 그래도 이 기간을 온전히 만끽하려고 했어요. 전작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새로운 기운을 얻으면서. 비우는 동시에 채우려 한 거죠. 평소의 활동 반경을 조금이라도 벗어나서 스스로를 환기하려고도 해봤어요. 최근의 행선지는 올해 초에 다녀온 더블린이에요.
더블린, 좋죠. 저도 몇 년 전에 다녀왔어요.
진짜요?(웃음) 어떻게요? 잘 알려진 곳은 아닌데.
영국을 여행하는 김에 더블린에 3일 동안 머물렀어요. 그런데 저와 달리 더블린이 목적지였던 거죠?
맞아요. 어느 날 휴대폰으로 구글 지도를 돌려보고 있는데, 아일랜드가 문득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여긴 어딜까?” 하다가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었죠. 일주일 정도의 여정이었는데도 계획이 전혀 없었어요. 입국 심사 때 어디서 뭘 할 거냐는 질문을 받고 나서야 급하게 이것저것 찾아봤어요.(웃음) 초반 며칠은 숙소에서 드라마 보면서 쉬다가 거리로 나가서 많이 걸었어요. 사진 찍고, 버스킹 보고, 근처 공원에도 가보고. 기차 타고 북아일랜드로 넘어간 날도 떠오르네요.
그 여행에서 무엇을 얻었어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 이렇게 정처 없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보고 느끼는 게 내가 여태껏 추구해온 쉼이구나.’ 어젯밤에도 오랜만에 긴 산책을 했거든요. 늘 그래왔듯 음악 한 곡만 무한 반복으로 들으면서, 발길이 가는 대로. 아무 잡념도 들지 않아 좋더라고요. 공백의 시간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명확히 느꼈어요.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민호’, <무인도의 디바>의 ‘보걸’, <우연일까?> 의 ‘후영’ 등을 표현해온 채종협 배우의 차기작을 기다리는 분이 많은 것 같아요. 작품을 선택할 때 어떤 점을 유심히 살펴왔나요?
캐릭터의 ‘중심’을 생각해왔어요. 중심이 올곧게 서 있는지, 그 지점을 제가 표현했을 때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를 파악하려고 하는 거죠. 그게 잘 보이진 않아요.(웃음)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대본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표를 마침표나 느낌표로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이런 식의 선택을 이어가지 않을까 싶어요.
일의 영역을 벗어나 일상에서는 어떤 작품에 애정이 가나요? 그 호오가 한 사람의 시선과 성향을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라 묻고 싶어요.
음! 개인적으로는 잔잔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을 좋아해요. 그런 작품 속 인물과 서사에 자연스레 마음이 가더라고요.
2년 전 본인에 대해 “의외로 차분하고 과묵한 편”이라고 말한 게 떠오르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가요?
차분하기보다는 신중한 것 같아요. 주변에서는 “마냥 좋은 건 아니야~”라고 할 때도 있는데, 제가 느끼기엔 신중함의 장점이 분명 있어요. 무모하게 행동하는 대신 좀 더 조심스럽게, 충분히 고민하다 보면 경우의 수를 많이 따지게 되더라고요. 스스로 선택지를 늘리는 편이에요.
신중한 편이지만, 도전을 주저하진 않는 것 같아요. 어릴 때 갑작스러운 유학 생활을 했고,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은데도 지난해 방영한 일본 드라마 <Eye Love You>의 주연을 맡기도 했어요.
유학 생활이 제게는 아픈 기억들이에요.(웃음) <Eye Love You> 촬영은 정말 쉽지 않았고요. 일본어 대사를 통째로 외워서 하니까 슛 들어갔을 때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어려웠지만, ‘감정이라도 잘 전달해보자’는 마음으로 부단히 노력을 쏟았죠. 그 결과물이 큰 사랑을 받으니 더더욱 감사하게 되더라고요.



낯선 상황을 스스로 돌파해온 만큼, 이제는 보다 의연하게 도전할 수 있을 법도 한데 어떤가요?
…(웃음) 사실 속마음은 이래요. 낯선 상황에 자꾸 놓이는 게 달갑진 않죠. 피하고 싶을 때가 많고, 두렵기도 해요. 하지만 매 순간 도망칠 수는 없잖아요. 되든 안 되든 일단 그 자리에 놓였고, 그렇다면 이 경험을 밑거름 삼아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색다른 도전 과제에 계속 부딪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꾹 참고, 악착같이.
두려움을 딛고 도전할 힘을 얻기 위해 스스로 자주 되뇌는 말이 있다면요?
“해내야만 해.” 물론 가끔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라고 말해주고 싶기도 하죠. 그런데 어릴 때부터 하나씩 해내면서 자라다 보니, 이겨내겠다는 마음가짐이 몸에 밴 것 같아요. ‘포기할 거야!’ 하다가도 어느새 다시 애쓰고 있는 저를 보면(웃음) 어찌 됐건 하겠다 싶어요.
살아온 날들을 통해 훈련받은 면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잘해낸 스스로를 칭찬해준 적도 있나요?
그러려고 했는데…(웃음) 스스로를 칭찬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여전히 저 자신에게 당근보다 채찍을 주거든요. 촬영을 잘 마쳤을 때 당근을 줘보려고 했지만, 한국어로 티키타카 하는 연기가 너무 하고 싶어서 오히려 더 몰아붙이게 되더라고요. 푹 쉬었더니 처음부터 시작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다시 데뷔 한다는 생각으로(웃음)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어요.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경험이나 감정을 접할 수 있어 이 일에 관심이 생겼다고 했어요. 그렇게 연기해온 10년 가까운 시간이 현재의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감정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이 일을 하면서 눈물이 점점 많아졌어요.(웃음) 원래 잘 우는 편이 아니었는데 슬플 때도, 기쁠 때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감정이 깊어지다 보니 한편으론 예민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이런 변화가 전 되게 좋아요.
배우라는 직업을 대하는 마음에 생긴 변화도 있나요? 배우라는 수식어가 여전히 어렵게 느껴진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제는 달라졌는지 궁금해요.
아직도 어려워요. “배우 채종협입니다”라는 말을 제 입으로 딱 두 번 했을 거예요. 너무 떨려서 무심결에 프롬프터의 문장을 읽었을 때랑 일본에서 열린 자리에 유일한 한국 연기자로 갔을 때. 저 자신을 배우라고 일컫는 걸 의식적으로 피해온 거죠.
놀랍네요. 본인을 배우라고 소개해야 할 순간이 그동안 참 많았을 텐데.
저라는 사람을 섣불리 정의 내리고 싶지 않은가 봐요. 제가 연기하는 이유는 더 좋아하는 걸 찾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저 나름의 방식으로 어떤 표현을 했을 때 그 섬세한 시선과 호흡, 감정을 누군가 알아봐준다는 게 참 좋아요. 지금의 저한테는 연기가 제일 재미있고,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제가 가장 흥미를 느끼는 일을 하면서 나아가려고 해요.
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의미로도 들리네요. 최근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 떠올라요. 다시 태어난다면 구름이 되고 싶다면서 “자신만의 속도 로 흐르는 자유로움을 동경한다”라고 했어요.
우리가 평소에 구름을 일부러 찾아다니진 않잖아요. 문득 하늘을 봤는데 구름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고, 가끔은 보이지 않기도 하고. 제 삶도 그렇게 구름처럼 흘러가면 좋겠어요. 조용하고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어떤 것에도 떠밀리거나 얽매이지 않는 상태로. 그게 궁극적인 자유 아닐까 싶어요.
채종협의 삶에서 지향하는 가장 큰 가치도 자유인가요?
음… 네. 예전엔 아니었고, 나중에 바뀔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이 순간에는 그래요.
그 자유가 마침내 실현된다면, 행복할까요?
행복할 것 같긴 한데, 실제로 어떨진 모르죠. 진짜 자유로워져봐야 비로소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재로서는 그저 오늘에 충실하면서 살아가려고 해요. 현실을 직시하자… 이 말, <마녀식당으로 오세요>에 나왔던 대사네요.(웃음)




네크리스 Tom Wood, 링과 브레이슬릿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