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 부르지 마세요. 그냥 영화일 뿐이에요.”
<발코니의 여자들>로 뭉친 노에미 메를랑과 셀린 시아마는 말했다.
그렇다. 이건 그저 세상을 바꿔왔고, 바꿔 나갈, 여자들의 우정 이야기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우정을 지고의 것으로 예찬하며 정치 공동체의 목표로 삼았고, 철학자들은 가장 고귀한 형태의 애착으로 우정을 꼽으며 각자의 ‘우정론’을 펼쳤다. 하지만 그토록 거룩한 것이기에 여성은 경험할 수 없었다. 진정한 우정의 관계는 철저히 남성의 지적, 감정적 깊이로만 가능한 일이라 믿었던 것이다. 이는 비단 고대 그리스에만 그치는 생각은 아니었다. 16세기의 몽테뉴는 ‘보통 여자들이 지닌 능력은 영적 교감을 나누기에 부적합하며, 여자들의 영혼은 그렇게 견고하고 질긴 관계의 압박을 견딜 만큼 튼튼하지 않은 것 같다’고 썼으며, 이러한 생각은 18세기까지도 만연했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 이후, 여성들은 다양한 형태의 우정을 경험했고, 이는 서로에 대한 응원이자 연대로 발전하며 사회적, 문화적 운동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대 영화감독, 셀린 시아마와 노에미 메를랑은 이토록 강인한 ‘여성의 우정’에 주목한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함께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소녀들의 우정은 힘이 세다

워터 릴리스
블루라벨픽쳐스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후 셀린 시아마가 남긴 말을 기억한다. ‘나는 평생 나를 사랑하지 않는 영화를 사랑하며 살았다’는 그 문장 앞에 한참을 서성였다. ‘여자’임이 힘겹고 싫었던 지난날의 우리에 대한 위로였다. 프랑스의 여성 영화 감독인 셀린 시아마는 데뷔작 <워터 릴리스>(2007)부터 <톰보이>(2010), <걸 후드>(2014)에 이르는 성장 3부작을 통해 그동안 스크린이 품지 않은 여성의 유년기부터 청소년기를 조명했다. <워터 릴리스>에는 사랑 앞에 첨예하게 다른 생각과 고민을 품으며 방황하는 세 여자아이의 내밀한 일상을, <톰보이>는 짧은 머리에 축구를 좋아하는 소녀가 마주하는 혼란을 통해 성(Sex)이 부여하는 사회적인 역할이 아이들에게 조차 비껴가지 않는 모습을 담았고, <걸 후드>에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억압 당하던 여자아이가 스스로 목소리 내는 법을 찾아가는 성장기를 그렸다. 세 영화 속에서 아이들 특유의  자유로움과 청소년기의 열린 감각은 어른과 사회에 의해 흔들리고, 강요받고, 상처 입는다. 그 모습은 익숙함 속에 잔재하는 조용한 폭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아이들은 무너지지 않는다. 이름을 묻고, 고민을 나누고, 함께 울고 웃으며 ‘우정’을 경험한다. 그렇게 성장하고, 서로를 치유한다. 셀린 시아마는 성장 3부작을 통해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포한다. 여자아이들이 나누는 우정은 이에 맞설 만큼 강하다고 말이다.

로맨틱하고 고차원적인 우정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린나래미디어

시대라는 틀에 갇혀서도 불꽃처럼 살다 간 수많은 여자들이 있었지만, 기록되지 않았다. 역사는 늘 펜을 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셀린은 그 여성들의 뜨거운 삶을 상상했고, 남기고자 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은 그렇게 탄생했다. 영화는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가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결혼 초상화를 의뢰받고, 그녀 몰래 그려야 하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화가 마리안느는 본인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화가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주 감사해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정해진 규칙과 구매자인 남성이 선호하는 방식을 정직하게 따른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그렇게 완성된 초상화에 첨리한 악평을 서슴지 않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마리안느는 분노하며, 떠나려 한다. 그때, 그동안 그림을 위해 포즈 짓길 거부하던 엘로이즈가 모델을 자청한다. 서로를 깊이 응시하고, 세세히 관찰하고, 기억에 담으며 두 사람의 사랑과 예술은 타오른다.


마리안느, 엘로이즈, 소피. 이 셋의 관계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각자의 신분 차이를 의식하지 않고 즐겁고 편안한 시간을 함께 나눈다. 무엇보다 고통을 마주할 때, 세 사람의 우정은 더욱 끈끈해진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임신 중절을 하는 소피의 곁을 지키고, 함께 견딘다. 이는 여성만이 감내해야하는 괴로움이자, 또 여성이기에 이해하고, 전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예술을 통해 이 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린나래미디어

셀린 시아마는 미술사에 만연한 남성적 시선이 여성들의 협업을 축소해 왔음을 꼬집으며 예술 앞에 평등한 두 사람을 보여준다. 특히 ‘시선’의 관점에서 그러하다. 당대의 기록에서 화가는 대부분 남성이었으며, 그들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뿐만 아니라 화폭에 담을 대상을 바라보는 것에 있어서도 주체였다. 그리고 그 주체의 시선으로 관찰되고 그려지는 대상은 주로 방 안에 앉아 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으며, 이를 ‘뮤즈’라 부르며 피사체로 머물게 했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관찰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동등하게 눈을 맞춘다. 작품에 대해 첨예한 비평을 하고, 깨어있는 제안으로 마리안느를 새로운 예술의 지평으로 이끌며, 그가 자신을 그리는 동안 본인 또한 고도로 집중한다.

‘두 인격이 상호적으로 동등한 사랑과 존경에 의해서 하나로 결합되는 것.’ 영화의 배경인 18세기의 철학자 칸트는 우정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관계는 사랑이기에 앞서 고차원적이고 로맨틱한 우정일지도 모른다. 이별의 끝에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라는 마리안느의 대사처럼 우리는 그들이 남긴 우정과 예술을 기억할 것이고, 기억하는 한 영원할 것이다.

노에미 메를랑의 우정이 주는 해방감

발코니의 여자들
그린나래미디어

노에미 메를랑은 마리안느를 연기하기 위해 그녀의 삶과 사랑을 이해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셀린 시아마의 작품이 갖는 특징인 ‘피메일 게이즈(Female Gaze)’ 즉, ‘여성적 시선’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18세기 프랑스의 여성 화가와 21세기에 있는 자신의 삶이 종종 겹쳐졌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연기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세상은 진정 변화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특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개봉한 2019년에는 프랑스에서도 미투(#metoo)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노에미 메를랑 또한 모델로 연예계에 발을 디딘 17살 때 사진작가에게 처음으로 당했던 언어적, 신체적 폭력과 교제하던 애인이 일삼은 폭력을 떠올렸다. 그녀는 숨 막히는 답답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뛰쳐나와 무작정 여자 친구들이 사는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몇 달간 머무르며 성차별, 여성혐오, 가부장적 억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완전히 솔직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끈끈한 연대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 해방감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발코니의 여자들
그린나래미디어

그렇게 영화 <발코니의 여자들>은 탄생했다. 무더운 여름날, 프랑스 마르세유의 한 아파트 발코니에 작가 지망생 니콜(산다 코들레아누)이 있다. 소설을 쓰고 싶지만 글은 잘 안 써지고, 자꾸 건너편 창가 사이로 보이는 이웃집 남자에게 눈길이 간다. 마침 친구들이 하나둘 모인다. 니콜과 함께 사는 루비(수헤일라 야쿠브)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몸매를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고, 인터넷 방송으로 돈을 번다. 남몰래 이웃집 남자를 훔쳐보는 소심한 니콜과는 다르다. 마를린 멀로 분장을 하고 나타난 엘리즈(노에미 메를랑)는 배우다. 오래 사귄 애인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달아나 친구들의 집에 왔다. 발코니에 모인 세 친구는 음주가무를 즐기다 이웃집 남자의 초대로 그의 집에서 한껏 들뜬 밤을 보낸다. 하지만 다음날 남자는 잔인하게 죽어있다. 이후 푹푹 찌는 더위 속 세 여자의 시체 은닉기가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니콜, 루비, 엘리즈는 각자 남성 사회의 폭력적 시선을 마주하고 우정으로 똘똘 뭉쳐 대항한다. 잔인한 폭력과 살인이 중추가 되는 이야기지만 분위기는 코미디에 가깝다. 감독인 노에미 메를랑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유머를 택했기 때문이다. 호러, 코미디, 드라마, 고어 등 여러 장르의 혼합은 부조리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는 장치로 기능했고, 그 덕에 무거울 법한 주제임에도 유쾌하고 통쾌하게 전달된다.

영화로 이룩한 예술적 우정이자 연대의 기록

발코니의 여자들
그린나래미디어

“셀린은 내 삶을 여러모로 변화시켰다. 무엇보다 그녀 덕에 예술가로서 작업하는 방식에 대한 비전이 새로워졌다.” – 노에미 메를랑

노에미 메를랑은 원래 <발코니의 여자들>의 각본을 혼자 썼다.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자 이 이야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유일하게 셀린 시아마가 떠올랐지만 괜한 부탁으로 소중한 우정을 잃을까 주저했다. 그 마음을 눈치챈 셀린이 먼저 초안을 읽어보고 싶다고 했고, 시도해 보지 않은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집필부터 재정 지원까지 선뜻 나서 참여했다.

언젠가 셀린 시아마가 ‘영화는 누군가의 외로움을 공유하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말했듯, 그녀는 사려 깊은 영화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외로움을 전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보고, 또 나누며 서로의 외로움을 덜었다. 노에미 메를랑도 그 중 하나였다. 셀린의 성장 시리즈로 어린 시절을 위로받았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으며, <발코니의 여자들>을 쓴 것이다. 셀린 시아마의 영화 속 주인공을 연기하던 노에미 메를랑이 온전한 주체가 되어 각본을 쓰고, 이에 셀린 시아마가 동참하여 지지하는 모습에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이룩한 고귀한 우정과 그들이 여성의 이야기를 예술로 기록하고자 한 순간들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그런 맥락에서 두 사람의 서사는 많은 여성들이 각자의 예술을 통해 대화하고 경험할 우정과, 그 우정이 변화시킬 세상에 대한 믿음에 확신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 부르지 마세요. 그냥 영화일 뿐이에요.” 노에미 메를랑과 셀린 시아마의 세상에서 이건 그저 평범한 여자들의 우정 이야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