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장 주목해야 할 작가들을 선정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 ‘키아프 하이라이트(Kiaf HIGHLIGHTS)’.
고유한 정체성과 독창성에 동시대적 맥락을 더하며,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그려가는 올해의 세미 파이널리스트 10인을 만났다.

GRIM PARK
Theo
박그림(1987, 한국)은 동국대학교 불교미술과 졸업, 도제식 전통 교육을 받았다. 전통 회화 기법과 퀴어 정체성을 결합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해왔다.


올해 키아프에서 어떤 작품을 선보이나?
‘심호도_ 간택’을 중심으로, 개인전 <사사 四四>에서 선보였던 회화들을 확장해 소개한다. ‘심호도_간택’은 불교 설화 ‘심우도’ 속 소년과 소를 호랑이와 보살로 치환해 깨달음을 주고받는 존재의 위치를 재구성한 자전적 작업이다. 단군신화에서 인간이 되지 못하고 배제된 호랑이의 이미지와 내 정체성을 겹쳐보며, 그림 속 호랑이를 페르소나로 삼고 있다. <사사 四四>의 다른 작업에서는 인물을 제거하고 상징적 오브제만으로 화면을 구성하며, 전통 회화 형식을 빌려 퀴어 코드와 이중 구조를 은유적으로 풀어냈다.
불교미술에 매료된 계기는 무엇이고, 불교미술이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보나?
내게 불교미술은 어린 시절부터 경계에 선 존재들을 조용히 감싸주는 시선과 같았다. 불화 속 형상들을 마주할 때마다 위엄보다는 말 없이 곁을 지켜주는 듯한 다정함을 느꼈다. 그 감각은 지금까지도 내 작업의 정서적 기반이 되어준다. 내게 불화는 과거를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비주류의 존재들, 즉 퀴어 정체성과 그 서사를 담아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각적 언어이며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대안적인 시선으로서 유효하다고 믿는다.
담채, 배채법을 비롯한 작업 기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준다면?
‘담채’는 비단 위에 색을 얇게 여러 번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여백과 농담의 조율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다. 색이 겹겹이 스며들며 만들어내는 깊이와 느린 시간성이 표현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배채법’은 그림의 뒷면에도 색을 입히는 전통적인 불화 기법으로, 앞에서 보이지 않는 면을 함께 채색함으로써 색의 농도와 질감을 조율하는 데 쓰인다. 이처럼 화면 앞뒤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법을 통해, 단일하지 않고 겹쳐 있음으로써 감정이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다.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박그림만의 새로움을 더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시도하나?
전통은 박제된 형식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감각과 질문들을 담아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하는 ‘열린 구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화의 도상이나 구도를 그대로 따르기보다 그 안의 상징과 이야기 구조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통 불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보살의 시선, 좌우 대칭을 이루는 화면, 구체적인 채색 법칙 등을 차용하되 작품 속 인물이나 사물, 구조는 동시대의 감각으로 번안한다. 전통을 따르되 이에 종속되지 않고, 그 틀을 빌려 오늘의 정체성과 감정을 다시 구성해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작가로서 경험한, 혹은 경험할 ‘하이라이트’의 순간은 언제일까?
작가로서의 내 ‘하이라이트’는 전시의 성과나 외부의 인정을 얻기보다는 작업을 본 누군가가 “이건 제 이야기예요”라고 말할 때 느낀 감정에 더 가깝다. 무언가를 대변하려 하거나 구체적인 대상을 그린 것이 아님에도 어떤 정체성의 조각이나 감정의 결이 타인에게 도달한 순간 ‘공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아주 인상 깊었던 적이 있다. 내 존재를 감추지 않고 내면의 흔들림과 복잡함을 드러낸 작업 안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을 발견했다고 느낄 때면 작가로서의 이유가 명확해진다. 개인적인 고백이 가장 넓은 연결로 이어지는 순간들을 더 많이 마주하는 것이 작업의 큰 동력이 되어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