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예술, 자연과 인공, 가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경계에서 묵묵히 확장해온 세계.
작가 이진준이 경계 공간에 머물며 개척한 미디어아트의 새로운 지평.
예술은 언제나 기술에 발맞춰 스스로의 언어를 개발해왔다. 인쇄술, 사진, 영상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당대의 예술가들은 기존 매체의 존재 이유를 질문하며 색다른 표현 언어를 모색했고, 그때마다 예술의 지형은 다시 그려졌다. 지금, 창작의 영역마저 침투한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예술계는 다시 한 번 전환기를 맞았다. AI 시대에 예술가란 무엇인가. 뉴미디어 아티스트 이진준은 이 물음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응답하는 작가다. 한국인 최초 영국왕립예술 학회 종신 석학 회원이자 KAIST 문화기술대학원 전임교수로 AI와 XR, 데이터 기반의 미디어아트를 연구하는 작가는, 급변하는 기술 변화의 흐름을 발 빠르게 포착해 예술의 언어로 승화하며 미디어아트의 가능성을 확장해왔다. 작가가 지난 20년간 연구실과 작업실을 오가며 집요하게 탐구해온 주제는 ‘경계 공간(liminal space)’이다. 홍채라는 개인의 가장 고유한 생체 정보를 우주 차원의 거대한 스케일로 변환하거나(‘Champagne Supernova’), 동아시아 문인의 아름다운 시적 정취를 자연 풍경으로 변환하는(‘서호에서 방황하는 태양’) 등, 작가는 미시와 거시, 전통과 현대, 가상과 실재가 뒤섞인 공간에서 우리의 의식 너머를 비추는 장면들을 일관되게 구현해왔다. 8월 23일부터 10월 18일까지 BB&M 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샴페인 슈퍼노바(Champagne Supernova)>에서 그는 인공지능이 삶과 예술의 질서를 뒤흔드는 오늘날, 불안정한 경계 위에 선 우리의 초상에 주목한다. 미세한 홍채 패턴이 거대한 초신성의 형상으로 확대되어 고요히 진동하는 스크린을 뒤로한 채, 개인전을 앞둔 작가와 마주 앉아 기술과 예술의 경계 위에서 구축해온 세계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눴다.


오랜 시간 작업의 중심에 자리한 ‘경계 공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먼저 묻고 싶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예술, 기술, 자연, 그리고 인간의 의식이 맞닿는 모호한 경계 지점을 탐구해왔습니다. 이때의 경계란 창문, 계단, 문처럼 공간 자체가 경계적 성격을 띠는 경우나, 디지털과 아날로그, 가상과 현실이 겹쳐져 낯선 감각을 일으키는 순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발생하는 전환과 초월의 상태에 관심을 두고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어요. 다만 개념적 차원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관객이 실제로 몸을 동원해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해왔습니다. 초기작 ‘당신의 무대’에서는 두 겹의 유리창을 덧대어 관객 스스로 작품과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게 했고, ‘Here and There’에서는 문고리 두 개가 달린 문을 설치해 안과 밖의 모호함을 직접 체험하게 했죠.
경영학 전공, 방송사 PD라는 이력을 거쳐 돌연 조소를 전공한 뒤, 미디어 아트로 영역을 확장해 작품 활동을 이어오셨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들이 현재의 작업에 어떤 토대가 되어주었나요?
경영학 공부와 방송사 PD경험은 작가로서 사회구조와 미디어 환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틀을 마련해주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순수미술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이 이뤄지던 시기에 PD로 활동하며 카메라와 멀티채널, 영상 기술을 가까이에서 접한 덕에 자연스럽게 매체에 대한 감각을 길렀습니다. 이때부터 제 작업의 주요한 재료인 빛, 시간, 소리와 같은 비물질적인 대상에 관심을 가졌고, 이후 조각을 배우며 공간과 구조를 설계하고 물성을 갖춘 대상을 만드는 과정을 익히면서 자연스럽게 미디어아트로 영역을 넓혔습니다.
동시대의 핵심 기술을 예술의 언어로 변환해온 것이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특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임 엔진, 데이터 음성화, 3D 그래픽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영역에서 기술을 주요한 도구로 삼으며 경이와 불안을 동시에 마주했을 듯합니다.
미디어아트 작가에게 기술은 상상력을 무궁무진하게 구현할 수 있는 도구이지만, 그 잠재력 때문에라도 더욱 신중히 다뤄야 하는 재료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알고리즘이나 인터페이스를 마주할 때의 경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성을 소외시키거나 우리의 인지 편향을 강화하는 위험성이 늘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작가로서 기술이라는 새로운 물감이 지닌 독성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죠. 또한 미디어아트는 창작에 기술을 직접적으로 동원한다는 점에서 자칫 화려한 신기술을 시연하는 것에 그치기 쉽습니다. 작업 초기부터 어떻게 하면 작품이 기술의 외양에 머무르지 않고 예술적인 맥락을 담아낼 수 있을지 깊이 고민했어요. 이런 문제의식이 영국 유학으로 이어졌고, 체계적인 연구 환경을 갖춘 예술대학에서 매체의 역사성을 치열하게 파고들었
습니다. 새로운 매체와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예술이 어떻게 변화해왔고, 이 변화가 사회에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학제적 연구를 지속했어요. 디지털 매체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매체 자체가 발전해온 궤적을 추적하며 얻은 통찰은 이후 제 작업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분야를 막론하고 AI가 주요 담론으로 부상하기 전,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이를 작업의 주제이자 재료로 다뤄왔습니다. 당시 인공지능의 등장이 예술계에 미칠 파급력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았나요?
매체 연구를 지속할수록 인공지능이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인류 문화사 전반을 뒤흔들 만한 영향력을 지녔음을 실감했습니다. 인쇄술이나 사진, 전기 기관의 발명처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바꿔놓은 사건에 견줄 만큼 근본적인 전환이 이뤄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 흐름이 더욱 빨라지고 있죠. 학계에 머물며 격변의 최전선에서 그런 조짐을 느꼈기에, 작가로서 이 주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특히 인공지능이 개인 정보를 수집해 고도로 개인화된 방식으로 우리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을 끊임없이 공급해주고, 그로 인해 우리의 사유 능력이 퇴화하는 현실에 주목하며 작업으로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 이후 10여 년 만에 국내에서 선보이는 개인전 <샴페인 슈퍼노바 (Champagne Supernova)>가 BB&M 갤러리에서 열립니다. 이번 전시는 2015년부터 이어온 홍채 작업과 더불어 처음 시도하는 페인팅 시리즈를 통해 작업의 범위를 확장하는 자리이기도 하죠. 특히 이번 전시에서 주목 한 화두는 무엇인가요?
최근 몇 년 사이 생성형 인공지능이 삶 깊숙이 들어오면서, 개인의 기억과 정체성이 어떻게 위협받고 있는지 생각 해보게 됐어요. 전시장 중앙에 위치한 대형 LED 작업 ‘Champange Supernova’는 88개의 홍채 패턴을 딥러닝 기반의 인공지능으로 추출해 빛과 색의 추상적 형상으로 구현한 작품입니다. 기술과 예술이 한데 충돌하고 융합하며 어떤 임계점에 다다른 듯한 지금의 현실이, 마치 소멸 직전에 가장 강한 빛을 발산하며 폭발하는 초신성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봤어요. 인간의 가장 고유한 생체 정보를 데이터로 환원하고, 이 데이터를 드넓은 우주를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로 변환해 포스트 디지털 시대에 인간의 정체성이란 얼마나 유한하고 또 확장 가능한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자 했습니다.
조각, 설치, 영상, 드로잉,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해왔지만, 신작 시리즈 ‘On Some Faraway Shore’에서는 회화에 도전했습니다. 어떤 제작 과정을 거쳤나요?
이번 시리즈는 AI와 제가 번갈아가며 총 아홉 단계의 협업 과정을 거쳐 제작했습니다. 제 유년 시절 기억에 관한 텍스트를 기반으로 AI가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중 실제 기억과 맞닿은 요소만 골라내어 종이에 인쇄했습니다. 그 이미지를 오려 붙여 콜라주를 만들고, 다시 디지털로 스캔해 회화로 옮겼죠. 마지막 단계는 제 붓질로 마무리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과 기계의 시선이 겹쳐지고 어긋나는 흔적이 작품에 담기게 됐어요. 자세히 살펴보면 제가 물감을 덧입힌 부분은 붓질의 거친 질감이 살아 있고, 기계가 작업한 영역에는 프린트 과정에서 생긴 픽셀 자국이 남아 이질적인 인상을 만들어냅니다. 줄곧 디지털 매체를 다루다 처음으로 페인팅에 도전해봤는데, 정면 돌파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회화는 흔히 기술이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인간 예술가의 고유한 영역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AI를 회화 안에 끌어들인 배경에 어떤 고민이 자리했을지 궁금합니다.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화가들이 새로운 표현 방식을 모색하며 후기 인상주의가 시작된 것처럼, AI가 등장한 이후로 예술계가 맞닥뜨린 위기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매체가 오히려 회화라고 봤어요. 이 시리즈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편집권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기계가 아무리 빠른 속도로 이미지를 찍어낸다 하더라도, 그중 어떤 것을 선택하고 버릴지, 이미지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재배열할지 결정하는 건 여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종이를 오려 붙이고 캔버스 위에 붓질을 더하는 과정에서 기계의 작업 속도와 무관하게 제 고유한 리듬과 호흡이 작품에 담기는 것처럼요.

AI 시대에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해오셨습니다. 알고리즘과 가상현실, 빅데이터 등 그 어떤 기술적 변화에도 잠식되지 않을 인간만의 영역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우리의 본질적 영역은 결국 예술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시와 음악, 그림과 무용처럼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예술에 인간 본질에 대한 오랜 질문과 대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시는 인간다움의 핵심을 드러내는 영역입니다. 시는 언어 체계 속에 갇힌 단어들을 해방시키려는 시도이고, 우리는 시를 읽을 때 단어와 단어 사이의 빈틈을 스스로 메우는 사고 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됩니다. 이처럼 함축성을 읽어내고 사유를 확장하는 사고 능력이 기술로 인해 점점 단순화되고 퇴화하는 시대일수록 더욱 중요해진다고 생각해요.
기술의 도움을 빌려 시에 함축된 의미를 읽어내려는 시도였던 ‘서호에서 방황하는 태양’이 떠오릅니다. 중국의 대문호 ‘소동파’의 시를 재해석해 60m 길이의 LED 패널 위에 가상의 해돋이로 구현한 작품이죠. 인문학에 기술을 접목한 시도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서호는 동아시아 문인의 전통이 시작된 장소입니다. 소동파가 비 내리는 서호를 바라보며 ‘음호상초청후우(飲湖上初晴後雨)’를 지은 순간,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시에 담긴 정취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한데 중국어 시구를 한글이나 영어로 옮기면 시의 고유한 감흥이 사라져버리더군요. 원어에 담긴 정서를 그대로 구현하기 위해 중국의 AI 언어 모델로 일부 구절을 해석했고, 그 데이터를 영상의 움직임에 반영해 해돋이 장면을 구현했습니다. 두루마리처럼 길게 펼쳐진 LED 패널 위에 시의 운율과 북송 시대 문인의 철학을 자연 풍경으로 재현한 셈이죠. 제가 구현하려던 정취가 온전히 담겼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기계야말로 인간의 언어적, 문화적 편향에서 자유로운 제3의 시선으로 시적 정취의 단서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이처럼 기술은 인간의 의식이 닿지 못하는 영역을 비추며, 때로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세계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AI가 창작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지금, 동시대의 예술가는 어떤 태도로 기술과 관계 맺어야 할까요?
마냥 위협적인 존재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은 언제나 인간을 서로 연결하고 가깝게 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으니까요. 지금 인간과 AI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함께 진화하는 ‘공진화(co-evolution)’ 관계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이를 창작의 도구로 삼아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실험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의 윤리적 경계선을 설정하는 일일 겁니다.


경계선을 설정하는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선 창작 과정이 투명해야 합니다. 어떤 기술을 동원했다면 그것을 숨기지 말고 공개해야 해요. 또한 AI를 인격화하거나 자아를 부여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최종적인 편집권이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일 테고요. 이 시대의 예술가는 단순히 신기술을 사용하는 유저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의 작동 원리와 영향력을 탐구하고 비판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것이 예술가의 힘이자 역할이라 믿어요.
거대한 전환기에 놓인 우리 모두가 어떤 경계 지점에 서 있다고도 느껴집니다. 경계 공간이라는 개념을 향후 어떻게 확장해나갈 계획인가요?
올해 안에 경계 공간에 대한 책을 출간할 계획입니다. 인류학자 반 게네프(Van Gennep)가 말한 ‘통과의례’처럼, 누구나 살아가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도기의 순간들이 있죠. 흔히들 어두운 터널 속에 있는 사람에게 눈앞에 보이는 빛을 따라 나아가라고 말하지만, 그 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나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경계 공간에 대한 연구를 평생 지속해오며 깨달은 건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그 자리에 머무는 것도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움트고, 아름다운 전환의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지나고 있거나, 지나온 사람들에게 책을 통해 위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작가 자신도 여전히 전환의 과정 안에 있다고 느끼나요?
언제나 그렇습니다. 늘 경계 공간에 머물며 살아온 것 같아요. 매일 아침 학생들과 새롭게 업데이트된 AI 기술과 논문을 익히고, 거기서 얻은 영감을 기반으로 작업을 이어가며 끊임없이 스스로의 위치를 전환하는 과정 안에 놓여 있습니다. 아마 평생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 같아요. 제게 경계 공간은 자유, 구원과도 연결된 문제입니다. 예술은 엄청난 고통을 딛고도 미소 지을 수 있는 어떤 승화의 과정이라 생각해요. 결국 예술을 통해 그런 초월의 순간에 도달해야 하고, 도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