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 메뉴 추천해줘.” “2026 S/S 트렌드 알려줘.” 검색어 대신 질문을 던지면, 단순한 정보를 넘어 아이디어의 방향까지 제시하는 AI(인공지능)는 이미 우리 일상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패션 시장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패션쇼, 패턴 디자인, 가상 피팅 등 AI는 패션계의 여러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패션 브랜드의 테크놀로지 사랑은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기술이 등장했을 때, 브랜드들은 웹사이트와 앱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상용화하며 디지털 패션 시장을 개척했다.


발렌시아가는 2024 F/W 런웨이에서 소셜미디어가 주도하는 세상을 비판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AI가 생성한 초현실적 자연 풍경과 가상 이미지를 대형 디지털 스크린에 투사해 디스토피아적 무드를 완성했다. 이어 2025 S/S 시즌에는 AI가 만들어낸 컬러 프린트를 패브릭에 적용해 디지털과 패션을 결합한 드레스를 선보였다. H&M은 ‘디지털 트윈’ 프로젝트를 통해 실제 모델의 이미지를 AI로 복제하고, 이를 통해 패션 표현 방식을 재정의했다. LVMH 역시 자사 전 브랜드에 AI를 접목해 고객 경험뿐만 아니라 럭셔리의 시각적 언어를 정밀하게 개인화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또한 유수의 브랜드에서 활용 중인 가상 피팅서비스는 단순한 편의성을 넘어 쇼핑의 속도와 정확성, 스타일링 기능성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AI의 등장은 패션계에서 미학과 기능 사이를 오가며 미학적 지형을 대담하게 확장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사진 작업을 하는 사진가 최나랑은 AI에 대해 “많은 창작자가 각자 그리는 판타지와 상상력을 즉각 구현해줄 수 있는 훌륭한 도구”라고 말한다. 이처럼 AI 이미지는 모든 제약에서 자유롭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장면도 단 몇 초 만에 구현하고, 수개월이 걸리던 캠페인 제작 과정도 단축한다. 최종 결과물 역시 창작자의 의도대로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알고리즘이 과도하게 반영되는 경우에는 개성과 차별성을 잃게 된다는 우려가 뒤따른다. 패션계에서 AI는 사용자의 취향을 분석하고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큐레이터가 될 수도, 캠페인 이미지를 만드는 사진가나 패션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다. 디자이너 뎀나는 발렌시아가 2024 F/W 컬렉션에서 쇼 노트 대신 “콘텐츠로 가득 찬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과정 그 자체”라고 음성 메모를 남겼다.


패션 브랜드들이 다양한 목소리로 메시지를 전하는 오늘날, AI가 패션 산업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AI라는 매개체의 본질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미학을 선택하고, 어떤 시각적 언어로 구현할지에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인 호모 콰렌스(Homo Quaerens), 즉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AI는 패션계의 직업군에서 인간을 대체하는 두려운 존재이기보다, 미학적 실험을 확장하는 촉매제이자 창작의 파트너가 되어야 할 것이다. AI와 자동화가 보편화된 미래 사회에서 인간의 고유한 창의성과 사고력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