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시간과 드넓은 공간의 지평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안토니 곰리의 세계.

사진: 최재원

예술은 인간의 더 넓은 자각을 이끌어내는 촉매가 될 수 있을까?

변화된 인간 조건을 인식하고, 그것을 의식적인 경험으로 끌어올리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예술로 인해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생생히 살 수 있게 되길 바란다. 특히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몸의 움직임, 정신, 영혼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도록 일깨워주는 예술을 지향한다.

안토니 곰리
사진: 최유진

“자연과 우주 속에서 인간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안토니 곰리가 오랫동안 응답하고자 골몰해온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신체, 곧 몸으로부터 출발한다. 1974년 인도 여행 중, 길 위에서 잠든 사람들을 본 경험을 바탕으로 바닥에 태아 자세로 웅크린 텅 빈 조각을 완성한 안토니 곰리. 그는 이 초기 작업을 통해, 인간의 최소한의 거처가 ‘신체’임을 일찍이 이야기했다. 이후 그는 금속 막대로 신체를 형상화하고, 사면체·육면체·십이면체 등 다면체와 블록·프레임·튜브 등 다양한 형태로 실험을 거듭했다. 이러한 변주와 확장 속에서도 신체는 여전히 정신과 영혼을 담는 틀이자, 세상과 연결되는 경험의 장소라는 그의 기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난 6월,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뮤지엄 SAN 청조갤러리 전관과 GROUND에서 열린 개인전 <DRAWING ON SPACE>에 이어, 오는 9월 2일부터는 화이트 큐브 서울과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첫 서울 개인전을 연다. 이번 전시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속 신체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전시장 곳곳에서 담아내며 도시의 지형이 인간의 신체에 남기는 흔적과 우리의 움직임, 내면의 감각적 지형에 대한 탐구를 나누고자 한다. 전시를 앞둔 작가에게 질문을 가장한 긴 편지를 보내고, 런던 작업실을 찾아가 그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이후 도착한 그의 회신에는 수십 년간 쌓아온 개념과 사상을 넘어, 그의 작업이 품고 있는 절대적인 고요와 깊은 사유의 단서들이 담겨 있었다. 자기 안의 광활한 어둠을 응시하는 그를 상상하며, 그의 문장들을 이곳에 옮긴다.

Antony Gormley, ‘RETREAT: SLUMP’, Concrete, 101×59.5x148cm, 2022
Photograph by Stephen White & Co. © the artist
사진: STEPHEN CHUNG/ALAMY

지금 어디에서 이 질문들의 답변을 쓰고 있나요?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인가요?

저는 지금 노퍽(Norfolk)의 시골 작업 공간에 머물고 있습니다. 예술가이자 제 삶의 오랜 동반자인 비컨 파슨스(Vicken Parsons) 그리고 20년을 넘게 함께 작업해온 애덤 험프리스(Adam Humphries)와 판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합판 전체 시트를 바탕으로 다층 구조의 인상(impression)을 찍어내는 방식인데, 이를 통해 마치 빛을 향해 열린 인공적 공간 속에 들어선 듯한 경험을 관람자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인쇄기로는 구현할 수 없는 방식이기에 모든 인상을 손으로 직접 문지르며 찍어내고 있어요. 최근 완성한 작품은 무려 12번의 인상을 겹쳐 찍는 과정으로 이루어졌고, 꼬박 5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까지 중 가장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어 큰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닥에 앉아 직접 종이에 몸을 기울여 작업합니다. ‘프린트(prints)’라 부르지만, 이 작품은 여러 겹의 인상이 모여 만들어낸 단 하나의 고유한 결과물입니다. 흔히 말하는, 동일한 매수를 찍어내는 프린트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골의 목가적 풍경 속에서 수고로운 옛 방식의 작업을 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도시를 벗어나 자연 속에 머무는 일은 언제나 큰 기쁨입니다. 새들과 양 떼, 4백 년이 넘은 고목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요. 오랜 세월 이어져온 생명 공동체와 그 풍경을 누릴 수 있다는 건 분명한 특권일 것입니다. 지난 15년간 우리는 4천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고, 돌보며, 보살피는 일은 더없이 큰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면 모든 것이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멀지 않은 곳에는 대규모 공군 기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중이면 최신형 고속 전투기들이 매일 훈련을 벌이며 이곳의 고요를 산산이 깨뜨리곤 합니다.

9월 2일부터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 <불가분적 관계(Inextricable)>가 열립니다. 수많은 전시를 해오셨지만, 여전히 각 전시마다 다른 도전과 복잡함이 따른다고 느끼나요?

30여 년 전부터 한국을 찾았고, 6년 전에는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우환과 그 친구들’의 첫 번째 시리즈, <안토니 곰리: 느낌으로>라는 전시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화이트 큐브와 타데우스 로팍, 두 갤러리의 지원을 받아 서울의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전시를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인류가 도시에 거주하는 상황 속에서 서울이라는 대도시 환경의 물질성과 의미적 단면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구현하고자 합니다. 이제 도시 지형은 단지 우리를 둘러싸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몸에 흔적을 새기며 행동과 내면의 지형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인간과 도시의 얽힘, 그리고 그 불가분의 상관성을 서울이라는 장소에서 다시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는 ‘벙커(Bunker)’, ‘비머(Beamer)’, ‘블록 작업(Blockwork)’ 시리즈의 선별된 조각 여섯 점이 유리 외벽과 내부 벽면 사이의 좁은 틈이나 기둥 등 평범하지 않은 공간에 자리하게 됩니다. 작품 선별과 배치에 어떤 관점으로 접근했나요?

작품이 맥락과 상호작용할 때, 이는 변혁적인 에너지와 기능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장식하려는 의도를 벗어난 예술은 오히려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는 도구가 될 수 있지요. 이번 두 갤러리의 전시를 통해 저는 조각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조건을 어떻게 드러내고 촉진하며, 또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선보이는 ‘매듭 작업(Knotworks)’ 시리즈는 각 작품을 바닥, 벽, 천장에 밀착해 인간의 몸이 더 큰 네트워크의 일부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시도가 건축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우리에게 이 ‘연결성’에 대한 어떤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열어준다고 보나요?

동물에게 더듬이가 있다면, 인간에게는 인터넷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는 촉각, 후각, 시각, 청각, 미각이라는 감각을 통해서만 서로 연결된 세계 안에 머물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다 지능적으로 구축된 디지털 세계에서, 각자의 관심사와 연관된 정보를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디지털 세계의 현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도시 환경 속에서 변화하는 우리의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신체 경험을 더욱 강화하고 싶습니다.

오랜 시간 인간과 자연, 더 나아가 우주와 맺는 근원적인 관계를 깊이 탐구해왔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그간의 질문들을 어떻게 확장하고 새롭게 드러내고 있는지요.

저는 한국이 서구 산업자본주의와 기독교라는 외부의 비토착적 사유 체계를 어떻게 흡수했는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전시 도록에 실린 노엄 앤드루스(Noam Andrews)의 에세이에서도, 그는 산업 생산 환경의 기하학을 규정하는 직교(orthogonal) 구조와 기독교 십자가 사이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제가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십자가 이미지가 도시 도처에 널리 퍼져 있어 그것들을 주시해왔습니다. 최근 강남의 한 호텔에 머물 때에는 고층 건물의 창문이 십자가 형태로 배치된 모습을 보았고, 그 주변에 서로 다른 교단의 교회 세 곳이 나란히 서 있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의 구원적 매력이 자본주의가 야기한 이 위기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더 살아 있고, 민감하고, 깨어 있게 만드는 촉매”로서 예술을 이야기해왔습니다. 말씀대로 도시가 우리의 몸과 의식을 깊이 형성하는 시대에 예술이 관람객에게 던져야 할 가장 시급한 질문은 무엇일까요?

고도로 기술화된 사회는 단 한 세대만에 물질적 편리와 풍요를 당연시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를 게으르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서구식 생활 방식에 적응하는 것은 곧 과잉생산과 천연자원의 착취, 바다와 공기의 오염, 지구를 가속적으로 뜨겁게 만드는 독성 물질 앞에서 점점 더 무력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피할 수 없는 결과를 마주하며, 대도시에 사는 인간은 점점 더 취약해지고 있습니다. 예술은 이러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고, 우리가 내리는 선택을 재고하게 하며, 책임 있는 미래를 만들어갈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도시 안에서 당신의 작품명이기도 한 ‘지금(Now)’, ‘이곳(Here)’을 느끼기란 쉽지 않습니다.

정보를 경험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인식의 문을 통해 다가오는 모든 경험에 열린 마음으로 응답해보세요. 하늘의 푸름에 인사하고, 스치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의 감정에도 마음을 열어 보여야 합니다.

당신의 작업에는 고요와 성찰의 시간이 깊이 스며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답고요. 작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고독과 사유는 당신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우리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모와의 관계, 그리고 시간, 공간, 목적을 공유하는 타인들과의 확장된 관계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오직 고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자기 인식입니다. 가족과 직업, 세상의 의무로부터 자신을 잠시 떼어내고, 존재 그 자체의 감각에 집중할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인식이지요. 이를테면 바다 너머 먼 수평선을 바라볼 때, 높은 산에 오를 때, 혹은 침대에 누워 평온을 느끼는 순간이 그렇습니다. 그때 우리는 개인적 욕망과 무관한, 삶이 태어나는 근원과 밀접히 연결된 존재의 한 형태와 접속하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Antony Gormley, ‘HERE’, 8 mm Corten steel, 233.8×769.5x211cm, 2024
Photograph by Stephen White & Co. © the artist

성취의 서사와는 무관하게, 온전히 작업의 시간 속에서 머무를 때 저는 진정한 자유를 느낍니다.
그 시간은 모든 현상이 생겨나는 흐름의 일부일 뿐, 끝이 없으며 결코 짧아질 수도 없습니다.

이 순간에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환상은 사라지고 시간은 무한 속의 한 점으로 수렴합니다.
이러한 무한한 시간은 눈을 감고 몸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사진: 최유진

지금까지 신체라는 장소에 천착해온 작가에게 ‘시간’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변해왔나요?

원인과 결과의 세계에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려 애쓸 때, 시간은 매우 제한적으로 느껴집니다. 불안과 거리감을 낳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취의 서사와는 무관하게, 온전히 작업의 시간 속에서 머무를 때 저는 진정한 자유를 느낍니다. 그 시간은 모든 현상이 생겨나는 흐름의 일부일 뿐, 끝이 없으며 결코 짧아질 수도 없습니다. 이 순간에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환상은 사라지고 시간은 무한 속의 한 점으로 수렴합니다. 이러한 무한한 시간은 눈을 감고 몸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 어둠은 밤하늘처럼 광활하며, 대상과 한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공간입니다.

시간의 무한성을 경험하는 것은 지금까지 예술적 실천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와도 이어질까요?

아마 환상일지 모르지만, 저는 제 삶이 유기적인 과정이었기를 희망합니다. 매 순간 열린 마음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마음과 몸의 만남, 장소와 감정에 스스로를 열어두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경험은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조용한 결의로 이어져 왔다고 믿습니다. 경험과 창조가 하나로 만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요.

20세기를 치열하게 건너온 작가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세계가 나아지고 있다고 믿나요?

저는 여전히 인간이 자연의 시스템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희망을요. 지난 세기말, 블라디미르 베르나츠키(Vladimir Vernadsky)와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이 제시한 ‘노오스피어(noosphere, 정신권)’의 진화와, 그것이 물질화된 형태인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을 통해 약속된 복잡한 가능성들은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도구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새 천년의 초기 몇 년은 분쟁 해결 방식이 고대적이고 야만적인 형태로 퇴보한 충격적인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정치적·환경적 문제 모두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구의 자정 능력 한계는 곧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 입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합니다. 우리 각자는 스스로의 선택을 진지하게 돌아봐야 하고, 우리의 대표자들은 지속 가능한 삶을 직접 실천함으로써 변화의 최전선에 서야 할 것입니다.

인간 안에 내재된 희망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라고 보나요?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변화가 유일한 상수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기술 발전이 곧 진보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최근 팬데믹은 이러한 변화가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즉각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작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여전히 당신을 원초적 경이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요?

오늘 오후, 10년 전에 우리가 심은 플라타너스나무 잎사귀 위에서 반짝이며 춤추는 빛과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그 일부임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공감과 나눔의 기쁨 속에서, 우리는 넓고 경이로운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