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부산의 열흘이 관객과 영화인의 활기로 가득할 수 있었던 근간에는 프로그래머들의 열정과 헌신이 분명히 자리한다. 세계의 기쁨과 아픔에 다가가고, 강단 있는 패기로 무장하고, 일상 또는 시대에 필요한 사유를 전하는 작품들을 폭넓게 살피며 영화의 본질에 대해 부단히 고민해온 사람들. 올해도 풍성한 라인업을 준비한 7인의 프로그래머가 개인적인 애정을 담아 추천작 5편을 전해왔다. 서른 번째 영화 축제의 스크린 너머로, 저마다의 감상이 극장을 다채롭게 채워주기를 기대하며.

Asian Cinema

박선영 프로그래머

올해의 경향 그해의 주목할 만한 아시아 영화를 선정하는 경쟁 섹션이 신설됐다. ‘비전’ 섹션은 아시아 전역으로 확장되었는데, 특히 독립영화에 초점을 맞춘다. 한국 기업, 아시아 여러 국가와 협력해 ‘비전 : 아시아’ 섹션에 10여 개의 상도 마련했다. 이를 통해 아시아 독립영화를 발굴하고 지원해온 부국제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고자 한다.

프로그래머의 일과 삶 프로그래머가 된 이후 내 소원은 ‘월드 피스(world peace)’라는 말을 종종 한다. 아시아 영화들을 살피다 보면 전쟁과 내전, 고통의 역사, 현재 진행 중인 정치적·사회적 소요 등 무수한 아픔을 접하게 된다. 이전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아시아 곳곳의 사건, 사고가 하나하나 마음에 와닿는다. 이 과정에서 세계시민으로서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내가 선정한 작품을 통해 그 세계와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런 경험이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를 통한 만남 올해 나의 선정작 중 영화와 극장의 시대에 보내는 러브 레터 같은 작품 두 편이 있다. 한 편은 비간의 <광야시대>, 다른 한 편은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 22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둘 다 사라지는 영화관을 향한 애수를 담고 있다. 이 영화들이 ‘함께 보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기를, 나아가 극장의 시대가 오래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탈리아 유바로바 <말리카>

올해 눈길을 끄는 중앙아시아 여성 감독 중 한 명인 나탈리아 유바로바의 영화. 카자흐스탄 소수민족이자 무슬림 소녀 말리카의 성장담을 유려한 카메라워크로 담아낸다.

마하르시 투힌 카시아프 <콕콕콕, 코코콕>

무슬림인 닭 장수와 남수단 난민, 닭 장수의 오토바이는 어떤 관계일까? 신인 감독의 패기와 신화적 상상력이 빚어낸 현대의 우화. 어쩌면 슬픈 사랑 이야기.

트리베니 라이 <모모의 모양>

한 여성이 나로서 인정받고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할머니와 어머니, 두 딸의 일상을 담담히 그려내며 감정의 파고를 세심하게 파고드는 연출력이 돋보인다.

서기 <소녀>

첫 신부터 관객을 1980년대로 데려가는 흡인력 있는 미장센과 스토리가 인상적이다. 혼자 성장해야 하는 소녀와 성장을 멈춰버린 듯한 어머니 사이, 농축된 감정이 밀도 있게 펼쳐진다.

타니슈타 차테르지 <암린의 부엌>

인도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오가며 활동하는 배우이자 감독인 타니슈타 차테르지의 두 번째 연출작. 이전보다 따뜻하고 강단 있는 감독의 세계와 점차 성장하는 주인공을 응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