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의 30회를 목전에 두고 임명된 정한석 집행위원장과 박가언 수석 프로그래머.
그들에게 5개월이라는 시간은 시스템을 다시 짜고, 시선을 재정렬하고, 축제의 뼈대를 세우며 밀도 높은 혁신을 이뤄내고자 고군분투하는 여정이었다.
개막을 한 달 앞두고 두 사람을 만났다.
눅진한 피로가 묻어나는 고단한 얼굴을 하다가도 올해의 영화제를 소개할 때만큼은 눈이 형형히 빛을 냈다.
박가언 수석 프로그래머

올해부터 수석 프로그래머를 맡으셨습니다. ‘프로그래머’와 ‘수석 프로그래머’의 차이, 그리고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예전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안에 ‘수석’ 직책이 없었습니다. 프로그래머들이 있고, 그중 가장 선배 격인 분이 김지석 선생님이었죠. 그때는 ‘모든 건 김 선생님께 여쭤보면 된다’는 분위기였습니다. 선배들에게 묻고 배우는 구조였죠. 영화제가 커지며 수석은 경영과 운영을 뺀 프로그래밍 전반의 최종 책임을 맡는 자리로 정착했습니다. 다만 영화제의 모든 이벤트가 결국 ‘영화’와 연결돼 있다 보니, 실무상으로는 개막식 게스트 선정을 시작으로 A부터 Z까지 관리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프로그래머 중에 저보다 연배가 높고 전공 지식이 깊은 동료도 많지만, 영화제 경력만 보면 제가 어느새 고인 물이 되어 있더군요.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치가 장점이자 함정이 되기도 할 겁니다. 과거의 정답이 현재의 정답은 아닐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매년 새로 합류한 스태프들과 시야를 공유하고, 유행의 흐름을 민감하게 포착하려 합니다.
직무의 폭이 넓어지면서 영화제를 바라보는 시야도 확장됨을 느끼기도 했나요?
맞아요. 막상 맡고 보니 보이지 않던 일이 많이 보입니다. 지금은 전 부집행위원장 박도신 프로그래머의 권역까지 겸해 체감상 1.5~2인분을 하고 있어요. 현재 영미·일본권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데, 이전 유럽·중남미 프로그래머일 때와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영미·일본권은 관객이 이미 배우와 감독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이 정보를 작품 선정에 고려하지 않으면 ‘개인의 취향만 모인’ 프로그램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유럽 중심의 평가 기준이 아시아 작품을 재단하는 한계를 체감할 때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높이 평가받는 영화와 우리가 좋다고 느끼는 영화의 기준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가끔 유럽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오른 아시아 영화를 보며 ‘저 작품이 왜 저기에 있지?’ 싶은 순간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 작품이 상을 받을 때도 있고요. 아시아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유럽 중심, 혹은 백인의 기준에 머무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올해 신설한 경쟁 부문은 ‘아시아의 시선으로 아시아를 본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고, 심사위원 절반 이상을 아시아인으로 구성했습니다. 다양성 측면에선 성평등 과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스태프 중 여성 비중은 높지만 경력 단절로 상층부에서 줄어드는 문제가 있습니다. 신인 여성 감독은 많지만 4~5편 차로 갈수록 감소하는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산업 전반의 경쟁·투자 구조와 선택권을 쥔 주체에 대한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최초의 여성 수석 프로그래머’라는 타이틀이 주는 청사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몇 년간 부산국제영화제를 외부에서 봤을 때 우려할 만한 일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제도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고민해야 했고, 해마다 영화제를 치르는 데 급급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정비하고자 합니다. ‘그때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관성이 때로 도움 되지만, 해법이 과거와 동일할 필요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흔한 말로 ‘높은 자리에 오른 여성은 남자처럼 변한다’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려 합니다. 다만 일은 되게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소수 의견이 밀리지 않도록 운영 원칙—다양성과 포용의 감수성—을 세우고 실행 단계에서 끝까지 확인하는 것이 제 과제라고 봅니다. 조직에 상처가 쌓이지 않게 안정화 설계를 병행하려 합니다.
프로그래머는 영화제에 걸맞은 영화를 선정하는 일 외에 행정가로서의 비중도 큽니다. 행정가 업무에는 적응해가고 있나요?
영화를 고르는 일만 하라면 전공자가 더 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프로그래밍은 촘촘한 작품 수급과 초청을 위한 커뮤니케이션과 협상, 예산·극장 운영·검열 이슈·타이밍이 결합된 종합 설계입니다. 국가와 대륙 안배, 초청 비용과 인력, 상영관 운영까지 정밀히 계산해야 합니다. 올해 신설한 ‘비전 : 아시아’ 섹션만 해도 상이 크게 늘었고, 이를 만들기 위해 프로그래머가 직접 파트너십을 제안하고, 협약서를 작성하고, 상의 명칭까지 세부 내용을 모두 정리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선행되어야 실무 부서가 움직일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프로그래머를 본질적으로 ‘기획자’라고
봅니다. 아이디어에서 끝나지 않고 ‘실행 직전’까지 디벨롭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정교히 해내지 못하면 진행 속도가 급격히 느려집니다. 또한 영화제는 늘 현장에서 변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관객과의 대화(GV)를 비롯한 모든 행사에서 ‘이 기획을, 이 작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프로그래머가 가장 먼저 호출됩니다.
30회의 가장 큰 변화는 경쟁 부문 신설입니다. 총 14편이 꼽혔죠. 어떤 기준에 따라 어떤 과정을 거쳐 추렸습니까?
올해 경쟁 부문은 4명의 프로그래머가 전편을 돌려 봤고, 최소 50편 이상을 1차 테이블에 올린 뒤 국가·권역 안배, 여성 감독의 일정 비율, 신인 배제 없음을 원칙으로 조율했습니다. 핵심은 닫힌 장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경쟁 부문 신설의 이유는 단순합니다. 아시아인의 시선으로 지금, 여기의 아시아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 결과가 유럽과 반드시 달라야 한다기보다 판단의 주체를 우리 쪽으로 옮긴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스펙트럼도 넓혔습니다. 미래성이 돋보이는 데뷔작부터 완성도 높은 중견 감독의 작품, 상업성 짙은 영화부터 순수 아트 영화까지 모두 포괄합니다. 올해 경쟁 부문은 아시아 영화의 ‘현재’와 ‘다음’을 함께 비춘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올해 프로그램의 두드러진 흐름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이콘’ 섹션의 확장이 가장 큽니다. 2019년 ‘월드 시네마’에서 분리해 거장의 변별력을 살렸고, 올해는 비중을 과감히 확대했습니다. 총 2백40여 편 규모에서 ‘아시아영화의 창’과 ‘월드 시네마’를 슬림화하는 대신 ‘아이콘’에 시네필이 꼭 보고 싶어 할 만한 화제작을 촘촘히 모았습니다. 올해는 추석 연휴로 영화제 일정이 3주 앞당겨지는 바람에 베니스·토론토·산세바스티안 영화제와 상영 시기가 겹치는 상황이라, 연초부터 가장 빠르게 시사하고 초청 조건을 선제적으로 협상했습니다. 부산은 한글 자막을 자체 제작해야 하므로 시간 압박이 크지만, 선제적 확보와 명확한 분류로 수급의 속도와 밀도를 높였습니다. 그 사례로 코고나다 감독의 신작 <빅 볼드 뷰티풀>은 스튜디오(소니)와 개봉 시점을 두고 오래 조율해 상영을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칸영화제에서 영화 <두 검사>로 최고 평점을 받았던 세르게이 로즈니차 감독은 상영과 함께 마스터 클래스도 준비 중이고, 마이클 만 감독도 부산을 찾을 예정 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넷플릭스 시리즈 <프랑켄슈타인>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은 그간 감독이 “내 괴물들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고 말했듯이 그의 오랜 숙원 프로젝트 인데요. 고전 고딕의 분위기와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납니다. 무엇보다 아이맥스 버전 상영은 부산이 세계 최초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올해는 톱스타도 유난히 많이 방문합니다. 특히 일본 배우 라인업이 강합니 다. 개막식에는 니노미야 카즈나리가 참석해요. 그룹 아라시 출신으로 가수로 시작했지만 배우로서 더 길고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왔죠. 칸에서 소개된 게임 원작 영화 <8번 출구>를 통해 ‘막힘과 갇힘’의 감각을 탁월하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액터스 하우스’에도 참여합니다.
이번 30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두고 ‘최대, 역대급’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더라고요.
저도 역대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기준에서도 이 정도 규모의 초청은 처음입니다. 올해 이런 이례적인 기록은 여러 해 동안 누적된 접촉과 30회라는 계기, 코로나 팬데믹으로 미뤄졌던 일들이 동시에 결실을 본 결과이기도 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제 지금껏 쌓아온 역사만큼, 앞으로 올 새로운 세대에 대한 고민도 있을 텐데요. 어떤 태도로 미래의 관객을 맞이할 예정인가요?
몇 년 사이 ‘온 스크린’ 섹션을 통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새롭게 발견하는 관객이 많아졌음을 느낍니다. 시리즈 한 편을 먼저 보러 왔다가 이곳에서 여러 다양한 행사와 굿즈를 경험하고, 나아가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생깁니다. 1백 명이 새롭게 유입되고, 다음 해에 ‘함께 보는 영화의 즐거움’을 기억하는 단 10명만 영화제로 돌아와도 영화제의 내일은 밝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접점입니다. 그들이 영화제에서 한데 모여 축제를 즐기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울고 웃는 경험을 공유하는 것. 그 경험이 영화제가 끝난 뒤 독립 영화관으로 이어집니다. 다만 “영화제에서는 꽉 찬 상영관에서 봤는데, 동네 극장에서는 아침이나 밤 시간대에 관객이 10명 남짓이더라”라는 아쉬운 소리도 듣습니다. 그래도 ‘더 잘됐으면 좋겠다, 정말 좋은 영화다’라고 입소문을 내주는 분들이 필요합니다. 이분들이 우리의 미래 관객, 아주 소중한 손님들이죠. 그래서 영화와 직접 연결돼 보이지 않아도 그분들이 “거기 가면 영화만 보나요?”라고 물었을 때 “아니요, 즐길 거리가 아주 많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이벤트를 계속 만들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이벤트가 주말에 집중돼 있는 만큼, 주말 이후에도 즐길 거리를 마련하려고 올 한 해 성실히 준비했습니다. 올해 한번 시도해보고 내년에는 더 확대할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가을 관객과 나누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올해 초청한 작품 중 하나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행복은 ‘이거다!’하고 번쩍 드는 거창한 감정이라기보다 소소한 만족의 순간들이 쌓이고 때로는 깎이고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아, 난 행복하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장면을 보는데 유난히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아마 그때 제가 스스로 그다지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우리 사회가 ‘지금 당장의 성공’이라는 강박 속에서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영화제는 그 강박을 잠시 내려놓는 자리라고 믿습니다. 특정 영화를 놓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좋은 영화는 아주 많습니다. 올해는 상영관도, 회차도 늘었습니다. 놓친 영화 대신 우연히 극장에 들어가 본 작품이 뜻밖의 ‘인생 영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영화제가 당장 무엇을 성취하는 곳이기보다 ‘올해의 행복한 한 조각’을 남기는 곳이었으면 합니다. 10년 뒤에도, 20년 30년 뒤에도 ‘그때 친구들과 부산에서 배우들 잔뜩 보고 신났었지’ 하고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요. 그런 기억들이 삶의 작은 위안이 되리라 봅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불행한 기억은 만들지 않도록 사고 없이, 태풍 없는 가을을 관객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