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부산의 열흘이 관객과 영화인의 활기로 가득할 수 있었던 근간에는 프로그래머들의 열정과 헌신이 분명히 자리한다. 세계의 기쁨과 아픔에 다가가고, 강단 있는 패기로 무장하고, 일상 또는 시대에 필요한 사유를 전하는 작품들을 폭넓게 살피며 영화의 본질에 대해 부단히 고민해온 사람들. 올해도 풍성한 라인업을 준비한 7인의 프로그래머가 개인적인 애정을 담아 추천작 5편을 전해왔다. 서른 번째 영화 축제의 스크린 너머로, 저마다의 감상이 극장을 다채롭게 채워주기를 기대하며.
World Cinema
서승희 프로그래머
올해의 경향 ‘아주 특별한’ 두 개의 특별 프로그램을 정성껏 선보인다. 먼저 세계적인 거장 마르코 벨로키오가 부산을 방문한다. 8편의 작품을 다시 보고, 프로그램 노트를 쓰고,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 읽으면서 그에 대한 존경심과 팬심이 더욱 깊어졌다. 올여름에 만난 감독은 “한국의 젊은 관객이 내 영화를 어려워할 것 같아 걱정된다”고 했는데, 그의 작품을 한 편이라 도 관람한다면 필모그래피 전체를 찾아서 보고 싶을 거라고 확신한다. 줄리엣 비노쉬를 직접 마주하는 소중한 기회를 부산을 찾은 관객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사실도 무척 기쁘다.
프로그래머의 일과 삶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1년에 한 번씩 안경을 새로 맞춰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올해 유독 많이 했다.(웃음) 때로는 고되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한 즐거움을 안긴다.
영화를 통한 만남 ‘이 감독만이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독특한 영화를 만났을 때 마음이 간다. 프랑스 시네필들이 자주 쓰는 표현처럼, “이 영화가 내게 말을 건다(Ce film me parle)” 혹은 “그건 내게 말하고 있다(Il me parle)”고 느껴지는 작품도 많이 발견하고 싶다. 엄청나게 지루하더라도 단 한 장면이 나를 압도하고, 이미지 하나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어도 감정은 또렷하게 남는 영화와 만날 기회도 늘어나기를 기대한다.

세피데 파르시 <영혼을 손에 품고 걷는다>
가자 지구의 사진기자 파트마 하수나와 유배자 신분인 감독의 지속적인 영상 대화. 주인공 여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인간의 존엄성과 연대에 관하여.

데니 우마르 피차예프 <이마고>
감독이 어린 시절에 떠날 수밖에 없었던 체첸과 그루지야 국경의 판키시 계곡으로 다시 돌아가며 전개되는 자전적 다큐멘터리. 칸영화제 황금눈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일디코 에네디 <사일런트 프렌드>
오래된 식물원의 은행나무가 시간을 견디며 세 세대에 걸친 세 인물의 삶을 응시한다. 은은한 서사와 독특한 구성이 진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 양조위와 레아 세이두의 출연도 기대를 모은다.

우고 비엔베누 <아르코>
올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감성 애니메이션. 나탈리 포트만이 제작자로 참여했다. 칸영화제에 소개된 이후,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여러 상을 휩쓸었다.

레오스 카락스 <퐁네프의 연인들>
레오스 카락스, 줄리엣 비노쉬와 드니 라방이 만들어낸 걸작. 야외 상영장에서 관객과 함께 이 아름답고도 아픈 영화에 다시 깊이 빠져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