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영화가 더욱 굳건히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나온 궤적을 되짚으며
오늘과 내일의 영화를 새로 쓰기 위해. 제3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특별기획 프로그램 ‘아시아영화의 결정적 순간들’을 선보인다. 34개국, 1백61명의 영화계 인물이
아시아 영화 100선을 꼽는 설문조사에 참여해 동점작을 포함한 1백18편의 작품을 선정했고, 이 중 10편의 작품을
공식 초청한다. 부산에서 다시 만날 10편의 수작, 아시아 영화의 빛나는 순간들을 소개한다.
내가 여자가 된 날
The Day I Became a Woman | 이란, 2000
감독 마르지예 메쉬키니


세대별 여성의 이야기가 나란히 놓이자, 보편적인 여성의 삶이 그려진다. 갓 아홉 살이 된 소녀, 자전거 경주에 나가고 싶은 젊은 여성, 뗏목에 물건을 싣고 망망대해로 떠나는 노년의 여성까지. <내가 여자가 된 날>은 이란 여성의 삶을 3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 보여주며 이들에게 가해진 억압을 그려낸다. 절제된 언어와 시적인 이미지를 활용하는데, 에피소드에 따라 아이러니를 극대화하거나 짜임새 있는 편집 기법을 사용하고, 때로는 현실을 신랄하게 드러내는 우화적 표현 방식을 택한다. <내가 여자가 된 날>은 단순히 이란 사회의 문제를 넘어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언어를 찾아나가는지 보여주며 우리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 수상작이자 이란 여성 감독의 가능성을 전 세계에 알린 기념비적 작품.
버닝
Burning | 한국, 2018
감독 이창동


현실의 표면 아래에 숨겨진 것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계급이 만든 경계, 세대를 짓누르는 좌절, 말없이 쌓이는 분노와 허무까지. 이 모든 것이 영화 <버닝>의 인물들을 서늘한 공기처럼 감싸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종수(유아인)와 해미(전종서),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 사이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다룬다. 이야기는 사라진 해미의 행방을 추적하는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진실을 밝히는 대신 현실의 불가해성을 더 짙게 드러낸다. 대사로 상황을 설명하기보다 오래도록 풍경을 응시하고, 장면마다 상징적 요소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촘촘한 그물을 형성한다. 모호함이 자아내는 압도적 현실감과 시적 긴장감, 이창동 영화가 지닌 고유의 힘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한 작품이다.
철서구
Tie Xi Qu: West of the Tracks | 중국, 2003
감독 왕빙


21세기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상징적 얼굴, 왕빙의 기념비적 데뷔작. 5백58분의 긴 러닝타임 동안 왕빙의 카메라는 중국의 쇠락한 공업도시 철서구의 골목을 따라간다. 광활했던 공장은 텅 비어 있고, 남겨진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고철을 주워 팔거나 길가에 앉아 하루를 견딘다. 느리게 걷는 카메라는 그저 그 인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며 관객이 그들 곁에 있도록 만든다. 도시의 몰락을 통해 중국 산업화의 상처를 드러내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거대한 정치적 담론에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피로와 체념 혹은 묵묵한 생존의 에너지가 가득한 얼굴을 통해 역사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몸으로 그려낼 뿐이다. <철서구>는 오프닝의 잿빛 도시가 클로징의 암흑으로 변할 때까지, 왕빙의 영원한 주제인 ‘중국 인민의 초상’을 그려낸다.
올드보이
Old Boy | 한국, 2003
감독 박찬욱


“누구냐, 넌.” <올드보이>의 이 대사는 한국 영화 역사에 날카롭게 각인되었다. 2003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올드보이>는 한 남자의 복수극을 넘어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의 정체성을 새로 구축하며 세계 영화계에 한국 영화의 인장을 뚜렷이 새겼다. 영화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감금에서 시작된다. 좁은 방에서 15년을 갇혀 지낸 남자 오대수(최민식)는 갑자기 다시 세상에 내던져지고, 우연히 알게 된 여자 미도(강혜정)와 함께 자신을 가둔 범인을 찾아 나선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강렬한 미장센이 관객을 현혹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서사가 인간 본성의 심연을 드러낸다. 이제는 바이블이라 불릴 만한 2분 40초의 ‘원 테이크 장도리 액션 신’을 포함해 전체를 압도하는 박찬욱 감독의 디테일이 쉴 새 없이 반짝이는 걸작이다.
아무도 모른다
Nobody Knows | 일본, 2004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여름 햇빛이 스며드는 아파트, 세상과 단절된 네 남매는 자신들만의 섬을 만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는 이 작은 세계를 조용히 관찰하며 아이들의 눈높이로 세상의 무심함을 보여준다. 1988년 도쿄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을 다듬어 일본 사회의 그늘을 차분한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묘사한다. 특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연기 디렉팅이 빛을 발한 작품인데, 아역 배우들에게 대본 없이 상황만 설명한 채 그들의 감정이 이야기의 흐름에 조응하길 기다리며 1년 넘게 촬영을 이어갔다. 소년 가장 아키라 역을 맡은 야기라 유야는 첫 연기임에도 텅 빈 눈빛과 굳은 표정, 느린 걸음과 침묵을 통해 고독과 책임, 무력감이 교차하는 순간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아무도 모른다>는 만 14세이던 그에게 칸영화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안겼다.
안녕, 용문객잔
Goodbye, Dragon Inn | 대만, 2003
감독 차이밍량


<안녕, 용문객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극장’이다. 비 오는 밤, 폐관을 하루 앞둔 타이베이의 낡은 영화관. 마지막 상영작인 <용문객잔>이 끝나고 상영관이 환해지자, 카메라는 텅 빈 객석을 비춘다. 이 작품에는 사건이라 불릴 법한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그저 영화관에서 두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을 다루며 카메라는 극장 구석구석을 천천히 떠돈다. 빗소리,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관객의 눈에 맺힌 눈물과 끝내 전하지 못한 누군가의 마음까지 섬세히 어루만지고 소중히 다룬다. 매표원과 영사기사의 이루어질 수 없는 만남, 오래된 영화관에서 흔히 떠도는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며 사라질 장소와 그에 담긴 기억을 애도한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흐릿해져가는 옛 영화관 문화에 대한, 차이밍량의 송가와도 같은 영화다.
스틸 라이프
Still Life | 홍콩·중국, 2006
감독 지아장커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지는 개개인의 존엄을 끝까지 기억하려는 지아장커의 시선이 돋보이는, 2006년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스틸 라이프>는 16년 전에 헤어진 아내를 찾는 남자, 그리고 2년 동안 연락이 끊긴 남편을 찾는 여자의 이야기를 함께 그려낸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두 인물이 아니라, 텅 비어가는 도시 그 자체다. 건물을 무너뜨리고 새로 짓는 변화 정도가 아니라, 마을 전체가 저수지 바닥으로 사라져버릴 정도의 격변에 처한 곳. 지아장커는 DV 카메라 특유의 질감과 롱테이크 기법을 활용해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이 인물과 도시의 숨결을 감각하도록 만든다. 낯설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그저 오늘을 버텨내는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삶이 거기에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도록 말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
Drive My Car | 일본, 2021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아내를 잃은 후 남겨진 침묵 속에서 자신과 세상을 운전하는 사람. 동시대 가장 주목받는 일본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의 여덟 번째 장편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 침묵을 길고 느린 롱테이크로 붙잡으며, 말하지 못한 감정과 관계의 틈새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2년 전 아내를 떠나보낸 연극 연출가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초청받은 영화제에서 전속 운전사 미사키(미우라 도코)를 만나 치유의 여정을 함께하는 이야기. 가후쿠는 연극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서로 다른 언어로 소통하며 세상의 비밀에 한 걸음 더 다가간다. 마음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감정을 대면하는 시간 안에 관객을 초대하며 상실, 아픔, 후회, 이해 그리고 용서를 통과해 다시 삶을 살아가는 회복의 과정이 깊이 있게 펼쳐진다.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말이다.
흑사회
Election | 홍콩·중국, 2005
감독 두기봉


<흑사회>는 국내에는 <천장지구>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두기봉 감독의 연출력이 정점에 달한 작품이다. 두기봉은 이 작품을 통해 전기 홍콩 누아르의 낭만적인 성격을 해체하고, 자신만의 세계관과 연출 방식으로 홍콩 누아르를 새롭게 정의했다. 영화는 홍콩 삼합회를 소재로 한 권력 다툼을 그린다. 하지만 전형적인 갱스터 액션이라기보다는 정치극에 가깝고, 총성과 폭발 대신 절제된 리듬으로 긴장을 조성한다. 삼합회 내부에서 진행되는 선거라는 설정은 민주주의가 범죄 세계에서 어떻게 권력의 또 다른 얼굴로 작동하는지를 날카롭게 풍자한다. 아름다운 롱숏과 느긋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지만, 관람을 마친 이후 치열한 액션영화를 본 듯한 긴장감을 남기는 영화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This Is Not a Film | 프랑스, 2011
감독 자파르 파나히, 모즈타바 미르타마스브


검열과 억압 속에서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목부터 하나의 선언처럼 느껴지는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는 단순한 다큐멘터리를 넘어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 영화감독이 카메라 앞에 선 기록이다. 이란 정부로부터 20년간 영화제작을 금지당한 자파르 파나히는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자신의 일상을 촬영한다. 집 안에서 시나리오를 낭독하고, 상상 속에서 연출하는 등 영화가 존재하지 못하는 상황 그 자체를 영화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문 배우가 아닌 이웃들의 일상적인 모습이 프레임에 담기는데, 언뜻 스치는 표정과 행동이 관객을 웃게 하다가도 때론 먹먹한 슬픔에 잠기게 한다. 무기명으로 가득한 엔딩 크레디트를 보고 나면, 극장을 나서서도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오래도록 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