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근래에 느꼈어요. 사라지지 말고 살아 있자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 안팎에서, 사랑하는 존재들 곁에서 배우 한예리가 발견한 삶의 힘.


먼저 감사의 말부터 전하고 싶습니다. 마리끌레르와 부산국제영화제가 함께 개최하는 ‘아시아스타어워즈’의 사회를 맡았어요. 이 행사만을 위해 부산에 와야 하니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사실 고민을 좀 했어요.(웃음) 그런데 제가 마리끌레르와 인연이 깊기도 하고, 아시아 영화인을 위한 행사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의미가 있겠다 싶더라고요. 좋은 자리이기 때문에 기꺼이 갈 수 있는 것 같아요. 또 부산국제영화제 가 영화인에게는 경사잖아요. 배우로서 꾸준히 부산을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매번 감사하더라고요.
지난해에는 작품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죠. ‘영경’ 역으로 함께한 강미자 감독의 영화 <봄밤>이 당시 ‘한국영화의 오늘’ 섹션에 초청되어 처음으로 관객을 만났어요.
그때 많은 관객이 <봄밤>을 좋아해주셨어요. <봄밤> 뿐만 아니라, 제 첫 장편영화이자 강미자 감독님의 전작 <푸른 강은 흘러라>(2008)를 처음 상영한 자리도 부산국제영화제였거든요. 그래서 지난해 부산에서 보낸 시간이 제게도, 감독님에게도 더욱 뜻깊지 않았을까 싶어요.
<봄밤>은 파혼 후 알코올중독에 빠진 영경과 류머티즘을 앓는 ‘수환’(김설진)이 죽음을 앞두고 서로의 상처를 응시하는 과정을 그리죠. 이 작품을 통해 감독님과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나 작업하면서 인상 깊은 점이 있었나요?
감독님이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이 확실히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푸른 강은 흘러라>를 찍을 때, 감독님이 제가 맡은 ‘숙이’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숙이는 항상 좋은 생각만 했으면 해. 숙이는 그런 사람이야.” 제가 실제로 숙이 같은 에너지를 갖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촬영 기간 내내 좋은 생각을 하려고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봄밤>을 작업할 때도 영경에게 고유한 에너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에너지가 무엇일지 깊이 살피고, 많이 느껴보려고 노력했어요.
영경의 에너지가 무엇일지 살피는 과정을 거치며 이해한 그는 어떤 사람이던가요?
저한테 영경은 참… 아픔이 있지만 슬프기만 한 사람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상처를 지닌 영경의 내면에는 우울과 분노, 죄책감 같은 여러 감정이 있을 텐데, 자기 연민은 적은 것 같더라고요. 그게 영경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슬픔을 덜어내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왔을 테고, 초반에는 자주 무너졌겠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을 좀 더 거리감을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영경은 가끔씩 크게 소리 내 울죠. 목련나무 앞에서 목 놓아 울던 영 경의 얼굴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때 영경의 마음은 어땠을 것 같은가요?
영경에게 눈물은 습관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겪는 슬픔이라면 눈물을 참으면서 버티려고 할 텐데, 그게 아니니까 오히려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거죠. 엉엉 울다가 이내 눈물을 쓱 닦아내고. 그게 영경이 슬픔을 해소하는 방식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영경은 마음이 답답하면 그냥 눈물이 줄줄 나는 사람이구나’ 싶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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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영경이 단단한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수환의 존재도 영경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 같아요. <봄밤>에 대해 ‘아름다운 멜로’라고 표현한 적이 있어요.
아, 너무나 아름답죠. <봄밤>에 함께하기 로 결정한 이후 김설진 배우에게 수환 역을 권했는데, 시나리오를 건네면서 “오빠, 이건 대단한 멜로야”라고 말해줬어요.(웃음) 그게 이 영화에 대한 제 첫인상이기도 했어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영화는 슬픔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연기하지 않으면 관객한테 힘듦만 안길 수 있고,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는 아니라고 봤어요. 그래서 영경이 수환에게 받는 사랑에 더 집중하려 노력하면서 촬영했어요.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영경과 수환의 감정을 헤아리다 보니 사랑이란 무엇일지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강미자 감독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랑의 기쁨은 늘 아픔의 시간과 함께한다는 사실이 사랑을 더욱 애틋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애틋함을 표현한 두 배우는 사랑에 대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해요.
설진 오빠가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게 참 중요하구나”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말이 되게 좋더라고요. 누군가를 그 자체로 사랑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사랑하다 보면 그 사람의 어떤 면을 바꾸고 싶어질 때도 있고요. 그런데 영경과 수환은 서로를 온전히 받아 들여요. 나아가 서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최대한 해주려고 노력하고요. 어떻게 보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과 닮은 것 같기도 해요. 그토록 충만한 사랑이 영경의 마음 한구석에 온기를 채워주지 않았을까 싶어요. 영경이 생의 끝자락에서 좋은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수환도 그런 것 같고요. 비록 최선은 아닐지라도, 최악을 면하게 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그 사실이 힘겨운 시간을 버티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두 인물의 사랑은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도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질병으로 신체를 가누기 어려운 수환이 술에 취한 영경을 부축하려 애쓰는 모습에서요. 한예리 배우와 김설진 배우의 인연이 20여 년 전 무용이라는 접점 에서 시작되었다고 들었는데, 그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둘 다 무용을 오래 해서 그런지 신체의 무게중심 이동을 잘 감지하는 편이에요. 잔뜩 취한 영경이 수환 옆에 있다가 갑자기 쓰러지는 장면을 찍을 때도, 제 머리가 땅에 부딪힐 일은 절대 없겠다 싶더라고요. 설진 오빠가 제 몸의 움직임에 따라 악착같이 잡아줄 거란 믿음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촬영 전에 동선을 미리 짜두지 않았고, 그 덕분에 영경과 수환의 감정이 더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육체를 통해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게 참 좋더라고요.



직접적인 설명보다는 표현에 집중한 덕분인지 듣던 대로 영화가 시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원작인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 <안녕 주정뱅이>는 12년에 걸친 서사를 다루는데, 영화는 훨씬 밀도 높게 전개돼요.
몇 년 전 원작을 읽은 상태로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영화에서는 소설의 서사가 훨씬 압축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현장에서 촬영을 많이 하지 않았는데도, 감독님이 편집 과정에서 더 덜어내신 거예요. 편집 작업도 오래 해오신 분인데, 늘어질 만한 부분은 전부 잘라내고 시적으로 배치하셨더라고요. ‘와, 감독님 단호하다’ 싶었어요.(웃음) 그 덕분에 구구절절한 이야기보다는 인물들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영화가 완성된 듯해요. <봄밤>이 관객에게 아프지만 따뜻한 작품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요.
따뜻한 마음이 담긴 영화를 만드는 현장에도 온기가 감돌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소수의 팀원과 함께 촬영했다고 들었어요.
배우를 제외하고 감독님을 포함해 스태프가 총 6명이었어요. 소규모로 작업하면 장비 설치 등을 위한 기다림이 길지 않고, 각자의 에너지도 단시간에 응집돼요.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감독님이 생각하는 그림에 좀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고요. 작은 현장만의 매력이 확실히 있더라고요.
하지만 작은 현장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도 있을 것 같아요. 이와 관련해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이렇게만 작업하는 배우가 있다면 반대한다.” 다양한 현장을 경험해봤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속상한 마음에 한 말이었어요.(웃음) 물론 작은 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배움이 있죠.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만 어렵게 작업한다면 서러워지거나 스스로를 책망하게 되는 순간을 마주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배우들이 보다 다양한 현장을 오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돼요. 작품을 선택할 때 무언가를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배우들이 작은 현장에 함께하면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배우의 참여가 영화에 부여하는 힘이 있고, 그게 이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봐요.
배우로서 본인의 일을 넘어 산업 전반에 대해 폭넓게 고민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제 활동에 비중을 더 둬야겠지만, 영화계에 대한 고민도 배제할 수는 없더라고요. 영화 산업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고, 다양성의 범위도 예전보다 좁아졌다고 느껴요. 더 다양한 작품을 만나기 위해서는 영화제작을 시도하고 실행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야 할 거예요. 그 기회는 자본의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독립영화에서 많이 생길 테고요. 영화인들이 독립영화를 충분히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독립영화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색깔을 내봐야 상업영화로 넘어가서도 적당한 작품을 만들지 않게 되는 것 같거든요.


한예리 배우의 시작점도 단편 독립영화죠. 이후 영화와 드라마, 공연,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어요.
영역은 다르지만, 모두 표현 방식의 일종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표현을 하면서 제 삶이 좀 더 풍부해진다고 느껴요. 이 세상에 쓸모없는 일은 없고, 무얼 하든 언젠가 제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왔거든요. 다채로운 활동이 저한테 분명한 득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니까 더욱 재미있게 임할 수 있는 것 같고요. 재미와 즐거움을 찾는 게 저한테는 너무나 중요해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가면서 가장 큰 즐거움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워요. 결과를 위해 배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촬영과 홍보 외에는 거의 없으니, 과정을 즐겨야 작업이 무의미해 지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 즐거움은 몰입에서 나오는 듯해요. 괴로울 때도 당연히 있지만, 그 안에서 최대한 치열하게 집중하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면 ‘나는 이 일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좋아하는 만큼 오래 하고 싶고요.
하지만 배우는 선택받아야 지속 가능한 직업이죠. 한 인터뷰에서 “배우는 누가 불러줘야 가치를 가지는 직업이지만, 더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가려고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주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나요?
‘의도’요. 매 순간 의도한 대로 살 수는 없겠지만, 의도해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더라고요. 제가 독립영화에 꾸준히 참여하는 것도 그 일환이고요. 배우뿐만 아니라 인간 한예리로서도 주체적인 의도를 가지려고 해요. 요즘 드는 생각인데, 저라는 사람을 좀 더 알아가야겠다 싶어요. 오랫동안 무용을 했고, 연기를 시작한 이래로 계속 달리다 보니 저에 대해 성찰한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스스로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무언가에 끌려다니지 않고, 어떻게 나아갈지를 정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저 자신을 용기 있게 마주하고, 제 안의 균열과 변화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으면 해요.
20년의 활동을 거치고, 40대가 되어 ‘나’에 대한 고민에 당도한 거네요.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이 어떤 시기인지는 지 나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항상 그렇더라고요. 청춘일 땐 청춘을 모르고, 시간이 흐른 뒤 ‘그때 참 좋았구나’ 하는 거죠. 그래도 지금의 제가 좋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기를 바라요.
지난 7월 SNS를 통해 <봄밤> 개봉 소식을 전하며 이런 문장을 남겼죠. “영경에게 수환의 사랑이 있어 다행입니다.” 지금의 한예리에게는 무엇이 있어 행인지 궁금해요.
일단 제가 사랑하는, 온기를 지닌 사람들이 곁에 있어 다행이에요. 제 안에 일에 대한 열정이 있어 감사하고요. 소소하게는 맛있는 디저트, 음식과 술, 귀여운 강아지 영상…(웃음) 말하자면 진짜 많죠. 이런 것들이 결국에는 삶을 지탱해주는 것 같더라고요.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근래에 느꼈어요. 사라지지 말고 살아 있자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처럼 작은 행복들을 누리면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