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렉터의 역할을 믿는다. 컬렉터들이 예술가가 유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일조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컬렉팅의 힘을 믿으며 예술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 한국에서 두 번째 전시 <Across Winds and Time>을 개최한 갤러리 빌팽의 공동 설립자, 아서 드 빌팽(Arthur de Villepin)이 말하는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서울 곳곳이 예술의 열기로 가득한 아트위크 기간에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아트 신의 흐름과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미술 시장이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판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여러 기회가 생기고 있다고 말이다. 내게도 새로운 시작을 위한 첫걸음이 될 거라 생각하며 서울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기고 있다.
강명희, 자오우키(Zao Wou Ki), 마리 드 빌팽(Marie de Villepin)과 함께하는 그룹전 <Across Winds and Time>을 개최했다. 세 작가의 작품을 한데 모았을 때, 어떤 효과가 나타날 거라 생각했나?
세대와 국적, 언어를 넘어선 대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오우키는 1920년대 출생의 거장으로 오래도록 자신의 작품 세계를 개척했 고, 강명희는 78세임에도 여전히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아시아 현대미술의 중심에 서 있다. 그리고 마리 드 빌팽은 떠오르는 신예로 두 선배를 바라보며 자신만의 길을 찾고 있다. 세 작가는 세대도 출신도 언어도 다르지만, 회화라는 공통 언어를 공유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전시 공간으로 이유진갤러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갤러리 빌팽이 추구하는 방향과 맞닿아 있는 공간이다. 이유진갤러리는 서울 청담동의 오래된 벽돌 주택, 실제로 한 컬렉터가 살던 집을 개조한 곳이다. 전시를 통해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해 환대하며 공동체를 가꾸는 감각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단순히 전시를 선보일 일회성 장소가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이 자리에 뿌리내린 공간을 원했다.
2023년에 전시 <강명희: 시간의 색>을 선보인 이후 한국에서 개최하는 두 번째 전시다. 갤러리 빌팽은 강명희 작가와 오래도록 깊은 관계를 맺어왔는데,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강명희의 작업은 내게 완벽하지 않은 것 사이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음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사이에서 가치를 찾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의 작품은 때때로 거칠고 혼란스럽다. 그는 단순 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따라 그리지 않는다. 자연과 대화하며 자신 안의 자연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다. 강명희 작가가 몽골의 고비사막에서 작업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캔버스를 펼친 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는 순간, 두려움을 느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고비사막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느끼는 인간의 두려움인 것이다. 결국 강명희의 작품은 인간이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스며드는지를 탐색한 결과다.
당신이 줄곧 언급해온 예술의 사회적 가능성, 사람과 세상을 연결하는 일의 한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예술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갤러리를 운영하나?
예술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사이의 대화를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19~20세기에는 예술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집단이 분명히 존재했다. 인 상주의, 사실주의, 입체주의를 떠올려보라. 이들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며 변화를 일궈내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갤러리 빌팽이 단순히 작품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예술가와 수집가를 연결 하는 아트 하우스가 되길 바란다. 물론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예술을 통해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안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예술 경험에서 관계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관계의 힘, 더 나아가 사람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술과 가까운 삶을 살았다. 엄마와 여동생은 예술가고 아버지는 컬렉터이며 주변에 늘 예술가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예술가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이 과정에서 다른 이들은 가질 수 없는 작품을 수집했다. 친밀한 관계를 기반으로 신뢰가 쌓였을 때, 컬렉터는 더 과감하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단순하다. 최고의 작가를 선별하고, 그에 관심을 가지는 컬렉터들과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 다수의 사람을 모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가치에 동의하는 소수와 깊은 유대감을 쌓고, 그들과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2019년에 전 프랑스 총리인 아버지 도미니크 드 빌팽과 함께 홍콩에 갤러리 빌팽을 설립했다. 어떤 갤러리스트가 되고 싶었나?
나는 내가 갤러리스트가 아니라 사업가라고 생각한다. 사업가라는 정체성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단순히 스스로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 새로운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둘째로 그 해결 방식이 창의적이어야 한다. 기존의 것을 반복하기보다 새로운 접근을 통해 혁신적인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홍콩에 갤러리 빌팽을 설립했다. 다만 그 시기에 홍콩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고, 코로나19 등의 상황으로 인해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쉽지 않은 시기였지만, 그때 한 가지 배움을 얻었다. 늘 본질에 집중하는 마음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 바로 예술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갤러리를 운영하면서도 가치 있 고 아름다운 것에 집중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 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가치’의 의미를 잃은 것 같다. 다수가 원하는 것만이 가치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2~3년만 시간이 지나도 유행에 따라 원했던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않나. 결국 진정한 가치는 장기적 관점에서 발현된다고 본다. 고흐, 모네, 마네를 떠올려보라. 그
들 모두 초기에는 인정받지 못했다. 역사에 오래 남은 예술가 중 대부분은 생전에 그림자의 위치에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거부당했다. 결국 가치는 다수의 인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흔들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그 가치를 좇았을 때 따르는 결과라고 본다. 이는 컬렉터가 지녀야 할 태도와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컬렉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
먼저 컬렉션은 자신의 박물관을 만드는 일이다. 작품을 단순히 몇 년 뒤에 팔기 위한 무엇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의 아이들에게 전할 유산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자신 안의 질문을 탐구하며 스스로에게 울림을 주는 작가를 발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직접 만나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작가의 작품을 모으기를 권한다. 다양한 작품을 수집하는 것보다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수의 작가에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득 궁금하다. 다수의 관심이나 유행을 따라가지 않는 태도가 갤러리 운영에 어려움을 가져오지는 않나?
음… 글쎄. 앞서 말했듯 나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려 한다. 동시에 나는 컬렉터의 역할을 믿는다. 컬렉터들이 예술가가 유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일조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갤러리 빌팽은 ‘컬렉터를 위한, 컬렉터에 의한’ 갤러리를 표방한다. 우리가 돈을 버는 이유는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컬렉터로서 작품을 모으기 위한 것이다. 내가 아는 파리의 몇몇 갤러리는 초기에 크게 성공했지만, 지금은 남은 것이 없다. 작품을 다 팔고 수수료만 벌었다. 갤러리는 작품을 많이 받아 팔고 싶어 하지만, 컬렉터는 작품의 가치가 상승하기를 바란다. 우리 역시 컬렉터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컬렉팅의 어떤 면에 매료되었나?
사실 살아가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환경, 사람, 일 등 많은 것이 이미 결정된 채로 주어지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작은 것들을 선택한다. 하지만 내가 집 안에 무엇을 둘지, 무엇을 수집할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나를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어줄 작품과 함께하고 싶다. 컬렉팅은 ‘이 작품을 쟁취해야 한다’는 경쟁의 과정이 아니라, 작가의 여정에 함께하겠다는 약속이다. 물론 한 작품을 사서 평생 소장하지 않고, 그중 하나를 팔고 다른 작품을 구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컬렉터가 그 작가와 작품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앞으로는 어떤 일이 펼쳐질지를 궁금해하며 그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여정을 사랑한다.
당신이 작가의 여정에 함께하고 싶다고 느끼는 작품에는 어떤 특징이 있나?
대부분 직관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공통점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보는 순간 바로 마음이 끌릴 때가 많으니까.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기준이 있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 생각해야
하는가를 두고 여러 논의가 있지만, 나는 분리하지 않는다. 작품이 작가의 세계와 일치할 때, 그 작품을 더 사랑하게 된다. 작품의 탁월성과 별개로 작가 개인에서 출발하는 진정성이 내게는 중요하다. 그래서 작가를 직접 만나 시간을 보내며 그와 함께 여정을 걸어나갈 수 있을지를 판단한다. 어떤 경우에도 그를 지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때, 비로소 작품과 연결된다.
갤러리 빌팽이 만들어갈 가치 있는 순환의 여정이 기대된다. 마지막 질문이다. 앞으로 한국에서 어떤 활동을 이어갈 계획인가?
현재로서는 여러 기관 전시를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다. 장기적으로는 이곳에 공간을 마련해 우리의 커뮤니티를 더욱 공고히 만들 방식도 고려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