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위의 이야기는 관객의 시선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
영화를 사랑하는 문화 예술계 인물 10인에게 영화에 관한 10개의 질문을 던졌다.
‘지금 떠오르는 영화의 한 장면’부터 ‘가장 큰 영향을 준 영화’까지.
10명의 관객이 전해온 답변 속에는 영화를 완성한, 그들 각자의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세영
영화감독
첫 장편영화 <다섯 번째 흉추>로 제73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받은, 한국의 넥스트 시네아스트. 새 장편영화 <지느러미>와 <누가 내 십자가를 훔쳐 갔는가?>가 2026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최근 1년간 가장 큰 놀라움을 안긴 영화
알베르트 세라의 <고독의 오후>.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면서도 지루하고 질긴 영화다. 연민과 혐오 등 상반되는 감각을 동시다발적으로 느끼게 한다. 감독이 “시간을 느끼고 그 지속을 체감하는 것, 시간과 공간을 자각하는 방식을 더 강렬하게 만드는 게 영화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는데, 이 같은 시도의 결과로 보인다.
하루 종일 영화 한 편을 반복 재생한다면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멍하고 혼돈스러운>. 학기의 마지막 날을 맞은 10대들의 하루를 그리는데, 별다른 사건 없이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담아낸다. 재즈 음악을 듣듯이 느긋해지는, 나태함에 빠르게 접속하게 해주는 영화.

외우고 있는 영화 대사
“너의 이러한 행동의 이데올로기는 뭐냐?”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에 나오는 대사다. 지난해 초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1950~2020년대 한국 영화의 대사를 활용해 하나의 영상을 만드는 ‘대사극장’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백 편의 영화를 봤는데, 유독 이 대사가 기억에 남았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내뱉지만 인정하기 싫은, 허울 가득한 지질한 말이라 그런가.

최고의 무비 스타
톰 크루즈. 올해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을 재미있게 봤다. 몸의 움직임만으로 3시간을 긴장감 있게 채울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화면 위 신체의 운동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키는 배우다.
가장 좋아하는 사운드트랙
차이밍량이 연출한 <안녕, 용문객잔>의 ‘Liu Lian’. 이 영화에 는 음악이 거의 나오지 않는데, 발소리 같은 사실적인 다이제틱 사운드(영화 세계 안에 존재하는 소리)만 줄곧 나오다 엔딩에 이 노래가 나온다. 극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영화에서 극적인 노래가 흘러나오자 나도 극장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파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관객의 감정을 흔드는, 일종의 ‘킥’이라 느꼈다.

가장 완벽한 포스터
<줄리언 돈키보이> 포스터. 화질이 좋지 않고, 레이아웃은 5분도 고민하지 않고 잡은 것 같다. 그럼에도 영화는 허술하지 않다. ‘얼마나 밀도 있게 대충 하느냐’ 의 미학을 보여주는 영화라, 포스터 역시 그 연장선이라 느낀다.
무조건 스크린으로 봐야 하는 영화
만든 사람이 스크린으로 보길 바라는 영화. ‘내 영화는 스크린으로 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이들의 작품은 굳이 극장에서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내 영화는 스크린에서 봐주길 바란다.

‘이 영화 안에서 살고 싶다’고 느낀 작품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영화에 담긴 대만의 풍경이 참 아름답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감독 역시 자신이 살고 있는 추한 도시에서 어떻게든 아름다움을 포착하거나 만들어내려고 한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 대만에 가고 싶어지지만, 가지 않더라도 ‘지금 한국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가치를 발견해야 하는가’ 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하는 영화.
한 명의 감독을 만날 수 있다면
데이비드 린치. 유아적인 사람 같다. 원초적이며 좋고 나쁨이 명확한데, 그 순수함을 잃지 않고 당당히 지켜낸다. “제대로 늙는 법은 다시 어려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

가장 큰 영향을 준 영화
차이밍량의 <거긴 지금 몇시니?>. 어딘가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세 인물의 시간을 따라갈 뿐, 내용이라 할 것이 거의 없다. 남자가 TV 보는 모습을 5분간 보여주고, 여자가 엉엉 우는 모습을 계속 보여준다.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설정으로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데, 그 안에 아주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나는 그게 용기라고 느낀다. 관객에 게 팝콘을 먹이듯 모든 걸 설명하려는 강박을 가지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두는 것. 그 태도를 이 영화에서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