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그대로 반영된 것 아닐까. 말하자면 좀 비뚤어진 시선이.”
반쯤 기울어진 채로, 삶의 아이러니를 끌어안으며 확장되는 변성현 감독의 세계.
화이트 슬리브리스,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어링은 본인 소장품.

인물과 상황이 빚어낸 모순과 아이러니. 변성현 감독의 영화는 늘 익숙한 문법을 깨는 데서 출발한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의 잠입 경찰 ‘현수’(임시완)는 조직원 ‘재호’(설경구)에게 대뜸 “형, 나 경찰이야”라 고백하며 언더커버 장르의 클리셰를 정면으로 비틀었고, <길복순>의 주인공 ‘복순’(전도연)은 업계의 정점에 선 킬러이자 10대 딸을 둔 싱글맘이라는 양가적인 존재로서 삶의 아이러니를 드러냈다. 누아르, 액션, 시대극을 거치며 익숙한 장르에 색다른 숨결을 불어넣어온 그는 영화 <굿뉴스>로 유머와 씁쓸함,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블랙코미디에 도전한다. 이름도, 출신도 베일에 싸인 정체불명의 인물 ‘아무개’(설경구)를 통해 감독은 다시 한번 겉으로 드러난 것과 이면에 자리한 진실에 대해, 우리 삶 가까이에 도사린 모순에 대해 말한다. 감독 변성현의 시선을 고스란히 품은 서사들은 대중의 호기심이 닿는 한, 그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무언가가 남아 있는 한 멈추지 않고 확장된다.


<길복순> 이후 2년 만의 신작 <굿뉴스>가 제50회 토론토 국제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돼 첫선을 보인다. OTT 공개에 앞서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는 자리인 만큼 감회가 남다를 듯하다.
소식을 듣고 무엇보다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OTT 공개든 극장 개봉이든 제작 과정에서 들인 모두의 노고는 다르지 않다. 다만 좋은 스피커로 듣는 음악과 휴대폰으로 듣는 음악이 완전히 다르듯, 영화 역시 어디서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 감상이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좋은 영화 만들자’는 마음 하나로 다같이 완성한 장면들을 스크린을 통해서도 선보일 수 있게 되어 그 점이 가장 기쁘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도 초청됐다. 국내 영화제에서 작품을 상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상영을 앞둔 마음이 어떤가?
<불한당>의 공식 상영이 끝나고 팬들이 자리를 마련해준 덕에 부산에서 GV에 참석한 적은 있지만, 공식 상영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길복순>을 국내에서 상영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는데, 이번에는 공개 전부터 국내 관객에게 극장에서 보여줄 수 있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한편으론 긴장도 된다. 원래도 내 작품을 극장에서 보지 않는 편인데, 수많은 관객의 반응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니 벌써 도망치고 싶다.(웃음) 그래도 고심해 만든 장면들에서 의도한 대로 반응이 터져 나올지 기대된다.
<굿뉴스>는 1970년대 한 일본 여객기가 적군파 조직원에 의해 납치된 ‘요도호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극적인 사건인데, 어떤 계기로 영화화를 결심했나?
몇 년 전 이 일화를 접했을 때만 해도 워낙 황당한 소재다 보니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지겠구나’ 하고 짐작하긴 했지만 직접 영화화할 계획은 없었다. <길복순>을 마치고 다음 작품으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블랙코미디에 도전해봐야겠다 싶어 장르부터 정해두었는데, 그에 맞는 소재를 찾다 불현듯 이 사건이 떠올랐다. 블랙코미디는 유머와 씁쓸함, 날카로움이 공존해야 하는 터라 그 동안 두려워서 피해온 장르인데, 마침 <굿뉴스>의 초고를 쓰던 시기에 <슬픔의 삼각형>과 <기생충> 같은 작품을 보며 자극을 받았다. 두 작품 모두 코미디 요소를 살리면서도 현실의 폐부를 드러내지 않나.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한번 도전해보자 싶었다.
실제 사건의 정황이나 인물의 선택을 두고도 여러 해석이 엇갈린다. 특히 무엇에 중점을 두어 이야기를 확장해갔나?
여러 가지 설 가운데 일부를 취사선택했고, 당시 인터뷰를 참고해 고증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다만 당시에 벌어진 일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사건 이후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그 빈 공간 안에 당시 고민하던 화두나 감정들을 녹여내면 현시대와도 맞닿아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굿뉴스>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얼마든지 거짓일 수 있고, 그 경계가 얼마나 모호한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작중 가상의 인물인 ‘아무개’(설경구)는 작전 전체를 지휘하면서도 권력 뒤편에 숨어 전개를 이끄는 존재라는 점에서 <킹메이커>의 ‘서창대’(이선균)가 겹쳐 보이기도 한다.
서창대 캐릭터를 블랙코미디 장르 안에서 새롭게 그려보고 싶었다. 늘 카메라 뒤편에 놓이는 입장이다 보니 스포트라이트 바깥에서 움직이는 인물에 자연스레 끌리는 것 같다. 두 인물 모두 전략가지만, 아무개 쪽이 더 고단수다. 서창대가 앞에 나서고 싶어 하는 성향 때문에 전체적인 대의를 놓치는, 말하자면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 장수’ 같은 인물이라면, 아무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작전을 승리로 이끄는 인물이다. 개인적인 우환을 일절 드러내지 않고, 모든 행동이 연기처럼 느껴져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캐릭터라고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써나갔다.
설경구 배우와 어느덧 네 작품 연속으로 함께하고 있다. 오랜 세월 축적된 신뢰가 이번 영화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듯하다.
이제는 첫 테이크만 봐도 이후에 어떤 식으로 연기를 펼칠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경구 선배는 내게 더없이 편하고 든든한 존재다. 그 안정감 덕분에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선배가 건넨 첫마디는 “얘 뭐 하는 애냐?”였다.(웃음) 아무개는 살아온 배경이나 동기가 설명되지 않은 채 곧장 행동부터 취하는 캐릭터라 여러모로 쉽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보다 캐릭터나 장면에 대한 내 생각을 더 귀담아듣고 군말 없이 따라주셨다. 예전에는 디렉션을 하면 왜 그래야 하느냐고 종종 반문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내 해석을 묻고 이해해보려 하신 것 같다.
2년 전 한 인터뷰에서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로 <약한영웅 Class 1>의 홍경 배우를 꼽았는데,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다. 함께 작업하며 발견한 새로운 면모가 있다면?
홍경 배우는 ‘왜’라는 의문에 납득해야 움직이는 쪽이다. 질문이 아주 많고 집요하다. 연기에 대한 욕심도 어마어마해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도 늘 얼굴에 묘한 불만족과 그늘이 내려 앉아 있다. 촬영이 끝나면 늘 검지를 들고 “한 번만 더…”를 외쳐대서 ‘홍경표 손가락’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웃음) 그 집요함이 내게도 엄청난 자극제가 됐다. 질문에 대비하려고 촬영 전날부터 시나리오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고민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길이 열리기도 했다. 피곤하면서도 즐거운 작업이었다.(웃음)
작품 공개를 앞둔 시점인데, 어떤 반응을 기대하고 있나?
간혹 작중 인물의 말투나 대사가 스태프 사이에서 유행처럼 돌면 그 캐릭터가 대중에게도 통하겠구나 하는 확신이 생기는데, 이번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촬영 초반에는 아무개의 성격과 말투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현장 사람들이 하나둘 그의 말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안심이 되더라. 영화가 공개되고 관객의 반응은 어떨지 기대된다.
누아르, 액션, 시대극에 이어 블랙코미디까지,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작품마다 서로 다른 장르에 도전해왔다. 장르적 다양성은 어떤 동기에서 비롯된 건가?
어디까지나 상업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최대한 여러 장르를 건드려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호러만 제외하면 모든 장르에 도전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완벽한 장르영화를 구현하는 것보다는 이질적 장르를 한데 섞는 방식을 선호한다. <불한당>은 누아르의 외피를 쓴 멜로드라마고, <길복순> 역시 액션의 틀 안에서 가족영화의 결을 담았다. 어찌 보면 장르는 핑계고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장르로 풀어내는 쪽에 가깝다.
장르뿐만 아니라 서사나 인물을 담아낼 때도 꾸준히 모순과 아이러니에 주목해왔다. <불한당>에서는 서로 속이고 배신하는 관계 속에서도 오히려 헌신의 감정이 깊어지고, <길복순>에서는 비현실적 설정 안에서 지극히 현실적 삶의 고민을 안은 인물을 조명했다. 유독 모순적인 상황이나 인물에 이끌리는 이유 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아마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그대로 반영된 것 아닐까. 말하자면 좀 비뚤어진 시선이. 그 때문인지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순적 상황이나 인물로 전개가 흘러가곤 한다.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은 이 레퍼토리를 좀 지겨워하더라. 언젠가부터 새로운 시나리오를 보여주면 “또 이 얘기야?” 하고 일침을 놓는다.(웃음) 하지만 좋게 보자면 그것이 내 색깔 아닐까 싶다. 간혹 몇 장면만 봐도 뒷 이야기를 전부 알 것 같은 영화가 있지 않나. 어떻게든 그런 뻔한 전개 나 결말은 피하고 싶은데, 천재적인 무언가를 내놓지 못한다면 기존의 것을 비트는 성의라도 보여야 하지 않을까.
대중이 갈망하는 서사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사이에서는 어떻게 균형을 잡아가나?
대중을 따로 상정하지는 않는다. 나부터 대중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기에 언제나 일차적인 기준을 나 자신에게 둔다. 내가 즐거우면 사람들도 그럴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 만드는데, 예상이 빗나갈 때도 많다.(웃음) 그렇지만 최소한 스스로 납득해야 뻔한 상업영화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계속 달려가는 것 같다.
<나의 PS 파트너>가 큰 흥행을 거둔 이후 <불한당>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5년이 걸렸고, <불한당> 이후에는 1~2년 간격으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창작에 속도가 붙은 계기가 있나?
속도는 늘 빨랐다.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 사실 <불한당>의 시나리오는 <나의 PS 파트너>를 끝내자마자 진작 완성했다. 하지만 작품이 흥행한 뒤 한동안 제의가 들어오는 작품은 로맨틱 코미디나 휴먼 코미디뿐이었고, 그걸 받아들이면 입지가 한길로 굳어질 것 같아 그 자리에 드러누워 버텼다. 하고 싶은 걸 시켜주지 않으면 안 움직이겠다는 심보로 기다린 거다. <불한당>으로 완전히 다른 장르를 소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뒤에는 다행히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기회가 꾸준히 주어졌다. 하지만 이 기회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걸 늘 인지하고 있기에, 지금은 그저 쉬지 않고 열심히 찍고 싶은 마음 뿐이다.
자신의 영화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은 어디라고 생각하나? 언젠가 꼭 완성하고 싶은 궁극의 영화가 있다면?
결국 나에게도, 관객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것 같다. 이런 마음을 동력 삼아 지금까지 열심히 작업해왔다. 완성하고 싶은 궁극의 영화는 늘 ‘다음 영화’다. 신인 시절에는 장편 다섯 편만 찍고 은퇴하겠다고 호언장담한 적도 있지만,(웃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존재하는 한 평생 쓰고 만들 수밖에 없다. 언젠가 “이 정도면 됐다” 하고 스스로 만족하고 내려놓는 순간이 올 것 같지도 않고. 대중이 더는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거나,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고갈되는 순간이 오면 그때가 은퇴‘당하는’ 순간 아닐까? 그러니 그때까지는 계속해서 다음 영화를 만들고 싶다. 최선을 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