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의 불완전함을 응시하는 섬세한 시선, 이에 대비되는 서늘한 유머와 엇갈리는 감정의 기류.
선명한 결을 가지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세계에 생기를 더하는 것은 ‘음악’이다.
침묵에 스며들어 장면의 공기를 바꾸고, 때로는 서사 자체를 움직인다.
극장을 나선 뒤에도 오랜 여운을 남기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속 음악을 들여다본다.
매그놀리아(1999)
목소리로 엮은 구원과 고백의 서사
Aimee Mann, One
One is the loneliest number that you’ll ever do / Two can be as bad as one / It’s the loneliest number since the number one.
에이미 만의 앨범 <I’m Stupid>를 듣던 폴 토마스 앤더슨은 외로운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매그놀리아>의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상처와 공허가 짙게 깔린 그의 음악은 이 영화의 시작이자 중심으로 자리한다.
오프닝 시퀀스에 흐르는 ‘One’. 쓸쓸함을 담담히 노래하는 목소리는 당찬 인물들의 모습과 대조되며 이들에게 감춰진 사연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후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조금씩 겹쳐지고,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Wise Up’을 노래한다. 저마다의 상처와 후회, 속죄가 음악으로 연결되는 장면은 관객을 감정의 심연으로 이끈다. 엔딩을 장식하는 ‘Save Me’는 제목 그대로 구원을 청하는 노래다. 에이미 만의 떨리는 목소리는 그 어떤 대사보다 진실하게 인물들의 내면을 비추며, 그들의 절망까지 끌어안는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에이미 만의 음악을 통해 인물들의 삶을 섬세하게 위로하고, 다시 한번 희망을 향해 나아가도록 했다.
펀치 드렁크 러브(2002)
불협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리듬
Shelley Duvall, He Needs Me
For once, for once in life / I’ve finally felt / That someone needed me/ And if it turns out real / Then love can turn the wheel / Because / He needs me, he needs me
<펀치 드렁크 러브>는 우울한 남자의 사랑을 낯설지만 유쾌하게 풀어낸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예측할 수 없는 전개 속에서도 감정을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음악의 힘을 빌렸다. 그는 음악감독 존 브리온에게 리듬으로 영화를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브리온은 즉흥 연주와 실험적인 녹음 기법을 활용해 사운드트랙을 구성했고, 앤더슨은 그 음악에 맞춰 장면을 촬영하거나 이미 완성된 장면을 다시 편집했다. 공장 소음, 하모니카, 타자기 타건음 같은 일상의 소리는 리듬으로 변주되어 주인공 배리 이건의 내면을 드러낸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셸리 듀발의 ‘He Needs Me’가 울려 퍼지는 순간이다. 브리온은 원곡에 오케스트라 편곡을 더해 사랑이 찾아온 순간의 미세한 떨림까지 묘사하고자 했다.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전자음의 충돌이 완성하는 음악은 불협과 조화 사이에서 흔들리며, 사랑에 빠진 배리의 마음을 순수하게 들려준다.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욕망의 땅, 침묵의 울림
Jonny Greenwood, Prospector’s Quartet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가 폴 토마스 앤더슨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영화는 약 15분 동안 대사 한마디 없이 이어지고, 오로지 불안정한 현악 연주로 땅속 깊은 곳에 들끓는 욕망을 암시한다. 이후 석유가 솟구치는 순간 음악은 폭발하듯 고조된다. 관객은 인간의 탐욕을 소리를 통해 체감하며 압도된다. ‘Henry Plainview’는 주인공 다니엘 플레인뷰의 광기를 날카로운 현의 떨림으로 그려내고, 반대로 ‘Prospectors Quartet’은 무거운 저음으로 광활한 대지의 적막을 채운다. 그린우드의 사운드트랙은 날 선 음정 대비와 공허한 정적을 교차시키며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의 잔혹함을 끝내 귀에 각인시킨다.
팬텀 스레드(2017)
완벽을 파괴하는 사랑의 교향곡
Jonny Greenwood, House of Woodcock
<팬텀 스레드>는 1950년대 런던을 배경으로 완벽을 좇는 디자이너 레이놀즈 우드콕과 그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알마 엘슨의 이야기를 그린다. 아름다운 의상의 향연만큼이나 돋보이는 것은 고풍스러운 사운드트랙이다. 조니 그린우드가 폴 토마스 앤더슨과 네 번째로 협업한 이 작품에서 그는 재즈와 클래식, 실내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물의 심리를 정교하게 구현한다.
60인조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메인 테마 곡 ‘House of Woodcock’. 레이놀즈의 강박적인 완벽주의에 기품을 더하던 이 음악이 귀에 익어갈 즈음, 레이놀즈와 알마의 관계에는 ‘독버섯’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는다. 힘의 축이 뒤집히는 그 장면에서, 이 곡은 변주되어 흐른다. 낯설어진 선율과 함께 드러나는 것은 완벽이라는 베일에 숨겨져 있던 레이놀즈의 결핍이다. 그린우드는 지배와 항복, 의존과 집착을 오가는 모순적인 사랑을 가장 우아한 방식으로 기록해낸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아메리칸 걸
Tom Petty and The Heartbreakers, American Girl
Well, she was an American girl / Raised on promises.
폴 토마스 앤더슨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미국 사회에 뿌리내린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세대마다 달라진 사회적 이상과 혁명에 대한 믿음을 비춘다. 조니 그린우드는 런던 컨템포러리 오케스트라와 함께 전작보다 더 실험적인 사운드를 선보인다. 격렬한 현악과 불규칙한 타악 리듬은 인물들의 혼란과 시대적 긴장을 반영하고, 음악은 장면마다 변주되며 박진감을 더한다. 반복되는 저음의 드론 (한 음을 길게 끌어 지속시키는 사운드)과 현의 진동은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는 순간을 청각적으로 묘사한다. 스틸리 댄의 ‘Dirty Work’와 잭슨 파이브의 ‘Ready or Not Here I Come’의 밝은 멜로디는 인물들이 처한 현실과 대조되며, 영화의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돋보이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퍼피디아의 딸 윌라는 톰 페티 & 더 하트브레이커스의 ‘American Girl’을 들으며 집을 나선다. 혈연보다 신념으로 이어진 관계와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약속을 상징하는 가사는 윌라의 삶과 닮아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그렇게 ‘아메리칸 걸’의 또 다른 시작을 응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