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내가 죽기 일주일 전> <금주를 부탁해> <광장>부터 영화 <고백의 역사>까지, 올해에만 네 편의 작품을 연달아 선보였어요. 무척 밀도 높은 한 해를 보내고 있는 듯해요. 재작년부터 준비해온 작품들이 차례로 공개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한 해를 가득 채워보내는 중이에요. 배우로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마음가짐 하나로 쉼 없이 달려온 것 같아요. 작품이나 인물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하나씩 살펴보는 재미가 무척 크더라고요.
최근 공개된 <고백의 역사>는 공개 이후 3일 만에 넷플릭스 글로벌 영화 부문 3위에 오르며 큰 사랑을 받았죠. 첫 시사 때 눈물을 보일 만큼 애정이 깊은 작품인 듯한데, 이야기가 지닌 어떤 점에 매료됐나요? 정말 애정하는 작품이에요. 처음 대본을 읽을 때부터 인물과 이야기 모두 너무나 풋풋하고 사랑스럽게 다가왔고, 그때 느낀 감정을 ‘윤석’이라는 인물을 통해 작품 안에서 몸소 표현할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저만큼이나 이 작품을 사랑해주는 분이 많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해요.
청춘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한없이 맑고 명랑한 극 중 다른 캐릭터들과 달리 윤석은 밝은 표정 이면에 그늘을 품고 있는 인물이죠. 남궁선 감독은 “공명 배우 안에 해맑음과 시니컬함이 동시에 존재한다”며 배우가 지닌 묵직한 존재감이 작품에 꼭 필요했다고 말했어요. 감독님이 어쩌면 저조차도 모르고 있던 제 모습을 봐주신 것 같기도 해요. 그 말씀을 듣고 제가 가진 상반된 면이 윤석이라는 캐릭터에 적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마냥 밝기만 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시니컬함이 묻어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윤석의 복합적인 내면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가장 오래 붙잡은 감정은 무엇이었나요?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윤석을 지탱하는 가장 큰 감정은 외로움이겠구나 싶었어요. 작품 안에서 윤석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전학을 가게 된 이유나 속사정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지만,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중심에 두고 제 나름대로 윤석이 서울에서는 어떻게 지냈을지, 가족에게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라는 사람은 윤석에게 어떤 존재였을지 상상해보면서 인물의 전후 사정을 만들어갔어요. 그런 윤석이 ‘세리’(신은수)를 비롯해 친구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싶었죠.
공교롭게도 근래 참여한 작품 중 첫사랑을 모티프로 한 이야기가 많았죠. 한 인터뷰에서 첫사랑 같은 작품으로 데뷔작인 옴니버스영화 <어떤 시선>의 ‘얼음강’ 편을 꼽은 게 기억에 남아요. 카메라 앞에서 처음 연기에 도전한 순간이 지금의 배우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요? 초심을 잃지 말자고 다짐할 때마다 떠올리는 작품이에요. 생생하게 기억하는 첫 연기의 순간이기도 해요. 작은 독립영화였는데, 스태프들과 감독님, 선배 배우들과 다 함께 열정적으로 영화를 완성해간 모든 과정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이후에도 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그때 생각이 자주 나더라고요. 모든 게 처음이라 배울 게 많은 현장이었는데, 지금도 늘 그때의 마음가짐을 되새기려 해요.
한편 <광장>에서는 맑고 순수한 첫사랑의 이미지와 대척점에 놓인, 치기 어리고 비굴한 면이 공존하는 인물 ‘구준모’를 현실감 있게 그려냈습니다. 그간 보여준 적 없던 새로운 연기에 도전할 때 드는 쾌감이 있었을 듯해요. 맞아요. 지금껏 맡아온 배역들과 극명하게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있었어요. 원하는 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으려 하는 캐릭터라,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유형의 인물을 연기하는 쾌감도 컸죠. 제게 준모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말하자면 어린아이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인물처럼 느껴졌어요. 악에 받쳐 계속해서 일탈을 저지르는 치기 어린 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죠.
워낙 팬층이 두터운 웹툰을 원작으로 한 만큼 관객의 반응도 다양했을 것 같아요.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평이 있다면요? 감사하게도 긍정적인 반응이 많더라고요. 제가 연기한 준모를 보고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는 평을 남겨주신 게 가장 인상 깊었어요.(웃음) 그만큼 실감 나게 그려냈다는 의미니까요.
이전과 다른 색깔의 연기를 시도한 경험이 이후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면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을지도 궁금해요. 제 연기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인물과 제가 지닌 차이점을 끌어내 표현하는 방식을 배우는 기회였다고 생각하고요. 현장에서 모니터링을 하면서 제게서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이 많았거든요. ‘이렇게 연기하면 이런 표정이 나오는구나’ 하면서요. 장르적으로나 캐릭터적으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었지만, <광장>을 계기로 고민이 한층 깊어진 것 같아요. 다른 작품에서 준모처럼 극적인 캐릭터를 맡게 된다면 더욱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고요.
요즘엔 어떤 장르나 캐릭터에 관심을 두고 있나요?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광장>을 촬영하면서 액션 장르에 제대로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준모는 전투력이 전무한 캐릭터거든요.(웃음) 또 <고백의 역사>에서 풋풋한 청춘의 모습을 보여드렸다면, 이제는 성숙한 멜로 연기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지난 마리끌레르와의 인터뷰에서 맑고 순수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할이나 이미지에 대한 갈증은 없는지 묻는 질문에 주어진 역할에 집중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말하며 “한 우물을 깊게 팔수록 맑은 물이 나온다”라고 말한 답변이 인상적이에요.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에서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 같나요? 지금처럼 사소한 순간들을 동력으로 삼는 것 같아요. 화보를 찍을 땐 주어진 컨셉트 안에서 어떤 새로운 모습을 시도해볼지 고민하고, 인터뷰를 통해 지난 활동을 돌아보는 시간이 모두 배우로서 깊이를 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돼요. 그 과정에서 저를 지탱해주는 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에요. 저만의 속도대로 걷다 보면 점차 스펙트럼을 넓혀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결국에는 해낼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배우라는 일을 마라톤에 비유해온 게 떠오르네요. 긴 여정을 자신만의 속도로 이어가기 위해 끝까지 지켜내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마라톤에서 결국 중요한 건 결과만이 아니라 달리는 과정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인 것 같아요. 간혹 이렇게 쉴 틈 없이 작품에 매진하다 보면 버겁지 않으냐는 말을 듣는데, 돌이켜보면 연기할 기회가 계속 주어진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 커서 그저 즐기면서 달려온 것 같거든요. 시간이 흘러도 이 마음가짐은 한결같이 지켜내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