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희미해지고 고립감이 깊어지는 시대, 우리는 여전히 함께일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연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마음을 데운다.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4인이 ‘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책과 영화, 음악, 사진을 모았다.
우리의 겨울이 보다 따뜻하길 바라며.


하태민

하태민, <süü>

인물이 카메라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자유롭고 편안해 보이는 사진이 있다. 이런 사진을 마주할 때면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잠시 나란히 머무는 순간, 완전한 타인과의 거리가 한순간 좁혀지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사진가 하태민의 사진집 <süü>는 이런 순간을 몽골의 광활한 평원 위에서 펼쳐 보인다. 2022년 몽골 중부 타리앗 지역으로 향한 그는 여전히 유목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가족들을 만나 계절이 변하는 동안 마을의 흘러가는 일상을 프레임에 담았다. 주로 동물과 풍경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인물에게로 옮겨갔다. 낯설지 않은 존재 앞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하루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차가운 날씨에 잔뜩 부풀어 오른 볼,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느껴지는 듯한 솜털, 블루베리를 쥔 작은 손가락,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따뜻하게 감싸는 빛. 많은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않더라도 느슨한 실 같은 것이 사진가와 인물 사이를 내내 이어주고 있었을 것만 같다. 누군가와 연결되는 감각이 그리워질 때마다 다시 꺼내어 보고 싶은 장면들. 피처 에디터 안유진

타이피스트

양안다 <이것은 천재의 사랑>

지나온 삶 속에서 내 곁에 머물다 떠난 이들의 뒷모습을 생각하며 세운 철칙이 있다. ‘누구를 만나든 마음을 전부 주지 말 것.’ 그러다 우연히 마주한 양안다 시인의 신간 제목이 내게 물음표를 던졌다. 천재라면 과연 어떤 사랑을 할까? 책 머리에 수록된 시인의 말에서 싫어하는 것 중 하나로 ‘사랑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바보 천치’를 언급한 그는 곳곳에서 ‘불안’이란 단어를 자주 꺼낸다. 하지만 그 불안은 사랑의 ‘산물’이 아닌, 사랑하기 위한 ‘선택’임을 특유의 솔직한 언어로 귀띔한다. 불완전하고 영원하지 못할 관계일지라도, 서로에게 깊이 빠져 허우적대더라도 기꺼이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야 생겼다. 피처 에디터 김선희

열린책들

백가경·황유지 <관내 여행자-되기>

“도시에는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는 이야기들이 마치 지하철 노선처럼 깔려 있다.” 인천, 의정부, 안산, 이태원, 광주. 두 작가는 도시를 여행하며 그 안에 스며든 고통, 상흔, 비참, 분노 등을 살핀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자신들의 삶터와 일터, 고향을 통과하는 삶을 고백한다. 그건 마치 다 지난 일이 아니냐,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고 하는 이들에게 지금 우리는 과거의 상처들에서 단 한 발짝도 떨어져 있지 않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이토록 강인하고 분명한 연대를 전에 본 적이 있던가. “미약하게나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억하고, 기록하려” 하는, “함께 고민하고 배우며 계속 살아낼 것”이라 말하는 두 작가의 온기에 울컥하지 않을, 기꺼이 함께하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피처 수석 에디터 강예솔

문학동네

한강 <희랍어 시간>

과연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내 안의 답이 부정으로 굳어갈 때쯤,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만났다.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와 말을 잃은 한 여자. 이들은 잃어버린 언어를 되찾으려 애쓰기보다 다른 감각에 기대어 타인을 헤아린다. 캄캄한 눈으로 편지를 쓰고, 말을 대신해 상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본다. 두 사람은 희랍어를 가르치고, 배우며 마주한다. 안경을 놓친 남자가 어둠에 갇혀있을 때, 여자는 기척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침묵과 암흑 속에서도 서로를 느끼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잃어버린 것을 채워주기보다 그저 곁에 존재하는 것, 그것만으로 내가 지난날 삼켜온 슬픔이 당신에게 조용히 전해지고, 또 당신이 견뎌온 시간이 내게 와 닿을 때, 우리는 조금씩 외로움을 덜어가는 게 아닐까. 어떤 말과 잔상도 없이 서로를 위로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이 나눌 수 있는 진심의 힘을 믿게 한다. 피처 어시스턴트 에디터 오유빈

은행나무

《2025 김유정신인문학상 수상 작품집: 겨울 정원》 중 이주란 <겨울 정원>

이주란의 단편소설 <겨울 정원>은 언뜻 단순해 보이는 삶 아래에 깃든 복잡다단함,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는 헤아릴 수 없는 한 사람의 농밀한 슬픔을 우리에게 전한다. 예순 살 여성 ‘혜숙’의 삶은 매일 비슷하게 흘러간다. 간단한 도시락을 싸서 오전 7시쯤 집을 나서고, 청소 일을 마친 뒤에는 하루 중 가장 따뜻한 볕이 드는 시간에 집에 딸린 겨울 정원을 멍하니 바라본다. 어제와 오늘을 구분하기 어려운 하루들을 살아내는 듯해도, 그 고요를 비집고 들어오는 사건들은 있다. 때때로 예고 없이 닥치는 수치와 슬픔 앞에서도 혜숙은 크게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더는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이와 함께한 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텅 빈 겨울 정원을 가꾸는 마음으로 가만한 일상을 지켜내는 혜숙의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각자의 겨울을 견디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혼자가 된 뒤에도 함께한 시간이 여전히 한 사람을 지탱해줄 수 있음을, 이별 후에 남는 것이 언제나 고립만은 아님을 이 소설이 말해주는 듯하다. 피처 에디터 안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