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희미해지고 고립감이 깊어지는 시대, 우리는 여전히 함께일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연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마음을 데운다.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4인이 ‘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책과 영화, 음악, 사진을 모았다.
우리의 겨울이 보다 따뜻하길 바라며.


크루앙빈, <The Universe Smiles Upon You ii>

명확하지 않은, 규정되지 않은 것에 더 마음이 간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잘 정돈된 정석의 음악은 분명 멋지지만, 오래 간직하기엔 어쩐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다. 미국 텍사스의 작은 마을에서 만난 세 친구가 1970~1980년대 태국 음악에 심취해 결성한 밴드 크루앙빈(Khruangbin)의 첫 앨범 <The Universe Smiles Upon You>를 듣던 순간 직감했다. 이 음악은 아주 오래 내 곁에 머물게 될 것임을. 사이키델릭부터 디스코, 펑크, 블루스, 소울 등 온갖 장르를 결합한 것 같기도, 해체한 것 같기도 한 음악은 모호하고 불분명해서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태국어로 ‘하늘을 나는 엔진’, 즉 ‘비행기’를 뜻하는 이름에 걸맞게 미국, 태국, 터키, 스페인, 에티오피아 등 세계 곳곳의 리듬과 사운드를 앨범 안으로 불러들인 이들의 음악은 월드 뮤직을 넘어 (베이스 로라 리의 표현에 따르면) ‘어스 뮤직(Earth Music)’에 가깝다. 그 때문일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 역시 자연스레 이 음악에 동화될 수 있었다. 장르고, 국적이고, 언어고 다 떠나서 크루앙빈의 앨범은 내게 친구고, 연인이고, 때론 나 자신이었다. 얼마 전 그들이 처음 음악을 시작한 텍사스의 작은 창고에 다시 모여, 데뷔 곡을 재녹음해 리메이크 앨범 <The Universe Smiles Upon You ii>를 만들었다. 10년 전처럼 여전히 모호하고, 역시나 아름답다. 피처 수석 에디터 강예솔

샘 옥 <lovely glow>

언제 어디에서 듣더라도 특정한 계절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한국계 미국인 싱어송라이터 샘 옥(Sam Ock)의 음악에 귀 기울이면, 흰 눈이 포근한 이불처럼 소복소복 내려앉은 겨울 풍경 속에 있는 것만 같다. 그 덕분인지 유난히 겨울에 선보인 곡이 많지만, 지난해 이맘때쯤 공개한 EP <lovely glow>는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에서도 겨울 특유의 따뜻한 감성이 물씬 담긴 앨범이다.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 드럼 등 간결한 구성의 악기 사운드가 빈티지한 톤으로 어우러진 트랙 위에서 샘 옥은 담백한 목소리로 말하듯이 노래한다. 너는 겨울의 달과 크리스마스트리의 별보다 빛나고(‘lovely glow’), 네 사랑이 겨울의 원더랜드라고(‘my present’).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만이 전부라 해도, 나의 집은 결국 당신이라고(‘you are my home’). 마치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쓴 일기처럼 진솔한 그의 노랫말은 이 계절의 추위를 서로의 온기로 녹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한다. 사랑하는 존재들에게 애정을 듬뿍 쏟을 용기를 심어주는 음악이다. 피처 에디터 김선희

키스 자렛 <The Köln Concert> 중 ‘The Köln, January 24, 1975, Pt. II A (Live)’

지난여름,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막연히 걷던 중 허름한 문을 발견했다. 비좁은 통로를 지나 들어가보니 그곳은 오래된 음악 감상실이었다. 작은 공간을 대형 스피커가 메우고 있었고, 벽면에는 CD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두 명의 손님이 나간 후 혼자 남았을 때, ‘The Köln, January 24, 1975, Pt. II A (Live)’가 흘러나왔다. 경쾌한 멜로디의 도입부를 지나자 거친 숨소리가 뒤섞인 격정적인 연주가 이어졌다. 황홀한 음악 앞에서 내가 안고 있던 고민이 아주 사소하게 느껴졌다. 그 충만한 경험은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키스 자렛의 1975년 쾰른 콘서트 라이브 앨범은 현재까지 재즈 솔로 앨범의 신기록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 공연이 시작을 앞두고 취소될 뻔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그는 당시 극심한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준비된 피아노마저 음정이 심하게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밤, 자렛은 오로지 공연 기획자인 열일곱 살 소녀를 위해 무대에 올랐다고 회상한다. 고통 섞인 신음과 무거운 페달을 누르는 거친 호흡, 몸을 비틀어가며 두드리는 건반 소리까지 음악의 일부가 되어 보다 완벽한 즉흥연주로 울려 퍼진다. 이 곡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서로를 위한 마음이 모여 이룩한 기적 같은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 피처 어시스턴트 에디터 오유빈

김사월 <5202>

음악가의 1집은 앨범이 나오기까지 거쳐온 세월을 전부 응축한 결과라고 한다. 1집 <수잔>을 만들던 당시의 김사월은 꺼내 보이기 부끄러운 자신의 세부, 지나온 날들의 아름답고도 불안한 경험들을 ‘수잔’이라는 가상의 젊은 여자를 화자로 내세워 기록하기로 한다. 1번 트랙에서 사월이 수잔을 소개하고, 이어지는 트랙부터는 수잔이 본인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다. 매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이면 <수잔>을 꺼내 들으며 생각한다. 음악가가 용기 내어 자신의 가장 내밀하고 연약한 부분을 곡에 담을 때, 그 곡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얻어 더는 원작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고. 올해는 <수잔>이 세상에 나온 지 10년째 되는 해다. 그사이 수잔의 이야기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위로받았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올해 초 열린 공연 <제12회 김사월 쇼: 수잔>의 라이브 실황을 담은 앨범 <5202>는 열 살을 맞은 수잔에게 지금의 김사월이 건네는 뭉클한 인사다. 김오키의 색소폰, 지박의 첼로, 이기현의 플루트 등 <수잔>을 함께 만든 익숙한 이름들, 그리고 김사월밴드가 모여 원곡에 가까운 사운드를 다시 재현했다. 듣는 이들에 의해 새롭게 쓰여왔고, 또다시 쓰여나갈 수잔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가올 4월을 기다린다. 피처 에디터 안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