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새해의 출발선에 선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이곳을 묻는다.

우리는 속도와 요약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손가락 끝으로 넘겨지는 수많은 해답 속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빠른 즉답이 아니라 오래 붙잡고 천천히 마주해야 할 질문일지도 모른다. 마리끌레르 피처팀은 새해를 열며 정보를 얻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드러나는 장치로서 ‘질문’에 주목했다. 인공지능(AI), 환경, 계층, 돌봄, 기술, 도시, 주거, 노동. 오늘의 삶을 규정하는 뜨거운 화두들을 하나의 리스트로 정리하고, 각 영역에 정통한 필자에게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졌다. 기술은 어디까지 인간의 결정을 대신할 수 있는가. 돌봄은 왜 여전히 사적인 희생으로 남아 있는가. 안정적 주거는 언제부터 권리가 아닌 운이 되었는가. 노동은 왜 존엄을 보장하지 못하는가. 특정 분야에 한정한 파편화된 문제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얽힌 동시대의 구조를 드러내는 질문과 답을 엮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세계를 사유해온 필자 8인의 답변을 통해 우리의 사고가 확장되고, 보다 깊어지길 바란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좌표로서 말이다. 질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주거 문제는
개인의 몫인가?

지수
주거권 활동가, <민달팽이 분투기> 저자

자신의 존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합리적으로 선택한 것들이
결과적으로 누군가의 주거권을 빼앗는 구조에 수많은 이들이 휘말린다.
이렇게 모두가 각자의 주거권을 위해
적자생존을 하는 방식으로는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가 만난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그저 집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있죠, 구옥은 완전히 네모나지 않은 거 아세요? 그런데 이 집은 네모반듯했어요.” “현관을 열고 들어서는데 거실 창문에서 햇볕이 한가득 쏟아지는 거예요. 이런 집에 살아보고 싶었거든요.” “반려동물이랑 같이 살아도 되는 집이 근방에 거의 여기뿐이었어요.” “이 동네 월세가 1백만원이나 해요. 좀 저렴한 곳을 찾으면 너무 허름해요.” “곰팡이 냄새 안 나고 쾌적한데, 대출이자가 월세보다 쌌어요.” “집 보러 다니면서 엄마가 많이 실망하셨어요. 이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들이 전부 열악해서요.” 전세사기 피해자가 되기 이전에, 세입자로서 살아갈 거처를 구하던 이들이 바란 건 사실 단 하나, 살 만한 집에 대한 권리, 즉 주거권이다.

주거권이란 모든 사람이 집 문제로 인해 ‘존엄’을 훼손당하지 않도록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가리킨다. 1948년 UN 세계인권선언에서 천명한 ‘모든 사람이 적정 주거(Adequate Housing)를 누릴 권리’에 뿌리를 두며, 적정 주거의 7요소(1991년)를 통해 모든 국가가 주거 정책의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 기준을 제시한다.

그러나 주거 관련 법과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모두의 주거권 보장이 담보되지 않는다. 2025년 현재, 주거 빈곤층이 늘어나는 가운데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자산 불평등의 격차는 점차 심화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여전히 적절한 주거 환경과 부담 가능한 주거비를 보장하는 공공 임대는 턱없이 부족하고, 민간 임대에 대한 공적 통제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이런 조건에서 세입자들은 집을 구하는 순간부터 이사를 나가는 전 과정에 걸쳐 복불복 게임을 하며 살아간다. 볕 드는 창이 좋아서 들어간 집에서 전세사기를 당할 수도 있고, 멀쩡히 잘 살다가 나갈 수도 있다. 돈 문 제는 없지만 고장 난 보일러를 고쳐주지 않을 수도 있고, 곰팡이가 퍼져 질병을 앓을 수도 있고, 사생활 침해를 겪을 수도 있다. 이 복불복 게임의 결과는 오롯이 세입자의 몫이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특정 개인의 잘못이나 불운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주 택 임대차 제도가 품은 부정의의 결과로서 전세사기를 맞닥뜨렸다.

사회 구성원의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 삶을 위한 갭투기가 누군가에게 전세사기로 이어지고, 영끌한 빚을 갚기 위해 집값 상승을 바라는 마음은 가난한 도시 생활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임대료의 근거가 된다. 자신의 존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합리적으로 선택한 것들이 결과적으로 누군가의 주거권을 빼앗는 구조에 수많은 이들이 휘말린다. 이렇게 모두가 각자의 주거권을 위해 적자생존을 하는 방식으로는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각자의 분투를 넘어 모두의 주거권을 보장하는 방법은 실효성 있는 제도 개선을 통해 구현할 수 있다. 모두가 안전한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주택 임대차 제도를 전면 개편하여 전세사기를 완전히 근절해야 한다.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주택을 공공이 매입하는 제도를 활성화해 주거권을 위협하는 집에 사는 이들에게 더 나은 삶의 조건으로서 공공 임대를 보장해야 한다. 자산 기반 복지 체제가 아니라 집은 집으로, 복지는 복지로 보장받을 수 있도록 사회보장 체제를 전환해야 한다. 이 모든 제도 개선 방안은, 모두가 주거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인정이 함께해야만 생명력을 가진다. 살 집을 구하면서 전세사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집값은 자꾸 오르는데 주거 빈곤층은 늘어난다는 소식에 미래의 내가 위치할 곳이 어디가 될지 두려워해야 하는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작.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집은 인권’이라는 인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