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삶을 놓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안에서 배우 유해진과 박지훈이 발견한 삶의 의지.


박지훈 니트 스웨터와 타이 모두 YCH, 레이어드한 셔츠 Sacai, 팬츠 Recto.


안에 입은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늘 촬영을 하며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촬영 현장 분위기가 가늠이 되었어요. 굉장히 다정하고 유쾌한 분위기였다고 들었는데, 오늘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유해진 현장 분위기는 감독을 제일 많이 따라가는 것 같아요. 장항준 감독이 원체 유쾌하고 열려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디테일을 잘 잡아내고. 커피 차도 매일 오고.(웃음) 아주 좋았어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선왕(단종)이 유배지에서 만난 촌장(엄흥도),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며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실은 제가 간단한 줄거리와 예고편 이상의 힌트를 얻으려고 며칠 전에 감독님과 통화를 했어요.
유해진 어떤 얘기를 하던가요?
일단 시나리오 단계부터 ‘엄흥도’ 역에 유해진 배우를 상정하고 썼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알려주셨어요.
유해진 그런데 어떤 작품이든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실은 누구한테 줬었는데 빠꾸 맞아서 에이 안 되겠다. 유해진한테라도 한번 줘봐야겠다 했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그렇죠? (동석한 프로듀서가 다급하고도 분명하게 “진짜입니다. 처음부터 초지일관이었어요” 한다.) 아유, 농담이에요.(웃음)
유해진 배우 역시 시나리오를 전했을 때, 다른 여지 없이 단번에 좋다며 합류를 결정했다고 들었어요. 이 영화의 어떤 부분에 확신을 갖게 되었나요?
유해진 일단은 감독님하고 아주 오래됐어요. <라이터를 켜라>를 같이 하면서 충무로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예요. 그런 친구로서 갖는 애정도 있고, 거기에 시나리오가 되게 재미있었어요. <왕의 남자>(2005년에 개봉한 유해진 배우의 출연작)만큼 쉽게 읽히면서도 힘 있는 스토리가 좋았어요.
이와 반대로 박지훈 배우는 확신을 가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는 얘기를 해주셨어요.
박지훈 맞아요. 고민을 아주 많이 했어요. ‘이홍위’라는 어린 선왕의 아픔을 배우로서 제가 표현할 수 있을까? 해진 선배님 만큼의 에너지를 드릴 수 있을까? 아직 제 연기에 확신보다 의심이 더 많은 시기라 그런지 주저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세 번째인가, 네 번째 미팅 때 감독님이 “이홍위 역은 너여야만 해”라며 단호하게 말해주셨는데, 그 말에 자신감이 확 생겨서 “저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기억이 나요.
시나리오에서 어떤 부분이 가장 먼저 보였나요?
유해진 아이고, 안됐다.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 우리는 단종으로 알고 있는, 이홍위라는 어린 왕의 삶에 먼저 마음이 가더군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를 바라보는, 제가 맡은 엄흥도라는 인물이 보였고요. 단종은 물론이고, 엄흥도도 실제 인물이거든요. 두 사람에 관한 팩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감동과 재미를 더하게끔 픽션이 잘 어우러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박지훈 대본을 읽을 때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것 같아요. (유해진) 선배님 말씀에 동감하는 게 이홍위가 유배를 온 나이가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3학년쯤 되거든요.
유해진 와, 그러니까 낯선 곳에서 그 아이가 얼마나 애달팠겠어.
박지훈 어머니,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그 피폐한 삶이 너무 안쓰러웠어요. 제가 연기를 하면서도 이 아이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감정이 들더라고요.


갑자기 든 생각인데요. 박지훈 배우가 그간 맡은 인물은 대부분 마음 한 편에 외로움, 애잔함을 품고 있는 듯해요.
박지훈 항상 혼자 있고, 어딘가 공허하죠.(웃음)
유해진 그런 면에서는 실제 너라는 사람하고 좀 비슷한 부분이 있지 않니? 너도 복작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편이잖아.
박지훈 맞습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거기서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외로움이 캐릭터에 묻어날 수도 있겠다 싶어요.
어린 나이에 왕위에서 쫓겨난 왕, 그리고 유배지 광천골의 촌장. 완전히 다른 삶을 지나온 두 사람이 만나 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드는 순간들이 이야기의 주축을 이룰 것 같아요.
박지훈 가족도 왕위도 잃고 유배지에 당도한 이홍위는 아무도 못 믿는 상태였을 거예요. 고립을 자청하면서요. 그러다 어쩔 수 없이 촌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 갈등이든, 좋은 일이든 계속 부대끼며 잊고 있던 혹은 몰랐던 감정들을 열어보게 돼요. 그 과정에서 삶의 의지를 찾게 되고요.
유해진 허물이 하나둘 없어지고, 서로에게 의지하는 순간들이 생기는 거죠.
박지훈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촌장님을 아버지 같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캐릭터 밖으로 나와서도 유해진 배우에게 의지하는 순간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박지훈 네, 아주 많이요. 항상 해진 선배님께 의지한 것 같아요. 촬영장에 갈 때도 같이 걸어가고, 밥도 같이 먹고, 계속 선배님을 향해 살짝 몸이 기울어 있었어요.
유해진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아까 (지훈이가) 선배랑 하니 에너지를 잘 받고 전해야 하는데, 그런 고민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초반부터 스스로 너무 잘 해결해 왔고, 이후에는 서로 주고받은 거죠. 뭐,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니까. 아주 조금, 조오금이잖아.
박지훈 그렇죠. 한 네다섯 살.(웃음)
유해진 그러니까.(웃음) 그렇게 조금 차이 나도 어려워할 수 있는데, 같이 걸으며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벽이 허물어진 듯해요. 이홍위가 마을 사람 들에게 융화되듯 지훈이와 저 사이에도 그런 과정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지훈이가 의도적으로 친해지려고 막 다가서는 타입은 아니에요. 어려워하면서 계속 물러서 있지도 않았고요. 스멀스멀, 정말 그렇게 가까워졌어요.
그렇게 오늘의 정겨운 사이에 이른 거로군요. 다정하게 눈을 맞추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습니다.(웃음)
박지훈 처음엔 진짜 눈을 맞추기도 어려 웠는데, 이제는 형 같습니다, 하하.
유해진 에이, 눈 똑바로 뜨고 째려보던데.(웃음)
박지훈 아니, 제가 언제요.(웃음) 선배님 저희가 언제 처음 만났죠?
유해진 그 술집에서 만났었지. 이 친구의 첫인상이 어땠냐면요. <약한영웅> 시리즈 끝나고 휴식 기간이라 그동안 참았던 거 막 먹고 그러던 시기였대요. 그 때문인지 생각보다 통통하더라고요. 단종은 되게 야위어야 하는데, 촬영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쩌나 싶었어요. 그러고 현장에서 만났는데, 와 15kg을 빼서 온 거예요. 바싹 마른 얼굴로 모든 의지를 잃어버린 단종을 연기하는데,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가 무척 좋았어요. 얘 의지가 상당하구나 싶어 깜짝 놀랐어요.
박지훈 첫 만남이나 첫 촬영 날은 사실 너무 긴장해서 기억이 거의 나지 않고요.(웃음) 그런데 그때도 선배님이 영 멀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게 아닌가 싶어요.






박지훈 체크 재킷과 팬츠 모두 Dolce & Gabbana, 레드 베스트와 카디건 모두 Barrie, 워커 Camper, 선글라스 Gentle Monster.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일상과 동떨어진 낯선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연기가 삶 자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면에서 지속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해요. 정말로요.
유해진
대화를 하면서 저도 두 분이 가진 에너지가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유해진 작품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 “우리 작품은 나오는 사람들의 결이 좀 비슷한 것 같아”라는 얘기를 하잖아요. 글쎄, 깊이 들어가면 어떨지 잘 모르지만, 제가 아는 선에서 지훈이와 저는 결이 그렇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아요.
차분히, 깊이 생각하고 표현한다는 점에서요.
유해진 지훈이가 그래요. 그러니까 그 순간을 넘어가려고 허튼 멘트를 하진 않더라고. 그런 면에서는 장항준 감독하고 되게 달라요.(웃음)
그럼 감독님과 배우의 케미스트리는 어땠나요? 준비 과정에서 감독님과 두 분이 신 하나, 대사 하나 세세하게 논의하면서 만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유해진 끊임없이 매일 얘기했죠.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가려고 계속 수정을 해나가는 과정이었어요.
박지훈 저도 어느 때보다 얘기를 많이 한 현장이에요. 감독님과는 초반부터 되게 잘 맞은 것 같아요. 제가 “이렇게 해볼까요?” 하면 늘 “그렇게 해. 너 편한 방식으로 가자” 해주셔서 생각한 것을 다 해볼 수 있었거든요. 해도 되나, 틀린 건가 이런 긴장감을 내려놓고 시도할 수 있었어요.
유해진 장항준 감독이 그런 데 되게 열려 있어요. 잘 받아주고. 또 글도 참 잘 쓰고. 이런 얘기는 널리 좀 알려달라고 그러던데.(웃음)
감독님과 통화하며 또 하나 인상 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두 배우의 연기를 보며 발견한 점에 대해 한 가지씩 얘기해주셨어요. 유쾌함과 진중함 사이의 미묘한 선을 기대보다 더 완벽하게 보여주는 유해진 배우의 내공에 다시 한번 감탄하셨다고요.
유해진 그러니까 그 선이라는 게 참 지키기 힘든 것 같아요. 저는 어찌 됐든 억지스러운 데서 나오는 웃음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단지 유쾌함만 좇는다면 웃음은 줄 수 있을지언정 전체 그림이 망가질 수 있어요. 게다가 이 영화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좀 무거워지는, 어쩔 수 없이 단종의 비극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쾌함이 필요했어요. 어떻게 어디까지 해야 하나, 그 선을 지키는 게 어려웠는데, 감독이 나의 고난을 알고 있었구나.(웃음)
한편 박지훈 배우는 감정 신은 물론이고, 특히 몸을 쓰는 장면에서 놀랐다고 하셨어요.
박지훈 아마 활 쏘는 신일 거예요. 국궁을 가르쳐주신 선생님도 춤을 춘 사람이라 확실히 몸을 잘 쓴다고 하시더라고요.
유해진 아, 춤을 춰서 그렇구나. 나는 그때 실력이 다 사라졌어. 나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박지훈 와, 저희 춤 연습 엄청 했는데, 그거 다 잊어버리셨구나. 그런데 하면 또 금방 잘하실 것 같아요.
유해진 다음에 댄스 배틀 한번 하자.
박지훈 알겠습니다.(웃음)
곧 영화와 관객이 만날 시간이 다가옵니다. 관객이 이 영화 안에서 어떤 감정을 마주하길 바라나요?
유해진 어떻게 보실까요?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네요. 지금 극장 상황이 워낙 좋지 않으니까, 걱정이 조금 더 되네요.
박지훈 저는… 왜 갑자기 숙연해지는 느낌이 들죠?(웃음)
유해진 울지 마, 울면 안 돼.
박지훈 넵!(웃음) 요즘 뭐든 빠르게 지나가잖아요. 그래서 지금 어떤 감정인지, 어떤 생각이 드는지 돌아볼 시간도 더 줄어든 것 같은데요. 영화 보면서 잊고 있던 감정이나 지나친 생각을 다시 꺼내볼 수 있으면 되게 좋을 것 같아요. 결국은 비극이지만, 사람 사는 얘기를 통해 그럼에도 살아보자 하며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고요.
두 분은 어떤 동력으로 배우의 삶을 지속해나가고 있나요?
유해진 제작되는 작품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계속 영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인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일상과 동떨어진 낯선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연기가 삶 자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면에서 지속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해요. 정말로요.
박지훈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계속 해나가야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데, 시도할 수 있는 환경 안에 있다는 점에서 감사한 삶이지 않나 싶어요.
그럼 배우의 삶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가장 소중한 건 무엇인가요?
박지훈 <왕과 사는 남자>를 강원도 영월에서 찍었는데, 선배님과 숙소에서 촬영장까지 강가를 따라 늘 같이 걸어갔어요. 연기 얘기도 하고, 사적인 얘기도 하면서요. 그리고 촬영장에 가면 또 감독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고요. 그 순간들이 무척 소중해요. 그래서 매일의 현장에서 제가 느낀 감정들, 받은 에너지를 잘 쌓아두어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가장 놓치고 싶지 않은 건 해진 선배님이고요.(웃음)
유해진 이야!(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