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단어로 배우 한지민이 새겨온 시간들, 얼굴들.



눈이 내리네요.
올해 처음 보는 눈이에요. 얼마 전에 눈이 내릴 땐 가족들이랑 여행을 가서 못 봤거든요. 너무 예쁘네요.
겨울을 온전히 가족들과 보낸다고 들었어요.
언니네 가족이 호주에 사는데, 지금 조카들이랑 다 같이 한국에 와 있어요. 조카들이랑 늘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주변에서 힘들지 않냐고 묻기도 하는데(웃음) 저는 오히려 가족들이랑 있을 때 에너지를 많이 받아요. 작품을 마치고 일상으로 가장 빠르게 돌아오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지난해 연말에 드라마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 촬영을 마쳤다고 들었어요.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은 어땠나요?
촬영을 지난 11월에 마무리하고 어느새 방영을 앞두고 있어서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해요. 갈수록 한 해의 시작과 끝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평소처럼 무던하게 이 시기를 지나게 되는 것 같아요. 너무 고단했던 해가 끝날 때는 ‘드디어 가는구나’ 싶다가도, 다음 해를 괜히 기대하게 되더라고요. 거창한 계획을 세워두고 막상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때 오는 실망감도 크고요. 그래서 요즘엔 작품을 하나 끝내고, 쉼을 갖고, 또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는 식으로 제 나름대로 시작과 끝을 구분하고 있어요.
작품 공개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죠.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어떤 인상을 받았나요?
웹툰이 원작인 작품이라 처음에는 만화적 요소가 많이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본을 읽다 보니 주인공의 나이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실제로 겪어봤을 법한 감정들이 담겨 있더라고요. 제가 연기한 ‘의영’은 사랑에 다음 단계가 있다면 결혼이라 믿는 인물이고, 결혼을 할 거라면 나에게 맞는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소개팅 을 적극적으로 계획해요. 연애도 파워 J처럼.(웃음)
연애와 사랑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죠. 의영은 사랑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 인물이라 이해했나요?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진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이 좋았어요. 자기 기준이 분명하고, 그 기준에 따라 상대를 한 명씩 제외해나가는 모습이 이기적이라기보다는 솔직하게 느껴졌고요. 극 중에서 의영이 단짝 친구에게 소개팅 상대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그 사람에 대한 느낌만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차를 타고 나왔어’ 하면서 좋아하거나, 엄마 가방을 뺏어서 소개팅 자리에 몰래 들고 나가기도 하거든요.(웃음) 이렇게 소소하면서도 귀여운 요소들이 이 이야기를 더 진짜처럼 느끼게 했어요.
‘사랑도 효율이 되는 시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선택하고 유지하는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작품에 임하며 사랑을 점점 효율의 언어로 설명하게 되는 현실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나요?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효율이라는 게 결국 자신을 더 잘 알아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 같아요. 만남을 이어가면서 쌓인 경험치를 토대로 어떤 부분은 나에게 굉장히 힘들고 어떤 건 포기할 수 없는지 하나씩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다음 만남에서는 상대가 내게 적합한 사람인지 더 효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요. 예전 같으면 이런 인물을 보면서 왜 사람을 머리로 미리 계산하고 만날까 싶었을 텐데, 생각해보면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계속해서 업데이트하고, 그 기준으로 상대를 분류하는 걸 마냥 나쁘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나를 위해 하는 일이니까요.
문득 로맨틱 코미디 장르 안에서 여성 인물이 사랑을 대하는 방식이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지민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다 보면 그 변화가 한눈에 읽히고요.
예전에는 로맨틱 코미디 작품 현장에 가면 “이게 말이 돼?” 싶은 설정이 하나씩은 꼭 있었어요. 관계를 주도하는 건 언제나 남성 캐릭터였고, 작품 안에서 여성 캐릭터가 그려 지는 방식도 한정적이었죠. 그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회가, 시대가 많이 변했잖아요. 그사이 여성 캐릭터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는 작품도 훨씬 다양해졌고요. 변화의 흐름에 맞춰 저 역시 제가 기다려온 인물들을 조금씩 만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런 변화를 피부로 느끼게 한 작품이 있다면요?
기점이 된 인물이 <봄밤>의 ‘정인’인 것 같은데, 그때가 주체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작품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던 시기였거든요. 새로운 인물에 대한 갈증은 이전부터 제 안에 있었지만, 막상 연기하려니까 당시에는 좀 이질감이 들더라고요. 자기 감정을 끝까지 표출하고, 할 말 다 하고, 밤중에 찾아가서 큰 소리로 따지고.(웃음) 그런 연기를 그 전에는 해본 적이 없어서 어색했던 거죠.




여러 작품과 캐릭터를 경험할수록 느끼는 건 온전히 내가 원하는 것만을 성취하는 게
사랑은 아니라는 거예요. 제가 받고 싶은 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것들을 먼저 내어주어야 하는 게 사랑인 것 같아요.
그 어색함을 어떻게 넘어서려 했어요?
어느 순간, 머리를 한 대 탁 맞은 것처럼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정인이는 내가 아닌데 왜 자꾸 극 중 인물을 나에게 대입해서 바꾸려고 하지? 그때부터 정인이를 제대로 들여다 보니까 사람 자체가 너무 멋있더라고요. 자기 사랑 앞에서 당당하고 용기 있고. 저라면 같은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제게 많은 걸 가르쳐준 캐릭터예요.
요즘 새롭게 만나고 싶은 인물이나 이야기가 있다면요?
최근 로맨스 장르의 작품을 연달아 만나다 보니 장르물에 대한 욕심이 좀 있었어요. 다만 요즘 제작 환경이 예전보다 훨씬 복잡하잖아요. 만들어지는 작품 자체가 많지 않고, 제작에 들어간 작품이라도 시놉시스는 물론이고 작가님, 감독님이 전부 정해진 상태에서 배우가 마지막 선택을 하면 되던 시기와는 많은 게 달라진 것 같아요. 개인적 취향만으로 작품을 고르기에는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은 거죠. 관객이 어떤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지도 시기마다 달라지고요. 제가 조금 무게감 있는 작품을 선택했을 때, 관객은 오히려 머리 아픈 이야기 대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코미디나 판타지를 원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요즘은 어떤 새로운 인물이나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지 딱 잘라 말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무엇을 중요하게 봐야 할지에 대한 기준이 제 안에서도 계속 달라지고 있어서.
오랜 시간 현장에 머무르며 유행이나 환경의 변화에 기대지 않고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나요?
결국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가 가진 힘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저 캐릭터가 나 같고, ‘우리 엄마가 살던 시절에는 저랬구나’ 하고 인물의 감정에 저절로 공감하게 되는 작품들이 있잖아요. 가볍게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가슴을 두드리고 여운을 오래 남기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가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작품으로 계속 돌아가게 되는 것 같고요.
돌아보면 한지민 배우가 선택한 이야기들에는 언제나 사람과 사랑이 중심에 있었던 것 같아요. 작품 안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대하는 인물을 연기한 시간이 사랑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놓기도 했나요?
여러 작품과 캐릭터를 경험할수록 느끼는 건 온전히 내가 원하는 것만을 성취하는 게 사랑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 대상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전부 마찬가지예요. 제가 받고 싶은 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것들을 먼저 내어주어야 하는 게 사랑인 것 같아요. 준 만큼 돌려받고 싶다는 욕심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혼자 하는 사랑이 아니라 양방향의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 같고요.
한데 그 욕심을 내려놓는 게 쉽지 않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언가를 내어주는 일은 더더욱 그렇고요.
맞아요. 내가 좋다고 해서 그 마음을 전부 쏟아내는 것도 정답은 아닌 것 같고요. 그래서 사랑이라는 게 끊임없이 조율해야 하는 일 같아요. 그 과정에서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소통일 테고요. 말하지 않으면 모르잖아요. 감정이 안으로만 계속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엔 풀 수 없을 만큼 꼬여버리고, 끝내는 그냥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엄마라는 존재를 떠올리면 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가장 편한 사이라는 이유로 괜히 못되게 굴곤 하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후회되는 게 너무 많아서 엄마에게 더 자주 표현하려고 항상 노력해요. 이해가 안 되더라도 먼저 말 한 마디 더 건네고, 미안한 일이 있으면 그때그때 바로 사과하려 하고.
듣다 보니 한지민이라는 사람을 지탱해온 사랑의 기반이 무엇인지도 묻고 싶어져요.
할머니였던 것 같아요. 늘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주시고, 어려서부터 주변 사람들을 돕고 베푸는 법을 몸소 가르쳐주셨어요. 겨울이 되면 언니랑 옛날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제가 외출할 때 골목 끝까지 나와 배웅해주시던 모습이 자주 떠올라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인사해주시던 모습이.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 거리가 점점 짧아졌거든요. 골목 끝, 대문 앞, 그다음엔 현관 앞, 그러다 나중에는 아예 나오지 못하셨고요. 그때 찍어둔 할머니 사진을 보면서 새삼 제가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구나 하고 느껴요.
온전히 받아본 경험 덕분에 사랑에 관해 조금 더 믿게 된 것이 있다면요?
이제는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지금 모습 그대로 바라봐주는 게 사랑이라고 믿게 된 것 같아요. 그 사람이 걸어온 시간이 있기에 지금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사랑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