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의 상흔을 한 가족의 이름과 기억으로 따라가는 정지영 감독 신작, <내 이름은>.

정지영 감독의 신작 <내 이름은>이 제7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비경쟁 포럼 부문에 공식 초청돼 지난 13일과 14일(현지시간) 관객과 처음 만났습니다. 영화는 오는 4월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요.
베를린 국제 영화제는 <내 이름은>을 “비극적 역사가 남긴 트라우마를 세대를 넘어 섬세하게 비추며 오랜 침묵을 깨는 작업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동시에 서로 다른 삶의 국면에 놓인 모자((母子)가 정체성과 기억을 마주하는 과정을 중심 서사로 짚었죠. 정지영 감독 역시 베를린 현지 인터뷰에서 4·3이 여전히 공식 명칭조차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채 ‘사건’으로만 불리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영화가 4·3의 진짜 이름을 함께 찾아가는 여정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베를린 영화제 비경쟁 ‘포럼(Forum)’ 부문은 독일의 비영리 영화 예술 기관인 아르세날 영화·비디오아트 연구소(Arsenal – Institute for Film and Video Art)가 별도로 큐레이션하는 섹션입니다.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성찰과 동시대 사회·예술적 담론을 밀도 있게 다루는 작품들을 소개하는 자리로, 전통적인 의미의 수상 경쟁보다는 형식과 주제의 실험성, 그리고 사회적 질문의 날카로움에 더욱 주목하는 것이 특징이죠.
<내 이름은>의 포럼 초청은 작품이 단순한 역사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의 기억이 오늘의 삶을 어떻게 흔들고 이어지는지를 정면으로 묻는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를 갖습니다.
4·3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제주 4·3의 상흔이 한 가족의 ‘이름’과 기억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놀림받는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 고등학생 영옥과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은 채 살아온 엄마 정순의 균열을 따라가며 개인의 상처가 세대를 넘어 반복되는 구조를 비추죠. 특정한 날씨와 강한 빛에 반응해 해리 증세와 발작을 겪는 정순의 모습은 모자가 마주한 현재의 균열이 결국 과거의 비극과 맞닿아 있음을 드러냅니다.
학교에서의 집단 폭력에 휘말린 영옥과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는 정순의 시간이 교차하면서 이야기는 마침내 1948년 4월 3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배우 염혜란이 정순 역을, 신우빈이 영옥 역을, 최준우가 민수 역을 맡아 서로 다른 세대가 짊어진 기억의 무게를 밀도 있게 풀어내죠.

프리미어 상영 직후 극장 안은 깊은 여운 속에 잠겼고 수많은 이름이 올라간 엔딩 크레딧이 끝나자 묵직한 박수가 이어졌습니다. 현지 상영은 매진을 기록했다는 소식도 전해졌죠. 정지영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지켜봐 주시고 박수를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하며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함께한 이들의 이름을 차례로 언급했습니다.
정 감독은 <부러진 화살>(2011), <블랙머니>(2019)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굵직한 사건들을 스크린으로 옮겨온 연출자입니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는 <내 이름은>이 그 연장선에서 국가 폭력이 남긴 흔적을 개인의 일상과 세대의 언어로 풀어낸 작품이라는 점에 주목했죠.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되짚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누가 그 일을 어떻게 불러왔고, 우리는 무엇에 끝내 이름 붙이지 못했는가’라는 물음을 한 가족의 삶을 통해 다시 끌어올리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기억의 이야기를 오는 4월 스크린에서 직접 마주해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