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환호가 잦아든 자리, 밀라노는 다시 패션의 성지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밀라노는 다시 패션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지난 2월 24일부터 2026 가을-겨울 밀란 패션 위크가 막을 올리며, 도시 전체를 트렌드의 열기로 물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총 52회의 런웨이 쇼와 89개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각 패션 하우스는 저마다의 아이덴티티를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올 하반기 패션의 방향을 가를 흐름은 무엇일까요? 빠르게 재편되는 패션계의 한가운데서, 밀라노가 내놓은 새로운 기준을 따라가 봅시다.
입는 즐거움과 보는 유희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옷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본질은 무엇을 입느냐보다 어떻게 입느냐에 있으니까요. 프라다는 이번 시즌 이 단순한 진실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줬습니다. 미우치아 프라다와 라프 시몬스는 15명의 모델을 네 차례씩 다시 무대에 올리며, 레이어를 한 겹씩 덜어내는 과정 자체를 쇼의 서사로 끌어올렸습니다. 의상을 하나씩 벗거나 다시 걸치는 흐름을 통해 하나의 아이템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다양한 뉘앙스를 만들어내는지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죠. 실용적인 가치와 런웨이 특유의 유희를 동시에 잡은 영리한 접근이었습니다.



디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쇼의 재미를 끌어올렸습니다. 글렌 마틴스는 쇼장에 5만 개의 아카이브 소품을 펼쳐 놓고 디젤의 과거와 파티의 기억이 뒤엉킨 거대한 무대를 만들었는데요. 컬렉션 역시 밤을 지새운 다음 날의 흐트러진 차림에서 출발해 구겨진 질감과 비틀린 실루엣을 강한 인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프라다가 반복과 레이어링으로 구조적인 재미를 만들었다면, 디젤은 공간과 분위기 자체로 시선을 사로잡은 셈입니다.
어깨가 곧 기세



1980년대를 상징한 파워 숄더 스타일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보테가 베네타는 쇼 오프닝 룩으로 큼지막한 어깨선의 블랙 코트를 내세워 다가오는 시즌의 실루엣을 예고했습니다. 넓은 어깨와 과장한 암홀라인을 강조한 룩이 이어지며 시선은 자연스럽게 상체로 향했는데요. 여기에 촉각을 자극하는 독특한 텍스처를 더해, 단순히 부피를 키우는 수준을 넘어 상체의 입체감을 한층 풍성하게 살렸습니다.


페라가모는 1920년대 해군풍 스타일에 드라마틱한 무드를 더해 비율을 과감하게 조정한 아우터와 니트를 선보였습니다. 어깨를 강조하고 커다란 이중 포켓을 더한 뒤, 정교한 테일러링까지 한데 엮어 단단한 상체 실루엣을 완성했죠. 돌체앤가바나 역시 넓은 어깨의 핀스트라이프 수트와 허리를 강하게 조인 테일러링을 앞세워 파워 숄더를 하우스 특유의 관능미와 연결했습니다.
관능의 재정의






한동안 패션계 중심에서 한발 비켜 있던 관능적인 무드가 밀라노 컬렉션을 통해 선명하게 돌아왔습니다. 가장 강한 신호는 뎀나의 첫 실물 런웨이로 시선을 모은 구찌에서 포착할 수 있습니다. 톰 포드가 수장이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관능을 다시 불러오면서도, 몸을 따라 흐르는 슬림한 실루엣, 반짝이는 텍스처, 아찔한 슬릿 디테일로 보다 직접적인 욕망의 언어를 꺼냈습니다. 단순한 노출에 기대기보다 구찌스러운 섹시함을 강조한 점이 인상적이었죠. 쇼의 피날레를 장식한 케이트 모스의 블랙 백리스 룩은 그 메시지를 압축한 한 장면이었습니다.
관능미를 논할 때 돌체앤가바나를 빼놓을 수 없죠. 돌체앤가바나는 아이덴티티를 전면에 내세우고 테일러드 수트와 블랙 레이스 드레스, 스틸레토 힐로 하우스 특유의 관능을 또렷하게 드러냈습니다. 블루마린은 플로럴 모티프를 앞세워 드라마틱한 페미닌 무드를 완성했죠. 밀라노 패션 위크에서 포착한 관능미는 단순한 노출에 머물지 않고 저마다의 특색을 살려 관능의 문법을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밀라노 느와르


이번 시즌, 밀라노 패션위크가 가장 집요하게 파고든 색채는 단연 ‘블랙’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펜디를 꼽을 수 있는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합류 후 첫선을 보인 이번 컬렉션의 오프닝 17벌을 모두 블랙으로 구성하며 하우스가 향할 새로운 방향을 단번에 각인시켰습니다.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고 선과 실루엣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블랙을 활용함으로써 절제미와 긴장감을 동시에 확보한 모습이죠.





로베르토 카발리는 컬렉션의 테마 자체를 ‘백 투 블랙’으로 잡았습니다. 화려한 프린트 대신 어두운 낭만과 고딕 글래머를 전면에 내세우며 블랙 자체를 컬렉션의 분위기이자 태도로 끌어올렸죠. 이 밖에 구찌, 보테가 베네타, 질 샌더 등 여러 패션 하우스에서 블랙을 주요 컬러 팔레트로 활용하며, 다가오는 가을 겨울에는 블랙이 베이식한 색을 넘어 실루엣과 감각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키 컬러로 작용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반가운 귀환






총 52개의 패션쇼로 채운 이번 밀라노 패션 위크에서는 반가운 이름도 있었습니다. 휠라는 2020년 S/S 이후 오랜만에 돌아와 밀라노와 브랜드의 기원을 잇는 스포츠웨어 중심의 쇼를 선보였고, ACT N°1는 2023년 S/S 이후 여섯 시즌 만에 다시 공식 캘린더에 이름을 올리며 클래식 테일러링을 비틀고 젠더리스한 감각을 더한 컬렉션으로 존재감을 환기했습니다. GCDS 역시 창립 10주년을 맞아 런웨이 쇼로 존재감을 다시 드러내며 유쾌한 팝 무드와 과장된 액세서리 감각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패션쇼의 열기를 끌어올린 프론트 로



런웨이에 등장한 새로운 룩만큼이나 쇼장을 찾은 셀러브리티를 향한 취재 열기 또한 뜨거웠습니다. 화제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K-팝 스타들이 자리했습니다. 프라다에는 앰버서더 카리나가 참석했고, 펜디에는 스트레이 키즈 방찬, 르세라핌 허윤진, (여자)아이들 우기가 함께하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첫 펜디 쇼를 감상했습니다. 디젤 쇼에는 에이티즈 윤호가 등장해 현장의 에너지를 한층 끌어올렸죠. 뜻밖의 인물들도 시선을 모았습니다. 메타의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와 아내 프리실라 챈이 프라다 프런트 로에 나란히 앉아, 패션위크 밖의 담론까지 이끌어냈습니다. 팝의 여왕 마돈나는 돌체앤가바나 쇼의 마지막 게스트로 모습을 드러내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증명했습니다. 밀라노 올림픽의 여운을 옮겨온 스포츠 스타들의 행보도 눈에 띄었습니다. 페라가모 쇼를 찾은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은메달리스트 클로이 김과 알파인 스키의 전설 알베르토 톰바는 올림픽 직후의 열기를 프런트 로로 고스란히 이었습니다. 이처럼 2026 F/W 시즌의 프런트 로는 패션, 팝, 스포츠 등 다양한 영역이 한데 어우러지며 또 하나의 거대한 무대로 경계를 넓혔습니다.
이제 2026 F/W 시즌의 마지막 장을 장식할 파리 패션 위크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3월 2일부터 10일까지 이어지는 파리의 무대 위에서 어떤 독창적인 룩과 트렌드가 다음 시즌의 방향을 그릴지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립니다. 뉴욕과 런던 그리고 밀란이 만든 흐름 속에서 파리가 어떤 결론을 더할지 주목할 차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