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한 창작자의 헤리티지라 부를 수 있을까.
어떤 기준이나 기대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가장 뜨거운 마음으로 완성한 첫 작품,
그 안에는 여전히 확장을 거듭하는 세계의 단단한 기반을 비추는 단서가 남아 있다.
영화, 음악, 문학의 영역에서 각자의 언어로 시대를 통과해온 창작자 21인이 자신의 처음과 연결된 물건과 기억을 건넸다.
한 시절을 온전히 바친 기록, 처음이기에 가능했던 선택이 그 안에 담겼다.
세상에 건넨 첫 선언, 그 선언과 함께 하나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하던 순간.
시인
백은선
시집 <가능세계>

<가능세계> 책을 내면 다시 읽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의 내 대답은 추측에 의한 것이다. 나는 <가능세계>를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언어적 실험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주 내밀한 이야기, 내 삶의 고통과 절망을 이미지로서 보여주고자 했다. 슬프고 강렬하며 사랑으로 가득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의 장면 <가능세계>의 마지막 시인 ‘도움의 돌’은 첫 시집에 대한 개인적 시론과도 같다. 당시 작업이 잘되지 않을 때면 걸어서 한강공원에 다녀오곤 했는데, 땅에 돌이 참 많았다. 불쑥 솟아 난 마침표처럼. 그 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돌은 어디에나 있는데, 왜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않을까?’ 세계의 비밀을 홀로 목격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런 일이 시인의 삶과 비슷한 게 아닐까. 이후 작업실로 돌아와 이 시를 썼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돌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안다.’
변하지 않은 것 내 시는 긴 편이다. 길이만 긴 시가 아니라, 길어야만 하는 필연성을 가진 시. 길이만큼 큰 것을 담지하는 시. 세상에 내놓아야 할 이유가 있는, 그만큼 새로운 시를 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내 시가 나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 자주 질문한다.
그때의 나에게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시를 쓸 때도 내 시를 자주 의심하곤 한다. 첫 시집이 나 오고 10년이 지난 지금, 과거의 내게 이 말을 전해 힘을 보태고 싶다. “너를 믿고, 네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 온 힘으로 달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