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한 창작자의 헤리티지라 부를 수 있을까.
어떤 기준이나 기대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가장 뜨거운 마음으로 완성한 첫 작품,
그 안에는 여전히 확장을 거듭하는 세계의 단단한 기반을 비추는 단서가 남아 있다.
영화, 음악, 문학의 영역에서 각자의 언어로 시대를 통과해온 창작자 21인이 자신의 처음과 연결된 물건과 기억을 건넸다.
한 시절을 온전히 바친 기록, 처음이기에 가능했던 선택이 그 안에 담겼다.
세상에 건넨 첫 선언, 그 선언과 함께 하나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하던 순간.

뮤지션

실리카겔

EP <새삼스레 들이켜본 무중력 사슴의 다섯가지 시각>

<새삼스레 들이켜본 무중력 사슴의 다섯가지 시각> 네 멤버 모두 풋풋한 대학생이던 시절, 한 미디어 퍼포먼스 무대를 위한 음악을 만든 것이 실리카겔의 시작이었다. 첫 EP는 그때 작업한 두 곡을 반으로 나누어 다시 편곡하고, 새롭게 녹음해 완성한 앨범이다. 사실 수록곡 중 ‘II (feat. 남상아)’와 ‘sister’, ‘intro’와 ‘hrm’은 원래 각각 하나의 곡이었다.

처음의 장면 앨범 패키지를 제작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실크스크린 인쇄기로 원단에 색을 입혀 당시 멤버들 중 일부가 함께 살던 보문동 원룸으로 가져와, 그 안에 손수 실리카겔을 채워 넣고 인두로 용접했다. 근처 패턴실에 개당 5백원에 재봉을 맡기는 등 전문가의 손길을 빌리기도 했지만, 완성된 패키지에 CD와 북클릿을 하나하나 채워 넣어 손수 판매하던 추억이 남아 있다.

첫 작품이 남긴 것 당시 친분이 있던 ‘해오(HEO)’라는 음악가의 자택 겸 작업실을 빌려 우리끼리 녹음했는데,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은 다른 작업실을 빌리고 악기를 옮겨가며 추가 녹음까지 진행했다. 커리어의 시작부터 이런 방식으로 작업해왔기 때문인지 지금도 우리는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음반을 만들고 있다. 실리카겔이 음악을 만드는 기준과 방식을 정리해준 출발점 같은 앨범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