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성들은 한 시대를 지나며 자신의 삶으로 하나의 좌표를 남깁니다.
<마리끌레르>는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 어른‘들을 만났습니다.
오랜 시간 자신을 단련하며 결국 하나의 세계가 된 여성들.
가수 한영애

정작 하는 사람은 그런 생각이 없어요.
내 모습과 닮아 있으니까 했을 뿐이에요.
중요한 건 늘 과정이었으니까요.
주변에서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말들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내가 모르는 게 많다 보니, 그런 이야기들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아요.


“뒤돌아볼 꺼 없어. 지나간 일들은 이미 지난 일. 저 멀리 봐. 저 멀리 앞을 봐”(‘코뿔소’, 1988) 블랙 오버사이즈 점퍼, 거칠게 층을 낸 셰기 컷, 화장기 없는 얼굴. 천둥처럼 거칠고 큰 음색으로 ‘앞을 보라’ 소리치는 이. 모두가 고운 음색을 좇던 시절, 한영애는 강한 사운드 위에 그보다 더 강한 탁성으로 내질렀다. 단정하고 예쁘고 고운 목소리 사이에서 그는 확실히 낯선 존재였다.
1970년대 초, 통기타 그룹 ‘해바라기’에서 출발한 그는 처음부터 안전한 선택과는 거리가 먼 아티스트였다. 스무 살에 포크 가수로 시작했지만, 그는 곧 장르라는 틀을 스스로 넘어섰다. R&B, 포크록, 트로트, 블루스 등 서로 다른 결의 장르를 가로지르며 어느 장르의 최초가 되기보다 그와 무관하게 고유한 존재가 되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 역시 나의 언어일 뿐이고, 그는 인터뷰 내내 이를 두고 “그저 나를 닮은 음악”이라고 표현했다.)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며 걸작으로 꼽히는 정규 2집 <바라본다> 이후의 행보 역시 예측하기 어려운 변주였다. 1999년 발표한 5집 <난다>에서는 포크와 블루스 정서에 테크노를 결합해 동시대의 사운드를 끌어안았고, 2003년 <BEHIND TIME: 1925-1955 a memory left at an alley>에서는 1920~1950년대 한국 가요를 리메이크하며 그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거슬렀다. 2014년 6집 <샤키포> 역시 R&B와 레게를 시도하여 자신의 스팩트럼을 한 번 더 확장했다. 하지만 정작 한영애는 이 모든 궤적 앞에서 말을 아꼈다. 자신의 시간을 ‘도전’이나 ‘실험’이라는 수식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기존의 질서를 거부했다는 해석에도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마치 질서라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않은 채 걸어온 사람처럼.
그런데 이 태도는 쉬운 것이었을까.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고, 흐름을 계산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기 감각만을 붙들고 간다는 것 말이다. 그것도 1980년대라는, 여성 가수에게 허용된 이미지와 목소리가 비교적 분명히 정해져 있던 시대에. 앞서가려 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방향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한 한 사람, 그 단순하고도 고집스러운 얼굴을 본다.


오는 4월, 신곡 <스노우 레인>이 발매됩니다. 부활의 김태원 씨가 작사·작곡을 맡았다고요.
마침 올해는 큰 콘서트 투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작년에도 권유를 받았지만 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올해는 특별한 타이틀이 있어서라기보다, 이제는 콘서트 투어를 해보자고 마음먹고 있었죠. 그러던 차에 태원 씨에게서 연락이 온 거예요. 아마 매니저나 대표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 콘서트 계획이 전해진 것 같아요. 한 10년쯤 전이었을 거예요. 태원 씨가 분장실에 인사하러 왔다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한영애에게 맞는) 곡을 꼭 써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어요. 나로서는 무척 고마운 말이었죠. 그렇게 헤어졌고, 그 일은 자연스럽게 잊혔어요. 완전히 잊고 있었죠. 그런데 이번에 콘서트 계획이 태원 씨 귀에 들어간 거예요. 그리고 그가 옛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죠. 무조건 곡을 쓰겠다며 몇 달에 걸쳐 작업했어요. 그 전에 우리가 한 번 만났어요. 처음에는 가사를 누가 쓸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쓸 수도 있다고 했는데 태원 씨가 가사까지 다 써서 가져왔어요. 고맙죠. 그 곡이 이번 콘서트 계획에 큰 기폭제가 됐어요.
마지막 가사 ‘모든 기억이 늘 고맙다’라는 문장이 참 좋더라고요.
그 마지막 가사에서 요즘 김태원 씨의 마음이 어떤지, 지금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 느껴졌어요. 우리가 나이 차이는 조금 있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왔잖아요. ‘요즘 마음이 이렇구나. 나도 그래’ 하는 공감이 있어요. 가수는, 적어도 나는 노랫말이 내 안으로 들어와야 비로소 노래할 수 있잖아요. 그 한 문장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어요. 태원 씨가 만드는 노랫말과 곡을 두고 많은 분이 슬프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그 슬픔이 탁한 슬픔이 아니라, 필터를 한 겹 거친 듯 맑고 아름다운 슬픔으로 느껴져요. 특히 ‘늘 고맙다’는 말은 특정한 나이에만 머물지 않을 것 같았어요. 각자의 삶에 맞게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 싶었죠. 멀리 떠난 연인에게도, 친구에게도,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도. 누구에게나 건넬 수 있는, 아름다운 여유가 담긴 말이잖아요. ‘모든 기억이 고마워. 후회할 일은 없어. 나는 아름다운 시간을 살아온 것 같아.’ 그렇게 마음에 남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올해 데뷔 50주년이지요. 특정 시기를 구분하고 기념하는 일을 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50년이라는 시간을 돌아보면 본인 안에 남아 있는 감정이나 생각은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예전에 어르신들이 “눈 깜빡할 사이야” 하시던 그 말이 실감 나요.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해요. 연극 집단에서 소속돼 한 7~8년 동안 음악을 하지 않은 시간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해온 음악의 시간에 비하면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부족하다는 마음 때문일까요. 새 음악과 새 무대, 새 세상에 대한 갈증을 여러 차례 이야기하셨는데, 그 갈증은 여전하신가요?
그럼요. 특히 늘 무대에 대한 갈증이 크죠. 무대는 또 다른 하나의 삶이니까요. 그곳에서는 일상에서 해보지 못한 것들, 미처 풀어내지 못한 정서들을 더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욕심이죠. 그러니 그 갈증은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도 계속되지 않을까요. 특히 콘서트 무대에 설 때면 그것이 무대든 음악이든, 혹은 ‘어나더 월드’든 늘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나를 구원해주는 건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 더 자유로워지고, 더 새로운 시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지금의 마음을 위로해봅니다.
일전에 무대 위의 기쁨에 대해 “내 몸이 솜털처럼 가벼워졌다”라고 표현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데 그럴 때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우리끼리 이야기할 때 ‘카펫 같은 데 올라탄다’고 표현하거든요. 그처럼 노래의 날개 위에 올라탄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때에 대해서 설명할 수는 없어요. 따져 묻는 순간 깨져버리니까요. 평생을 통틀어 두어 번, 많아야 네 번 정도였던 것 같아요. 내가 없어졌어. 노래하다가 내가 사라진 느낌. 위에서 아래에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순간도 있었고요. 물론 착각일 수도 있지만, 솜털처럼 가벼웠던 기억이 있어요. 예전 무대 영상을 보면 내가 옷을 자꾸 잡아 뜯는 장면이 있더라고요. 그때는 몰랐는데, 음악과 완전히 맞아 들어가거나, 어떤 다른 차원, 어나더 월드로 옮겨간 듯한 상태가 되면 옷이 너무 무거운 거야. 당시에는 몰랐어요. 무의식적으로 벗어 던지고 싶었던 거죠. 그런 감각은 자주 오는 건 아니에요. 아주 개인적인 경험이죠. 떨리는 건 여전하고요.
지금도요?
그럼요. 무대 올라가기 전에 떨지 않는 사람들 보면 오히려 이상해요. 좀 부럽기도 해요. 연습을 많이 안 해도 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연습을 왜 해?” 하며 웃는 선배들도 있었어요. 타고난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심하게 떨어요. 사시나무 떨듯. 무대 오르기 전에 맨날 ‘매니저야, 손 좀 줘봐’ 해요. 그렇게 무대에 올라 서너 소절 지나고 나면 깨끗해지는 거죠. 모든 걱정과 두려움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요. 저 멀리 우주에서 놀다가 착지를 잘해야 하는 거죠. 근데 나는 이렇게 말하면 너무 우아하고 멋있어 보일까 봐 이런 이야기를 잘 안 해요.

음악을 시작하실 당시는 허스키하고 거친 여성 보컬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던 시대였지요. 그런 목소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목소리를 바꾸지 않고 본인의 목소리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느끼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에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때는 여성 가수는 예뻐야 하고, 목소리는 고와야 하고, 의상은 어떤 스타일을 입어야 한다는 말들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제가 등장했을 때 대중도 그렇고, 특히 음악계에서 “낯설다”, “저게 뭐냐” 하는 이야기들이 오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늘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한 가수였던 것 같아요.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보다 제가 어떻게 노래하는지가 더 중요했으니까요.
헤어스타일과 의상도 당시로선 상당히 파격적이었어요. 예전 <가요톱10>이나 <젊음의 행진> 무대를 다시 보면서 적잖이 놀랐습니다. 요즘 어떤 젊은 뮤지션보다도 전위적이고 도전적인 헤어와 의상, 무대 퍼포먼스를 보여주시더라고요.
TV 출연은 다른 가수에 비해 많이 하지 않았지만 무대에서는 최선을 다했죠. 당시 연극 극단을 나와 솔로로 데뷔하면서 1집에 ‘건널 수 없는 강’이라는 곡을 수록했어요. 그 노래를 부르며 저는 호흡 소리도 음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부러 그 숨소리를 넣자고 했죠. 그런데 “호흡이 음악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이건 레코드인데 그렇게 숨소리를 넣으면 한두 번밖에 못 듣는다”는 말을 들었어요. 결국 녹음본에는 넣지 못했죠. 하지만 라이브는 달랐어요. 무대에서는 훨씬 자유롭고 신나잖아요. 소리를 뻗고 싶으면 뻗고, 꺾고 싶으면 꺾고, 생각대로 질렀어요.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음악이 거의 없었어요. 블루스라는 장르는 알려져 있었지만, 그런 방식으로 부르는 건 낯선 때였죠. 그래서 더 회자된 게 아닐까 싶어요. 따라 부르기도 쉽지 않았을 테고요. 왜 저렇게 소리를 꺾고 지르며 부르나 싶었을 테니까요.
전에 없는 것을 처음 하는 마음은 어땠나요?
정작 하는 사람은 그런 생각이 없어요. 그냥 내 모습과 닮아 있으니까 했을 뿐이에요. 음악 평론가나 대중이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냈을 수는 있죠. 하지만 나는 ‘이건 옳다’, ‘대중이 나를 좋아해야 한다’ 같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제게 중요한 건 늘 과정이었으니까요. 주변에서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말들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내가 모르는 게 많다 보니, 그런 이야기들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음악계도 그렇고, 일상도 그렇고 저는 모르는 게 많습니다. 관심을 크게 두지 않은 것 같아요.
2집 <바라본다>는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며 많은 이들에게 명반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음반의 의미를, 지금 시점에서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도 궁금합니다.
1집은 나의 의지와 크게 상관없이 만들어진 앨범이에요. 음악을 잘 알지도 못했고, 준비도 덜 된 상태에서 시작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앨범을 만들어준 기획자에게는 늘 고마워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분이 저를 끄집어내주셨으니까요. 그래서 2집 때는 조금은 나와 닮은 음악을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곡을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곡 수집은 제가 다 했죠. 가사가 없는 곡에는 가사를 붙였고, 편곡자를 만나서는 밴드가 연주하는 것처럼 편곡해달라고 딱 하나만 부탁했어요. 명반이라는 건 가수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작곡가, 작사가, 편곡자, 레코딩 엔지니어, 연주자 등 모든 사람이 만나 시너지가 일어나야 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전 2집 앨범에 대해 특별히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거나, 내가 이렇게 해냈다 하는 뿌듯함은 없어요. 늘 모두에게 고마워요.
다시 ‘늘 모두에게 고맙다’로 돌아가네요?
태원 씨가 어떻게 이렇게 가사를 잘 썼을까? 이 슬픔은 일차원적 슬픔이 아니에요. 슬픔이 오히려 맑고 밝아요. 이차원적 슬픔을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표현 같아요.
근데 나라는 사람을 파악하는 것, 나아가 나를 닮은 음악을 하는 것 모두 쉽지 않은 일로 느껴집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나라는 건 이런 거예요. 저는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보다 담백한 걸 좋아해요. 결국 내 안에서 내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는 본인만 알잖아요. 제 안에는 너무 많은 색깔이 있어요. 그중에서 어떤 때는 록이, 어떤 때는 발라드가 나의 어떤 면을 끄집어내 응집하는 것이겠죠. 그게 ‘나인가 보다’ 하고. 결국 내 안에 있는 열정 혹은 욕망 덩어리를 해소하려 애쓰는 거겠죠. 굉장히 불교적 질문 같으네요. 불교계 어르신들이 그러잖아요. “나는 없다. 네가 어디 있니” 이런 말씀을 하시잖아요. 그런데 나는 그렇게 어려운 건 잘 몰라요. 다만 우리가 옷을 입을 때도 “나는 이런 스타일이 어울려, 이런 바지가 잘 맞아” 하잖아요. 나는 그렇게 규정하는 게 좀 불편해요. 무대에서는 캐릭터를 입을 수 있지만, 일상에서는 굳이 그렇게 규정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가볍게.
말씀대로라면 그저 나다움을 지향했을 뿐인데 큰 반응을 얻었던 것이지요. 당시 의외의 간극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2집 앨범을 낸 뒤 콘서트만 하고 대중매체에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않았어요. 자랑은 아닙니다. 산으로 가거나 그렇게 지냈죠. 노래가 히트했고, 그 앨범으로 내가 굉장히 유명해졌다는 이야기를 10년쯤 지나서야 알았어요. 내가 어느 정도 관심이 없었는지 알겠죠? 당시 <젊음의 행진>이라는 프로그램 한 회 전체를 제가 거의 다 채운 적이 있어요. 그 전에는 한 가수가 프로그램을 통째로 맡은 적이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PD가 한 회를 다 채워달라고 했는데, 데스크는 다른 가수가 두 곡 정도는 불렀으면 좋겠다고 했대요. 그래서 기타 치던 친구가 앨범 작업을 하니까 그 친구가 두 곡을 하고, 내가 나머지를 채웠죠. 그런데 저는 그 이후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요. 나중에 들으니, 그 시절 대학가의 웬만한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들어가면 제가 출연한 회의 <젊음의 행진> 비디오를 틀어놨다고 하더라고요. 앨범에 수록된 곡이 거의 다 히트했다고도 하고요. 그렇게 유명했었다고요. 그런데 정작 나는 몰랐어요. 노래를 하고 음악을 한다는 건, 어떤 목적이 있어야 하잖아요. 누군가는 음악으로 사회를 바꾸겠다고 하고, 누군가는 명예를 얻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돈을 벌고 싶어 하죠. 그런데 지나고 보니 나는 그런 목적보다는 오직 과정만 있었던 것 같아요. 오직 프로세스만. 근데 그건 지금도 거의 비슷해요.

많은 이들이 한영애의 노래를 두고, 지금도 변함없는 음색과 톤으로 부른다고 말하잖아요. 목소리가 세월을 거스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끔 음악 하는 분들이 지금도 레코딩 당시와 같은 키로 노래를 부르냐고 물어요. 당연하죠. 물론 체질적으로 어려운 분도 있겠지만, 저는 아직은 연습으로 커버가 돼요. 한 가지 작은 걱정은 있어요. 나이가 있으니까요.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죠. 그런데 오늘까지는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잘 모르겠어요. 걱정이라기보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왜 점점 더 좋아지지?(웃음)
적어도 가수 한영애에게 연습이라는 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창법을 익히고, 음역대를 넓히는 영역 밖일 것 같은데요. 어떠신가요?
이쯤 되니 우리가 매일같이 노래 연습만 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요. 연습이라는 게 꼭 노래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잖아요. 산에 가는 것도, 운동을 하는 것도, 갤러리에 가는 것도, 음악 공연이나 연극을 보러 가는 것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사람들과 깔깔 웃는 것도 저는 다 연습이라고 생각해요. 결국은 내가 나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겠죠. 이 정도의 세월을 지나오면, 몰입하는 법이나 순간적으로 호흡을 바꾸며 정서를 전환하는 일은 어느 정도 몸에 훈련돼 배어 있지 않나 싶어요.
돌이켜보면 왜 노래했고, 왜 노래하고 계신 것 같은가요?
무대가 좋았던 거예요. 예전에 어떤 기자가 쓴 인터뷰를 다시 보게 됐어요. 마지막 줄에 이렇게 써 있더군요. “우리가 한영애를 보고 싶을 때, 그녀는 늘 없었다.” 1990년대 중반쯤 한 인터뷰였는데, 그 문장을 보며 굉장히 미안하고, 또 창피했어요. 가수는 어때야 하는 거지? 스스로 묻게 되더라고요. 관객이 있을 때, 비로소 나라는 가수도, 내가 부르는 노래도 완성되는 건데… 관객이 보고 싶어 할 때 나는 거기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깊이 반성했죠. 그렇다고 내가 열심히 한다고 대중이 원하는 것도 아니고, 활발하게 활동하려 해도 무대가 꼭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앞으로 기회가 얼마나 더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예요. 다행히 목소리는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지금까지 긴 시간 업을 지켜온 힘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힘이고요.
시간보다는 글쎄. 나는 더 많이 하고 싶었어요. 원 없이 해봤다는 말을 아직은 할 수가 없어요. 정말 원 없이 해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내게 옷을 만들어주던 디자이너가 의상실을 그만둘 때가 있었어요. 내가 “괜찮겠어?” 하고 물었죠. 그분이 예순이 넘도록 평생 해온 일이니 아쉬움이 남지 않을까 싶어서요. 근데 그분이 그러더라고요. “나는 원 없이 해봤어요. 미련도 없어요.” 그 말을 듣는데 참 존경스럽더라고. 나는 아직 원 없이 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음악의 시간을 되돌아볼 때, 지금 이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빛나는 장면이 있다면요?
너무 많죠. 가끔은 ‘내게 오직 음악만 있던 시절’이 언제였을까 하는 생각을 줄곧 하죠. 아마 조금 더 청년이던 시간이었겠지요. 그때의 음악은 지금과는 다른 형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다시 음악만으로 채워진 시간을 살아가고 싶고, 또 그렇게 채워질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