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패션 위크 후반부는 빅하우스의 존재감과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선명해진 방향성이 맞물리며 다음 시즌을 예고합니다.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파리 패션 위크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됩니다. 샤넬부터 미우미우까지 빅하우스가 연달아 모습을 드러내며 시선이 자연스럽게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또 샤넬의 마티유 블라지, 발렌시아가의 피에르파올로 피촐리, 셀린느의 마이클 라이더처럼 신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여는 새 시대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시점이라는 점도 중요한 관전 포인트입니다. 화제성을 입증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자신만의 언어로 하우스의 다음 장면을 써 내려가는 구간에 들어선 셈입니다. 이번 후반부에서는 그런 변화가 어떤 트렌드와 장면으로 이어졌는지 짚어봅니다.

낮과 밤 사이를 가로지른 샤넬과 에르메스

샤넬과 에르메스는 서로 다른 언어로 낮과 밤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현실적인 옷장 안에서도 충분히 환상적인 순간을 빚어낼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먼저 샤넬(Chanel)은 일상의 옷장과 저녁 의상의 문법을 교차시키며 그 경계를 유연하게 흐트러뜨렸습니다. 단정한 트위드와 빛을 머금은 소재, 익숙한 외형과 극적인 장식이 맞물리며 낮의 현실감과 밤의 환상이 한 화면 안에 공존했죠. 이번 컬렉션은 브랜드가 내세운 ‘낮과 밤, 단순함과 무지개색 광택’이라는 구호를 가장 선명하게 시각화한 결과물입니다. 마티유 블라지는 반짝이는 표면과 반투명한 질감, 낮게 내려온 허리선을 활용해 샤넬 특유의 우아함에 한층 가볍고 율동적인 숨결을 불어넣었습니다. 특히 트위드를 과거의 유산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광택 소재와 실리콘을 활용한 표면 실험을 더해 고전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다시 읽어냈습니다.

에르메스(Hermès)는 보다 절제된 방식으로 밤을 파고듭니다. 황혼에서 밤으로 잦아드는 듯한 짙은 색조 위로 가죽과 지퍼 장식을 변주해, 견고한 실용성과 은근한 관능을 동시에 드러냈죠. 여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나데주 바네는 이번 컬렉션의 출발점으로 황혼과 경계의 영역을 언급하며 낮과 밤 사이, 그 모호한 변화의 순간에 주목했습니다. 덕분에 모든 룩은 장식적인 화려함보다 움직임과 긴장감에 무게가 실렸습니다. 날렵한 가죽 겉옷과 긴 장화, 신체의 선을 따라 정교하게 재단된 선이 맞물리며 에르메스 고유의 현실적인 힘에 선명한 분위기를 더했습니다. 

목선 하나로 분위기 끝, 셀린느와 로에베의 결정적 한 수

스카프와 머플러는 단순한 방한 아이템을 넘어 의상의 인상을 좌우하는 핵심 장치로 떠올랐습니다. 셀린느(Celine)는 목을 단단히 감싼 스카프에 긴 코트와 날렵한 재킷을 겹쳐 특유의 단정한 실루엣에 팽팽한 긴장감을 더했습니다. 마이클 라이더는 정제된 고전 위에 개인적인 스타일링 감각을 입혀 익숙한 옷차림도 한층 예민하고 세련된 분위기로 바꿨습니다. 목 가까이 바짝 붙는 연출만으로도 의상 전체의 밀도와 인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분명하게 보여준 셈입니다.

로에베(Loewe)는 특유의 기발함을 발휘해 머플러를 훨씬 대담한 방식으로 풀어냈습니다. 체크무늬 드레스와 같은 패턴의 거대한 머플러로 스타일링한 룩은 액세서리 하나가 인상을 얼마나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 증명했습니다. 매끈한 베이지색 코트 위에 옷과 한 몸처럼 이어진 가죽 머플러를 감아 올린 연출 역시 시선을 끕니다. 목선을 따라 크게 부푼 형태가 잡히면서 머플러는 더 이상 곁들이는 아이템이 아니라 실루엣 자체를 완성하는 포인트로 기능한 셈이죠. 이밖에도 짧은 후드가 달린 기능성 파카와 양털 장식, 베개처럼 부푼 긴 코트가 목과 어깨를 깊게 감싸며 실루엣에 확실한 입체감을 더했습니다.

자연을 품은 쇼장에서 루이 비통과 미우미우

패션 하우스는 컬렉션을 선보일 때 룩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BGM과 장소, 무대 장치, 초대장까지 쇼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하나의 메시지로 엮습니다. 그중에서도 베뉴는 컬렉션의 방향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루이 비통(Louis Vuitton)은 이번 컬렉션을 위해 루브르 박물관 안에 초록빛 언덕과 산맥을 닮은 지형을 펼치고 자연과 여행, 기억의 감각을 한 장면 안에 겹쳐 놓았습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보편적인 민속 전통과 집단 기억이라는 개념을 바탕에 두고 컬렉션 전체를 하나의 서사처럼 이끌었죠. 룩 역시 공간과 따로 놀지 않았습니다. 동물의 상징과 거친 털 장식, 유목적인 기운이 스민 실루엣이 맞물리며 현실의 옷장보다는 신화에 가까운 풍경을 그려냈습니다.

미우미우(Miu Miu) 역시 자연을 쇼장의 핵심 장치로 끌어왔습니다. 야생 숲을 연상시키는 공간은 거대한 세계와 개인의 몸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습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그 안에 신체에 밀착하는 옷을 놓으며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각의 영역으로 다뤘습니다. 포플린 드레스와 낡은 듯한 캐시미어, 몸을 감싸는 겉옷은 숲을 닮은 공간과 맞물리며 친밀함과 긴장을 동시에 남겼습니다. 

발렌시아가와 키코 코스타디노프의 유려한 실루엣

구조적인 재단 못지않게 시선을 끈 건 천의 흐름이 만든 드레이프 실루엣이었습니다. 발렌시아가(Balenciaga)는 높게 세운 깃과 몸을 감싸는 코트, 절개와 주름이 맞물린 드레스를 통해 옷이 신체를 감싸는 방식을 새롭게 제시했습니다. 눈에 들어온 건 단순한 부피감이 아니었습니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천이 몸을 따라 길게 흐르며 실루엣에 리듬을 만든 점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외형은 단단하게 세웠고 선은 부드럽게 흘렀습니다. 그 상반된 성질이 맞물리며 의상에 또렷한 긴장감을 남겼습니다.

키코 코스타디노프(Kiko Kostadinov)는 얇고 유연한 소재로 같은 흐름을 풀었습니다. 한쪽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와 은은한 광택의 비단, 비치는 듯한 얇은 소재가 겹치며 표면에 미세한 움직임을 만들었습니다. 몸을 따라 길게 떨어지는 선은 복잡한 장식 없이도 실루엣 자체에 힘을 실었습니다. 여기에 숲빛 인타르시아 위에 깃털 패턴을 겹쳐 넣은 니트웨어와 겉옷이 더해지며, 부드럽게 흐르는 선 안에서도 시각적인 결이 더욱 풍성하게 살아났습니다.

가면과 배역으로 빚어낸 맥퀸과 장 폴 고티에

맥퀸과 장 폴 고티에는 룩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룩을 입은 인물 자체에 시선을 모았습니다. 룩은 단순히 신체를 감싸는 차림이 아니라 태도와 서사, 감정까지 함께 입히는 장치로 기능했고, 그 흐름이 런웨이의 공기를 한층 팽팽하게 만들었죠. 맥퀸(Mcqueen)은 완벽을 향한 갈망과 그 이면에 도사린 불안을 무대 위로 끌어왔습니다. 지나치게 매끈한 가면과 얼굴 가리개, 투명한 소재를 겹쳐 심리적인 압박을 시각화한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션 맥기르는 관찰당하는 삶 속 결벽적인 완벽주의를 이번 컬렉션의 화두로 던진 셈이죠. 날카롭게 재단한 재킷과 낮게 걸친 바지, 섬세한 자수와 투명한 비단 그리고 하우스의 유산인 해골 모티프가 맞물리며 단정한 겉모습 아래 꿈틀거리는 낯선 불안을 선명하게 남겼습니다.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는 검은 카우보이 햇과 핀스트라이프 테일러링, 몸에 밀착하는 장치와 기이한 오브제를 한 무대에 겹치며 각 룩에 선명한 인물성을 부여했습니다. 의상은 단순한 차림을 넘어 하나의 배역처럼 존재감을 발산했고, 런웨이는 쇼라기보다 역할극에 가까운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성 역할의 경계를 비트는 장 폴 고티에 특유의 태도도 이번 컬렉션에서 또렷하게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약 10일간 이어진 파리 패션 위크가 막을 내렸습니다. 하우스는 각자의 언어로 비율을 다시 짜고 실루엣을 새로 세웠으며 무대까지 서사의 일부로 끌어안아 다음 시즌의 감각을 또렷하게 남겼습니다. 이번 파리 패션 위크가 전한 메시지도 분명합니다. 옷은 더 가까운 현실을 향하지만 그 현실을 풀어내는 방식은 한층 더 극적이고 정교해졌습니다. 다가오는 가을 겨울, 이 흐름이 리얼웨이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지 함께 살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