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시간 동안 멈추지 않는 극장 실험이 서울에서 펼쳐집니다. 국립극단 ‘창작트랙 180°’ 프로젝트의 최종 발표회 ‘파빌리온 72’를 통해 작곡가 카입이 소리와 감각의 경계를 탐구하며 미래 극장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72시간, 극장의 시간을 다시 쓰다
극장의 공연 시간은 보통 두 시간 남짓입니다. 정해진 두 시간 안에 막이 오르고 이야기가 전개되며 커튼콜로 마무리되는 익숙한 리듬이죠. 그런데 이 규칙을 완전히 뒤집는 실험이 3월 서울에서 펼쳐집니다. 국립극단이 선보이는 프로젝트 ‘파빌리온 72(Pavilion 72)’가 바로 그 주인공이죠. 오는 3월 26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용산구 더줌아트센터에서 진행되는 이 발표회는 무려 72시간(4,320분) 동안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공연인데요. 극장이라는 공간의 시간 개념을 완전히 다시 설정하는 실험이 될 예정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국립극단의 창작 연구 프로그램 ‘창작트랙 180°’의 일환으로 진행됩니다. 기존 연극 창작 방식의 틀을 넘어 새로운 연극 언어를 탐구하기 위해 기획된 실험적 프로젝트이죠. 참여 예술가는 약 180일 동안 자유롭게 연구와 창작을 진행하며 그 과정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마지막 장면으로 등장한 작품이 바로 ‘파빌리온 72’입니다.
수백 개의 주변 소음이 허락되는 극장
‘파빌리온 72’의 무대는 전통적인 의미의 연극과는 다소 다른 풍경을 보여줍니다. 극장 안에는 수백 개의 다양한 소리가 층위처럼 쌓이며 공간을 채우죠. 진동과 촉각적인 감각까지 동반하는 이 사운드 환경 속에서 배우들이 때때로 등장해 몸짓과 대사를 나눕니다.
이때 관객은 일반적인 공연 관람 방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객석에 앉아 집중해서 보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롭게 들어오고 나갈 수 있으며 공연 중 책을 읽거나 누워 있어도 괜찮습니다. 관객의 행동 역시 공연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죠. 극장의 규칙이 느슨해지고, 관람의 방식이 자유로워지면서 관객은 공연의 ‘관찰자’가 아니라 같은 공간 속에서 공연을 함께 완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파빌리온 72’는 연극과 설치미술, 퍼포먼스, 사운드 아트를 가로지르는 독특한 형태의 예술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연극에 소리는 꼭 필요한가
“연극에서 소리는 정말 필수적인 요소일까?” 이 프로젝트는 이 모험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작곡가이자 사운드 디자이너,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해 온 카입(Kayip)은 이 질문을 통해 공연예술의 근본적인 구조를 다시 들여다봅니다. 영화에서는 소리가 서사와 구조 속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하지만, 연극에서는 그 관계가 상대적으로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죠. 그래서 그는 극장에서 소리가 다른 감각들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청각의 진화적 기원, 다감각 지각 이론, 공간과 감각의 상호작용 등 다양한 연구가 프로젝트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워크숍과 강연, 라운드테이블, 마스터 클래스가 이어지며 하나의 거대한 창작 실험이 만들어졌죠. 그렇게 만들어진 그 모든 탐구의 과정이 이번 발표회에서 관객에게 공개됩니다.
왜 하필 72시간일까
72시간이라는 시간 설정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심리학과 생리학에서는 외부 자극이 차단된 상황에서 인간의 인지 체계가 크게 흔들리는 시간대를 약 72시간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재난 상황에서 인간이 생존을 버틸 수 있는 임계점 역시 이 시간대와 연결되죠. 카입은 이 시간을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극장의 인지 구조를 흔들어 보고자 했습니다.
공연을 보고, 이해하고, 감정을 정리하는 기존의 관람 패턴이 길어진 시간 속에서 조금씩 흐트러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피로, 어긋남,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등장하는 순간 극장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카입은 바로 그 틈에서 ‘미래의 극장’이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집니다.
극장의 다음
이번 프로젝트의 정식 제목은 ‘극장의 다음: 다가올 낯선 감각들’입니다. 이 말 그대로, 이 작품은 하나의 완결된 공연이라기보다는 질문에 가까운 작업입니다. 극장에서 소리는 어떤 존재일까? 관객의 감각은 어떻게 작동할까? 공연의 시간은 꼭 정해져 있어야 할까. 이 질문들은 결국 공연예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묻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 공연에는 한 가지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이죠. 국립극단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예약을 하거나 현장 접수로 입장할 수 있으며, 공연 도중에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습니다. 대화를 나누거나, 돌아다니거나, 잠시 쉬어도 괜찮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은 공연이 아니라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경험일지도 모릅니다. 72시간 동안 멈추지 않는 극장. 그 안에서 관객은 어떤 감각을 발견하게 될까요? 극장의 다음 장면이 궁금하다면, 이번 실험을 놓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