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한때 ‘소녀’였습니다. 당신의 기억 구석 어딘가에 박제된 그 시절은 단순히 나이의 숫자가 아닌, 유년의 파편들이 빚어낸 짙은 노스텔지어죠. ‘소녀 감성’이라는 말 뒤에 숨은 유치함과 미숙함이 좀 어때서요? 오히려 그 서툴고 무모했던, 때로는 거칠기까지 했던 ‘퓨어’한 자아가 지금의 우리를 지탱하는 뿌리일지도 모릅니다. 2026년의 디자이너들은 지금 각기 다른 렌즈로 그 시절의 우리를 투영하고 있습니다. 자, 당신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소녀는 어떤 모습인가요?

초포바 로위나(Chopova Lowena)는 소녀는 ‘친절하고 얌전하다’는 고정관념을 보란 듯이 뒤집습니다. 무질서하게 뒤섞인 패턴, 볼드한 웨이스트 디테일, 관자놀이까지 치솟은 아이라인은 청소년기 특유의 혼란스러운 에너지를 대변하죠. 사실 우리의 사춘기는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잖아요? 시끄럽고, 정신없고, 감정이 과잉된 그 ‘카오스’적인 순간이야말로 소녀성이 가진 진짜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무질서 속에서 피어난 키치한 미학은 우리 안의 반항심을 기분 좋게 자극합니다.

‘소녀’라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스치는 잔상은 역시 리본과 러플, 그리고 정교한 레이스의 향연이 아닐까요? 로맨틱함의 정수를 보여주는 보라 악수(Bora Aksu)는 이번 시즌, 이 달콤한 요소들 사이로 서늘한 대화를 건넵니다. 이번 컬렉션의 뮤즈는 200년 전 영국 버킹엄셔에서 사랑의 도피를 꿈꾸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여종업원, ‘수키’입니다. 지역 전설로 회자되는 그녀의 슬픈 서사는 런웨이 위에서 한 편의 잔혹 동화로 부활했죠. 비하인드 스토리를 투영한 덕분일까요? 평소 사랑스럽게만 보이던 디테일들이 어딘가 연약하고,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신비로운 오라를 뿜어냅니다. 에테르한 텍스처를 구현하기 위해 겹겹이 층을 이룬 시어한 시폰 소재를 선택했습니다. 섬세한 질감과 투명한 팔레트의 변주는 사후 세계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려놓습니다. 덕분에 보라 악수 특유의 우아함은 파괴될 것 같은 위태로운 신비함과 맞닿아 있죠. 불완전함 속에 녹아든 낭만적인 고딕 무드는 우리가 잊고 지낸 소녀의 연약한 내면을 자극합니다.

넷플릭스 <브리저튼>의 한 장면을 런웨이로 옮겨 놓은 듯한 셀키(Selkie). “순수함으로의 회귀(Return to Innocence)”라는 테마 아래, 디자이너 킴벌리 고든(Kimberley Gordon)은 90년대에 유년 시절을 보낸 ‘TV 키즈’들의 환상을 극대화했습니다. 시그니처인 풍성한 프레리 드레스와 코르셋, 팔과 목에 주렁주렁 매달린 인형들은 키치한 매력을 더하죠. 특히 근육질의 남자들이 여성 모델을 안고 걷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는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학습해 온 ‘여성상’에 대한 오마주이자 질문입니다. 텅 빈 쇼장을 가득 채운 건, 소녀 시절 가졌던 뜨거운 열망과 아련한 향수 그 자체였습니다.

플로렌티나 라이트너(Florentina Leitner)는 영화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런웨이로 소환했습니다. 영화 속 파자마 파티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젊고 유쾌한 감각을 더했죠. 친구들과 밤새 수다 떨며 까르르 웃던 ‘걸스 나잇’의 에너지가 느껴지시나요? 파자마 디테일의 코튼 소재와 몽환적인 펠트 별 장식은 꿈과 현실 사이를 유영하는 소녀들의 밤을 재현합니다. 애착 인형처럼 손에 들린 양 모양의 핸드백과 티아라, 수면 안대 같은 액세서리는 이 컬렉션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지치지 않는 생기발랄함과 유쾌한 위트가 가득한 행복했던 밤의 재구성이네요.

첫 해외여행의 설렘과 두려움, 그 양가적인 감정을 파올리나 루소(Paolina Russo)는 당찬 발걸음으로 풀어냈습니다. 생애 첫 여행을 앞둔 소녀의 설레는 심상을 런웨이에 펼쳐 놓았습니다. 익숙한 안식처를 떠나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할 때의 설렘, 그리고 그 낯선 공기 속에서 본능적으로 발동되는 방어 기제가 이번 컬렉션의 핵심입니다. 디테일을 들여다보면 위트가 넘칩니다. 걸스카우트 대원 배지를 연상시키는 배지부터 다이어리 속 낙서를 옮겨 놓은 듯한 키치한 그래픽 프린트까지, 파스텔 핑크와 스트라이프 패턴을 입고 당당하게 전진하는 소녀의 발걸음이 느껴지죠. “이 옷들은 부드러운 전사 같은 공주를 위한 갑옷과 같다”는 루소의 말처럼, 이번 룩들은 반항적이지만 사랑스럽고,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에너지가 공존하는 양가적인 매력을 뿜어냅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어쩌면 우리 안의 소녀를 더 깊숙이 숨기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순수함과 무모함은 여전히 우리 내면에 잠재돼있죠. 오늘 하루만큼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당신이 간직한 가장 솔직한 ‘소녀’를 꺼내어 입어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