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속바지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런웨이 위로 굴러 들어온 이 낯설고도 익숙한 실루엣을 마주했을 때, 당신은 아마 가장 먼저 ‘란제리’ 혹은 ‘홈웨어’를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랑스러운 볼륨감의 주인공은 바로 ‘블루머 팬츠(Bloomer Pants)’입니다.

프라다를 비롯한 메이저 하우스들이 앞다투어 숏한 기장의 블루머 실루엣을 선보이며 트렌드의 물꼬를 텄고, 그 물결은 무릎을 덮는 7부 기장부터 발목 라인이 우아하게 드러나는 롱 버전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요가 바지나 언더웨어처럼 보여 외면했던 이들도 있겠지만, 한 번 그 자유로운 볼륨감과 극강의 활동성에 맛을 들이면 결코 헤어 나오기 힘들죠. 실루엣에서 느껴지는 들뜨는 설렘을 간직한 블루머 팬츠는 피크닉과 휴양지를 점령할 가장 강력한 아이템입니다.

보헤미안 감성의 대명사 끌로에는 블루머 팬츠를 다시 메인 스트림으로 끌어올린 주역입니다. 란제리를 연상시키는 보드라운 소재의 팬츠 위에 크로셰 니트 톱과 오버사이즈 아우터를 믹스매치해 가벼움과 무게감이 공존하는 색다른 밸런스를 보여주었죠.

루이 비통은 무릎 기장의 애매한 길이를 가장 동시대적인 실루엣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자칫 유치해 보일 수 있는 아이템을 하이엔드 무드로 끌어올렸죠. 80년대 레트로 무드를 소환한 셀키는 풍성한 러플 드레스 속에 블루머를 레이어드했습니다. 과거 여성들이 드레스 속에서 남몰래 꿈꾸던 자유를 오늘날의 해방감 있는 실루엣으로 정교하게 재해석한 대목입니다.

이처럼 블루머 팬츠가 내뿜는 특유의 당당함은 그 태생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사랑스러운 팬츠의 탄생 배경은 마냥 러블리하지만은 않거든요. 블루머 팬츠는 여성 인권과 해방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중반, 여성들에게 오직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와 코르셋만이 허용되던 시절에 여성 인권 운동가 아멜리아 블루머(Amelia Bloomer)는 파격적인 제안을 던졌습니다. 드레스 아래에 터키식 바지(Pantalettes)를 받쳐 입는 스타일을 유행시킨 것이죠. 당시 여성이 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저항’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이 헐렁하고 풍성한 바지는 그녀의 이름을 따 ‘블루머’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블루머 팬츠에서 단순히 귀여움뿐만 아니라 묘하게 반항적이고 당당한 기운을 느끼는 건, 그 뿌리에 깃든 자유를 향한 갈망이 시대를 넘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일겁니다.

현대에서 블루머 팬츠를 즐기는 가장 세련된 태도는 자연스러움입니다. 다림질로 빳빳하게 편 소재보다는 바스락거리는 코튼이나 시어한 시폰 소재 위로 잡힌 내추럴한 구김이 훨씬 멋스럽죠. 레이스와 리본, 셔링 마감은 블루머 팬츠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리본으로 밑단을 조여 볼륨을 극대화하면 극적인 로맨틱한 무드를, 그대로 풀어두면 무심한 듯 자유로운 보헤미안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너무 힘을 준 힐이나 무거운 부츠는 잠시 내려두고, 블루머 팬츠의 가벼운 리듬감에 맞춰 발등이 시원하게 드러나는 납작한 플랫 슈즈나 메리 제인을 매치하는 것 어떠세요?

로맨틱한 실루엣을 극대화하고 싶다면 클린한 화이트나 파스텔 톤 컬러를 선택해보세요. 시각적인 팽창감을 주는 밝은 컬러는 블루머 특유의 풍성한 볼륨감을 한층 드라마틱하게 살려주죠. 상의 역시 같은 소재의 크롭 톱이나 시스루 블라우스를 매치해 셋업 느낌을 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허리 라인에 파스텔 톤 가디건을 무심하게 둘러 웨이스트 디테일을 살려준다면, 당장이라도 나들이를 떠나고 싶은 자유로운 무드 완성입니다. 블루머 팬츠는 더 이상 드레스 속에 숨겨두어야 할 ‘언더웨어’가 아니라 자유로운 여성의 패션 아이템이죠. 다가오는 봄 여름, 블루머 팬츠를 입어보세요. 볼륨감 넘치는 바지 자락 사이로 당신이 잊고 지낸 해방감과 낭만이 살랑이며 스며들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