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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화산 같은 여자

나는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지는 저주받은 체질이다. 그래도 술이 좋다. 내 붉은 얼굴을 본 사람들은 매번 극구 말리지만 나는 술에 취하면 고집이 세진다. 문제는 점점 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결국 진짜 폭탄처럼 터져버린다는 것이다. 검붉은 얼굴이 부어오르고, 끝내는 오바이트를 뿜고 만다. 얼마 전 대놓고 하는 소개팅은 어색하니 여럿이 모여 술 한잔 하자는 취지의 자리에 나갔다. 내 파트너 격으로 온 남자 B는 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우리는 대화가 잘 통했다. 난 오늘은 잘 조절하자 다짐했다. 화장실에 다녀왔다. 좀 움직이니 갑자기 술기운이 솟구쳤다. B의 코트를 무릎에 덮고 벽에 기댄 채 잠시 잠이 들었다. 몇 분쯤 지났을까? 눈을 떴다. 상황은 최악. 내 입에서 뿜어져 나 온 부대찌개가 흘러내려 B의 코트를 물들이고 있었다. 다시 정신을 잃은 척했다. 마음에 들었던 B와의 인연은 거기까지. 그놈의 술이 죄다. P, 작가(28세/여)

 

술 때문에 잃은 첫사랑

어릴 적 만난 A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리숙한 섹스를 했다. 아니, 삽입 직전까지 갔었다. 이후 쭉 만나지 않다가 서른 살이 돼서야 다시 만났다. A가 페이스북 메신저로 ‘어머, 오랜만이다.’ 했고, 안부를 몇 마디 주고받다가 술 약속을 잡았다. 열일곱 살 사춘기 시절 A와 애무만 나눈 채로 13년을 잊고 지냈으니, 이제 한번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한 날, 콘돔을 챙기고 속옷도 모던한 걸로 입었다. 어른이 된 A는 여전히 씩씩하고 귀여웠다. 맥주로 스타트를 끊었다. 서로 살아온 이야기는 20대를 지나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으로 이어졌다. 몇 잔을 비웠는데도 A는 멀쩡했다. 센 술로 갈아타야겠다 싶어 테킬라를 시켰다. 우리는 스트레이트 원 샷을 여러 번 반복했다. 술집을 나와 자연스레 모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A의 허리를 잡고 키스를 퍼부었다. 꽤 열심히 했다. 콘돔 포장지를 뜯었다. 발기가 되지 않았다. 콘돔을 내려놓고 전희에 몰두했다. A도 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변태처럼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말캉한 상태는 계속됐다. 13년 전 그날처럼 말이다. A는 옷을 입고 방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침대에 걸터앉아 콘돔을 다시 끼워봤지만 술에 취한 페니스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S, 연구원(30세/남)

 

선 만취 후 연애

Y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만취 상태였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나도 좀 취해 있긴 했다. 우린 각자의 술자리에서 3차로 이동하던 차에서 만났다. 내 친구의 지인들이 모인 자리였다. 꽤 시끄러웠다. 점점 더 취해서 Y의 말소리도, 다른 사람들의 대화도 잘 들리지 않았다. 답답해서 밖으로 나갔다. Y가 비틀거리며 따라 나왔다. 사람들이 있는 술집 건너편 좁은 골목에서 휘청거리는 그녀를 부축했다. 허리를 감싸 안았다. 동시에 함께 땅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우린 크게 웃고 나서 대충 털고 일어나 다음 블록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걸어갔다. 갈증이 났다. 편의점에서 맥주와 새우깡을 사왔다. 바람이 시원했다. 조금씩 술기운이 달아났다. 그녀는 모기가 너무 많다고, 덥다고 투덜거렸다. 나는 Y의 손을 잡고 택시를 잡았다. 우리는 택시 안에서 함께 잠들었다. 눈을 떠보니 이름 모를 빌라 입구. 그녀의 집 앞이다. 택시에서 내렸다. 엉큼한 상상을 꾹 누른 채 그녀를 곱게 들여보냈다. 따라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Y에게 전화를 걸어 해장하러 가자고 했다. 대낮에 만난 그녀는 전날 밤과 달리 청초하고 맑은 외모에 똑 부러지는 말투를 가진 여자였다. 반전 매력이다. 또 만나고 싶었다. 몇 주간 매일같이 전화를 걸었다. 지저분한 골목길에서 함께 넘어져 뒹굴던 게 첫 만남이었던 Y와 3년째 연애 중이다. N, 포토그래퍼(32세/남)

 

틀어막고 싶은 내 입

남자친구와 지난주 일요일에 헤어졌다. 내가 미쳤었다. 금요일 저녁에 벌어진 사건이다. 오랜만에 그와 단둘이 사케를 마셨다. 네 도쿠리째 들이켰다. 취했다. 입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그는 궁금해하지도 않는 과거를 내 입으로 탈탈 털었다. “작년에 말이야. P오빠랑 자양동에 집까지 구해서 같이 살았는데 말이야.” “그 새끼는 의리라곤 없는 놈이야. 내가 다시 자양동 근처에 가나봐라.” 술만 취했다 하면 필터 없이 줄줄이 읊어대는 내 술버릇은 P오빠부터 5년 전 C군까지 모두 훑을 때까지 계속됐다. 다음 날 눈을 떴다. 기억이 점점 선명해졌다. 머리털을 뜯으며 후회했다. 오후까지 남자친구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먼저 문자를 보냈다. 답이 없다. 전화를 걸었다. 차가웠다. “오늘은 생각 좀 할게. 내일 통화하자.” 다음 날인 일요일, 그는 이별을 고했다. 돌이킬 수 없었다. 오늘은 솔로 친구와 만나 소주를 마시기로 했다. O, 회사원(26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