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공식을 내려놓고 미지의 심연 속으로 몸을 맡긴 다니엘 로즈베리. 그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스키아파렐리(Schiaparelli) 2026-2027 가을-겨울 오트 쿠튀르 컬렉션 ‘The Abyss’이 공개됐습니다.
창작의 공식이 무너진 자리를 채우는 심연
스키아파렐리(Schiaparelli)가 26-27 가을-겨울 오트 쿠튀르 컬렉션 ‘The Abyss’를 공개했습니다.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니엘 로즈베리(Daniel Roseberry)는 이번 시즌의 제작 과정을 공유하며 지난 시즌 ‘The Agony and the Ecstasy’를 하나의 돌파구로 받아들였다고 밝혔는데요. 마침내 성공의 공식을 찾았다고 믿은 그는 이번에도 여행을 떠나 영감을 얻고, 상징적인 건축물을 마주한 뒤 아틀리에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하려 했죠. 실제로 그는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을 보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로즈베리는 창작 과정을 통제하려 했던 태도와 ‘공허의 부름(l’appel du vide)’을 외면한 것이 자신과 컬렉션을 동시에 옥죄었다고 고백합니다. 답은 공식 바깥에 있었습니다. 확신을 버리고 심연에 몸을 맡기자 컬렉션이 움직이기 시작했죠. 1922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You, Darkness’도 이번 작업의 정서적 좌표가 됐습니다. 제목 속 심연은 추락의 공포보다 창작자가 뛰어들어야 할 미지의 공간을 가리키죠.


합성 소재에 전통적인 쿠튀르 기법의 결합
이번 시즌의 변화는 소재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데요. 컬렉션에는 실크와 새틴, 울을 대신해 라텍스와 실리콘, 물감을 판처럼 구워낸 소재가 사용됐습니다. 오트 쿠튀르의 전통적인 기법을 합성 소재와 결합하며 피부와 갑옷, 도자기, 해양 생물을 오가는 낯선 표면을 만들어냈죠. 액상 실리콘으로 제작한 코르셋과 드레스, 튜브처럼 공기가 주입돼 쉐입이 완성되는 재킷과 크린 촉수는 모델의 걸음걸이에 따라 움직이며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반응합니다. 단단한 조형성과 유연한 움직임이 겹치며 스키아파렐리 특유의 초현실주의가 한층 선명해졌죠.

심연에서 건져 올린 실루엣
컬렉션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드는 것은 식물과 해양 생물에서 가져온 다채로운 색감과 산호초, 말미잘, 조개껍데기, 해양 화석을 연상시키는 조형적인 디테일입니다. 랍스터 핑크와 페일 민트, 바이올렛, 탠저린에 하이글로시 블랙과 스키아파렐리 골드가 더해지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완성했죠. 컬러에 이어 빛 역시 스키아파렐리 컬렉션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해 왔는데요. 메종의 ‘쇼킹(Shocking)’ 향수 보틀에서 영감받은 앰버 컬러 실리콘 재킷은 내부에서 빛을 내도록 제작됐으며, 화이트 도자기 효과의 실리콘 보디스에 미러 프린지를 더한 드레스 역시 프린지 스커트 안쪽에 발광 구조를 적용했죠. 이처럼 빛을 품은 피스들은 몸을 감싸는 옷의 영역을 넘어 하나의 조형적인 오브제처럼 보였습니다.



수천 시간으로 완성한 장인정신
낯선 소재와 전통적인 쿠튀르 기법을 결합한 피스들은 장인의 손을 거쳐 탄생했죠. ‘워킹 코럴(Walking Coral)’ 드레스에는 7,000m가 넘는 크린과 9,850시간의 작업이 투입됐으며, 물고기 비늘과 손으로 채색한 리본, 꽃을 자수한 재킷에는 1만1,288개 이상의 꽃과 2,779시간이 쓰였습니다. 수작업으로 완성한 크린 촉수와 촘촘하게 수놓은 꽃과 비늘은 각 피스에 산호초를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볼륨을 더했습니다. 해부학적 코르셋과 과장된 신체 실루엣, 조개껍데기와 문어 촉수, 말미잘에서 출발한 주얼리, 외계 생명체를 닮은 메탈릭 형태의 ‘더 버블(The Bubble)’ 슈즈까지 하우스의 초현실적인 코드도 새롭게 변주됐죠.


스키아파렐리의 이번 컬렉션을 통해 보여준 쿠튀르의 핵심은 소재의 희소성보다 상상력과 기술의 밀도에 있습니다. 라텍스와 실리콘 같은 신소재도 수천 시간의 손길을 거치면 쿠튀르 피스가 될 수 있고, 오래된 하우스 코드 역시 낯선 방식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죠. 창작의 공식을 내려놓고 심연의 황홀 속으로 뛰어든 다니엘 로즈베리. 그가 이번 시즌 길어 올린 것은 불확실성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꾸는 스키아파렐리만의 대담한 쿠튀르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