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를 발굴하고 지지하는 마음을 담아, 지난해 한국을 넘어 아시아로 영역을 확장한
부산국제영화제의 ‘비전(Vision)’ 섹션이 2026년 한층 다채로운 영화들을 소개한다.
24편의 선정작, 25명이 감독이 함께하는 올해의 비전 섹션은
세대와 경력이 서로 다르고, 저마다 다른 주제 의식을 좇는 창작자들이
품어온 질문을 스크린에 폭넓고 생생하게 펼쳐낸다.
오늘의 감각과 내일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그려나갈 감독들이
영화의 세계에서 지켜갈 신념과 열망, 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왔다.

김미영 KIM MI YOUNG

<모종의 탐정 Some Detective>

탐정이 나오는 추리소설을 처음 쓰며 애쓰는 작가 해주. 어느 날 전남편 태재의 어머니에게서 연락을 받고 외출에 나선다. 과거의 인연, 현재의 관계에서 비롯된 만남을 이어가며 그는 잊고 있던 과거와 오해, 자기 확신이 만들어낸 흔적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시작
누군가의 삶을 이야기할 때, 온전히 그 자신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인연과 시간의 영향력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사람으로 남아 있는가, 한 사람에 대해 말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떠올려야 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도무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가시광선을 떠올리게 된 것. 아, 사람들은 한 가지 색으로 섞여지지 않는 무지개의 무리와 같구나.

기억에 남는 순간
편집 과정에서 코멘트들을 들으며 어찌 헤쳐가야 이 영화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한 시간이 있었다. 편집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시작되었고, 촬영 과정을 객관적으로 복기하면서(좀 고통스러운 과정) 거리를 두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그제야 ‘이런 거 처음이 아닌데, 뭐지?’ 영화를 만들 때마다 매번 반복하는 과정이라는 것. 필수적인 과정. 잊고 있었다. 하긴 잊지 않고서야 어떻게 다음 영화를 또 시작했겠는가,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

화두와 질문
<모종의 탐정>은 어떤 소설가가 새 작품에 착수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탐정이 주인공이지만,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하는 추리소설이라기보다 추리 과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탐정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을 고민하려고 한다. 과거의 사람들 또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서(과거의 사람들이 결국은 낯선 사람들이기도 하다는 것도 깨달으면서) 희한하게도 자신이 세상의 일부라는 감각을 건져 올린다. “과거와 화해하지 않으면 영원히 과거 안에 머물게 된다”(출처 미상의 문장, 노트에 적혀 있어서 미친 듯이 출처를 찾고 있지만 아직도 못 찾은)는 문장이 대체 왜 노트에 적혀 있는가, 그 이유를 알고자 탐색하다가 자신이 써야 할 것이 탐정의 정체성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참으로 지난한 과정이 앞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것을, 즉 문제를 스스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감독의 일
시나리오와 카메라를 가지고, 영화사의 전개와 선행 작품들의 맥락 안팎에서(혹은 그런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무관하게) 당대의 삶의 시간과 장소를, 여러 다양한 불일치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이야기나 아이디어를 통해 기록하고 바라보다가, ‘불일치의 일치’의 순간을 겪기도 하는 일인 것 같다고 외계에서 온 그 무엇이 말할 때,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도무지 부분들을 다 모아도 그 전체가 그려지지 않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전달될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해보는 순간, 그 일의 의미(혹은 ‘의미’를 넘어서거나, 도무지 ‘의미’로 채워지지 않는)가 자기 자신과 분리 불가능하게 된다.

영화만의 힘
(외계에서 온 그 무엇의 관점을 빌리자면) 각기 다른 개성과 관심사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이 상당히 투명하게(그들이 만드는 동안 잘 인지하지 못할 수 있지만) 기록되는 매체라는 것. 그게 무작위적이지만 (그래도 인연이 닿는) 낯선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구조 안에서 어떻게 4차원의 좌표를 찍어가고 있는지 (순간을 멈출 수 있는 바닥에 있는 경우라면 더 높은 가능성으로) 얼핏이나마 알아차리게 할 수도 있는 그 무엇. 그 힘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

나의 비전
이런저런 시간과 공간과 관계를 통과해왔다는 것의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어떤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경험을 겪어냈는지 알아보고 받아들이는(의지적인 것만 으로 되지 않으므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바닷가의 모래알과 같은 역할에 대한 ‘비전(祕傳)’을 전수 받는 것.

손현록 SOHN HYUN LOK

<새 The Birds>

홀로 남매를 키우는 교사 예옥이 근무하는 학교 옥상에서 학생들이 투신한다. 그 현장에 있던 딸 혜정은 “하늘에 새가 있었다”는 말만 반복한다. 원인 모를 이상한 죽음이 계속되자 예옥은 사건을 취재한 기자, 새 탐조 채널을 운영하는 스트리머와 함께 새들의 서식지로 향한다.

이야기의 시작
감독의 꿈을 품고 밤새 글을 쓰던 군 복무 시절,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를 보고 부러워한 적이 있다. 당시 ‘아빠와 아들이 새 사냥꾼에게 쫓기는 이야기’로 공책 5권을 채웠고, 4년 전 지금의 형태로 다시 쓰기 시작했다. 대상을 이해하고자 일종의 구분을 만들고 분류하는 것이 싫었다. 그 경계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기억에 남는 순간
학생들이 동굴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을 촬영할 때, 네 배우의 모습이 보기 좋아 컷을 외치지 않고 계속 바라봤다. 배우들이 동굴 속에서 황금 박쥐를 봤다며 신난 목소리로 “이 영화, 잘될 것 같다”고 말해줬다. 고마운 기억이자 큰 힘을 얻은 순간이었다.

화두와 질문
비교에서 비롯된 구분은 타인을 향하지만, 나 자신을 가두는 일이기도 하다. 그 상태가 마치 새장 같았다. 새장 밖으로 발을 내디뎌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 모든 구분을 하나씩 없애보면 어떨까? 이 세상에 어떤 구분도 없다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감독의 일
영화는 유연하다. 한 가지로만 해석되지 않는, 다양하고 다층적인 이야기를 포갤 수 있는 언어 같다. 뱉지 못한 내면의 말들, 감각과 시선이 여러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들을 영화를 통해 발설하고 싶다.

영화만의 힘
상상은 끝없이 펼쳐나가다 보면 덜컥 무서워지거나 감정의 요동에 휩싸일 수 있어 위험성을 지닌다.그에 반해 영화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생생한 이미지와 사운드로 만들어내면서도 하나의 결말에 다다른다. ‘안전한 상상’을 극장에 모인 이들과 공유하고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것 또한 영화의 큰 힘이다.

나의 비전
영화가 언어라면 나만의 언어를 구사하고 싶고, 새로운 향기가 나는 작품으로 한 번뿐인 인생을 사는 관객에게 조금이나마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오래 품고 싶고, 함께 존재한다고 느끼게 하는 ‘좋은 영화’ 를 만들어가고 싶다.

오세현 OH SE HYEON

<베일러 BALER>

퇴사와 임신을 겪고 아무런 의지나 기대가 없는 듯한 은주. 한 달간 농번기 아르바이트를 해보라는 선배 창호의 제안을 받고 농촌으로 향한다. 탈곡 후 남은 볏짚을 정돈하고, 소를 돌보고, 농촌 사내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그는 시시하고 불편한 대화를 짧게 나눈다.

이야기의 시작
5년 전, 농부인 친구의 권유로 농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을 시작한 순간, ‘이곳에서 분명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오겠구나’ 하고 직감했다. 농촌 도처 에서는 생과 사가 숨 쉬듯 일어났다. 무언가 태어나고 자라고 소멸하는 과정이 눈앞에 펼쳐지고, 일상의 순간들과 뒤섞여 있어 그곳 사람들은 이를 유난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생사를 대하는 도시와 농촌의 온점 차이가 낯설면서도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서 2년여간 일하며 보고 느낀 점을 메모로 남겼고, 켜켜이 쌓인 기록이 형체를 갖춘 게 <베일러>다.

기억에 남는 순간
어느 날 밤, 소가 죽었다. 친구와 함께 중장비를 이용해 죽은 소를 축사 밖으로 끌어냈다. 바닥에 내려놓자 ‘쿵’ 하는 무게감과 함께 죽음이 또렷한 실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죽음은 머릿속 관념이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식어가는 몸뚱이였고, 물리적 사실이었다. 축사의 온기를 벗어나 차가운 맨땅에 닿는 순간, 소의 몸에 남아 있던 생의 기척마저 비로소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시나리오를 한 줄도 쓰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 장면만큼은 꼭 영화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에게 소가 또 죽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했고, 몇 달 뒤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화두와 질문
‘우리는 일상에서 삶과 죽음을 어떻게 감각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베일리>는 태어남도, 죽음도 과장된 기쁨이나 슬픔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자연의 순리 속에서는 이 또한 ‘삶의 당연한 한 조각’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죽음의 감각을 마주했을 때, 역 설적으로 이 순간의 삶이 훨씬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관객이 극장을 나설 때 ‘지금 내 곁에 숨 쉬고 있는 수많은 생과 사의 기척들’을 담담하고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작은 균열이 생긴다면 좋겠다.

감독의 일
세상이 스쳐 보내는 미세한 기척들을 감각하고 그 이름을 불러주는 일. 살다 보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발견하지 못한 채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가 있다. 감독은 그런 순간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그 무게를 잠시 느껴보고, 본인이 본 것을 관객과 나눈다. 결국 영화 만들기란 내 시선을 담담하게 기록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순간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쌓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영화만의 힘
시간과 공간, 현장의 감각을 통째로 벼려내 관객 앞에 물리적으로 가져다 놓는 데 있다. 관념 속에만 있던 무언가가 렌즈와 스크린을 거쳐 피할 수 없는 실체로 눈앞에 놓이는 순간의 힘은 오직 영화만이 가질 수 있 다. 생생하게 뿜어져 나오는 현장의 에너지, 그 우연과 필연이 얽혀 만들어낸 프레임 속에서 관객은 그 순간을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함께 ‘겪게’ 된다.

나의 비전
조정래 선생님이 좋은 작가의 조건 중 하나로 ‘장수’를 말씀하셨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 젊은 눈에 보이는 이야기가 있고, 나이를 먹어야 볼 수 있는 세상도 있을 거다. 지금은 미처 보지 못하는 인생의 사각지대가 좀 더 선명해질 수도 있다. 나이 든 감독이 되어 그때 할 수 있는 이야기까지 다 쏟아내고 싶다.

김시진 KIM SI JIN

<화곡사 The Flower>

망자를 배웅하는 일로 평생을 보낸 화장터의 이 소장. 이제는 본인이 떠나야 할 시간임을 직감해 오랫동안 일했던 화장터를 찾았지만, 마땅히 반기는 이가 없다. 그러던 와중에 이 소장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시신은 도무지 타지 않는다.

이야기의 시작
지금은 ‘승화원’이라 불리는 국립 화장터에 간 적이 있다. 어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찾아갔는데, 현대화된 화장터의 모습에 놀랐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그곳에서 일하는 화장장들의 모습도 마주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이 영화 작업으로 이어졌다.

화두나 질문
이 소장의 중요한 상대 배역인 복례는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떠올리고 기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영화만의 힘 현실에서 미처 꺼내지 못하는 생각과 말을 전할 수 있다는 것.

나의 비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쌍둥이 아빠가 된다.(웃음) 기회가 된다면, 육아를 통해 내가 알지 못하고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삶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감독이란 살아가며 보고 느끼고 겪은 일들을 주관적 형태로 기록하는 사람일 테니 말이다.

신선 SHIN SUN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Nothing Has Happened Yet>

은율은 고향 거제도에 있는 벤치에 앉으면 본인에게 다가올 일을 미리 볼 수 있다. 어느 날 그는 전 애인이 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를 들고 고향으로 향한다. 선배 민정과 그의 연인 지근, 깊은 상처로 남은 사람, 낯선 여행자와 만나며 은율은 자신과 마주한다.

이야기의 시작
은율 역을 맡은 배우 박한빛나라의 고향에서 한 벤치를 봤다. 하성국 배우가 연기한 지근의 대사처럼 “벤치가 왜 여기 있지?”라는 말을 뱉은 뒤 사진을 찍었다. 이 경험에 표지에 벤치가 있는 사뮈엘 베케트의 <첫사랑>을 마주한 일, 로버트 발저의 <산책자>를 읽은 기억이 섞이며 그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기억에 남는 순간
모든 작업을 끝낸 뒤 영화 속 공간을 다시 찾아갔다. 계절도, 날씨도, 풍경도 당시와 달라 그리움이 밀려왔다. 변하지 않은 듯한데, 무언가 분명히 변했다는 느낌. 나 또한 이 영화를 만들며 어딘가 달라진 듯하다. 영화만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다는 게 새삼스럽기도 했다.

화두와 질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나부터 나를 소중히 여긴다면, 나와 관계 맺는 타인에게도 그 영향이 전해질 거라 믿는다. 우리가 타인에게 던지는 대부분의 말과 감정은 사실 본인을 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걱정을 안은 채 어딘가를 걷고 있는 이들에게 이 영화가 함께하길 희망한다.

감독의 일
영화라는 녀석을 원망해본 적이 있다. ‘하필 너를 만나서….’ 하지만 원망은 짧고, 금세 애정을 느낀다. 오래 사랑할 수 있고, 미워도 이해하며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영화이자 영화를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나의 비전
잘 먹고, 잘 자고, 잘 생각하고, 잘 움직이며 내게 주어진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자연적이고 지역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은 소망도 있다. 구상 중인 이야기들이 온전한 형태로 세상에 나오길 바란다.

신동민 SHIN DONG MIN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닌 Not for You>

자살 사별자 자조 모임에서 만난 은우, 승우, 윤영. 가까운 존재를 잃은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은 승우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뿌렸다는 한탄강에 같이 가고, 윤영의 생애 첫 독립에 힘을 보태고 이사를 돕기도 하며 종종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이야기의 시작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과 ‘자살 사별자 자조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모임 기획자들끼리 고인이 계신 곳에 다 같이 가보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게 영화의 시작점이다. 배경은 철원의 한탄강이다. 한탄강에 뿌려달라던 아버지의 유언 때문인지,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그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기억에 남는 순간
자살 사별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만들기로 결심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한탄강에 가보는 것이었다. 그때 마주한 풍경이 마음에 많이 남아 있다. 1월 1일이었고, 그 때문인지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나도 관광객의 시선으로 이곳저곳을 바라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젠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그들과 내 마음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화두와 질문
영화를 찍으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산 자들이 더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 잘 사는 삶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앞으로 어떤 기쁜 일과 어려운 일이 벌어질지도 알 수 없지만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의 일
하고자 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고, 원하는 건 쉽게 이뤄지지 않고, 알 수 없는 것들이 자주 나온다. ‘알 수 없음’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영화를 마무리하고 나면 선명히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해방감도 성취감도 아닌, 몸속의 알맹이 같은 것. 그게 꼭 나인 것만 같다.

영화만의 힘
카메라가 피사체를 찍는 구도에서 나올 수도 있고, 약속된 시간에 극장에 모여 앉은 관객에게서 비롯되기도 한다. 다른 매체에 비해 보이지 않는 힘이 많이 작동한다고 본다. 가끔 그 힘의 흐름에 탑승해보고, 때로는 거슬러본다. 반쯤 올라타 있다 도착할 때쯤 안간힘을 쓰며 제자리로 돌아가려 하기도 한다.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장면이 크게 바뀌는 것 같다. 영화의 소중한 자원이 되어준다.

나의 비전
다치지 않으면서 먹고사는 것. 그게 최고인 듯하다. 해보지 못한 일들을 실컷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귀신을 만나고, 하늘을 날고, 벽을 통과해보고. 죽은 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는데, 아무래도 부질없는 일 같다. 그저 건강하게 나아가며 다양한 도전을 조금씩 하려 한다.

박근영 PARK KUN YOUNG

<극장에 두고 온 것들 Things I Left at the Theater>

강원도의 한 오래된 극장이 철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 영화비평가 도경은 옛 친구의 부고를 뒤늦게 접한다. 비평가로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하던 그는 죽은 친구의 단편영화를 수소문하기 시작하고, 그 작품이 상영됐을 법한 공간을 찾아 나선다.

이야기의 시작
몇 년 전, 잊고 지내던 친구의 부고를 뒤늦게 접해 그를 오랫동안 생각했다. 얼마 후, 철거 과정을 지켜본 원주 아카데미극장이 문을 닫았다. 두 사건이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불현듯 찾아오는 상실 앞에서 무력해질 때,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사라진 것과 사라지지 않는 것을 모아 영화의 형태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기억에 남는 순간
10여 년 전의 영화제 풍경을 구현한 장면이 있다. 수십 명의 동료 영화인과 관객이 동참해 활동 당시의 모습으로 북적이는 극장 로비 풍경을 만들어줬다. 묘하게 벅차올랐고, 모두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결국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 되었다.

화두와 질문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고 없어진다. 가속의 시간 속에서 물리적 공간이 사라질 때, 우리에게 남아 있는 건 무엇일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떻게 남을까?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대화하고 싶다.

영화만의 힘
영화라는 매체, 극장이라는 공간, 관객이 함께 존재할 때 영화의 힘이 생긴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타인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감각. 공감의 감수성은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나의 비전
얼마 전 춘천의 한 공간에서 시민들이 해외 단편영화를 보고 열정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봤다. 매일 밤 누구든지 찾아올 수 있는 동네의 작은 극장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지치지 않고 사랑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조금씩, 하나하나 지어가는 사람이고 싶다.

장우진 JANG WOO JIN

<우주의 흔적 Cosmic Trace>

유튜브 채널의 보조 PD 현지와 무명 배우 지현은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떠안은 채 동거를 이어간다. 현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지현 어머니의 암과 그로 인한 시한부 인생 판정이 이어지자 두 사람은 더욱 막막해진다.

이야기의 시작
영화에 등장하는 두 번의 죽음은 실제로 겪은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다가오는 죽음의 터널을 지나며 아파했고 외로워했다. 그러다 우연히 접한 김상욱 교수님의 말에 감동했다. “우주는 죽음으로 충만하고, 죽음이 우주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다.” 이후 대학원 시절에 본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의 두 시즌을 몰아봤고, 큰 위로를 받아 이 영화를 만들었다. 가장 만들고 싶지 않았던 영화를 가장 즐겁게 만든 것 같다.

화두와 질문
죽음이 우주의 자연스러운 일부임을 느끼고, 우리 삶과 반복되는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기를 소망한다.

감독의 일
직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꿈꿔왔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사실을 축복으로 여긴다. ‘영화 감상이 곧 일이다’라는 핑계로 영화만 볼 때도 많다. 직장인처럼 일찍 일어나서 책상에 앉아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만 지각도 조퇴도 무단결석도 가끔 한다.(웃음)

영화만의 힘
동일한 시공간에서 같은 것을 함께 볼 때, 찰나에 공유되는 공기의 미묘한 변화와 온도가 바뀌었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촉각적 경험. 그게 영화, ‘시네마토그래프’만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참 신기하다.

나의 비전
<우주의 흔적>을 만들면서 ‘코스모스 픽처스’ 라는 제작사를 설립했다. 당분간은 우주적 비전에 천착하려 한다. 또 오랜 기간 눈앞에 뒀던 ‘장르영화’라는 벽을 넘어보고 싶다. 단순한 쾌감이 아닌, 장르의 틀 안에서 가능한 이야기와 주제를 다루는 영화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조기 은퇴 없이 오래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효미 KIM HYO MI

<귀벌레 Earbug>

첫 소설을 쓰려 애쓰는 스물여섯 살 소설가 지망생 정연. 사랑을 잘 모른다는 그의 자책이 ‘절대적이고 진실한 사랑을 찾아 지구에 온 외계인에 관한 이야기’를 써나가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이에 반해 화가인 동창 나정은 순조로이 개인전을 준비해간다.

이야기의 시작
내 예민한 청각,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코>에서 착안해 ‘주인공의 귀가 사라지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층간 소음에 시달리는 경비원, 비밀을 지닌 아버지의 귀, 의문의 여자가 귀를 자르는 사건 등의 설정을 거쳐 청각과민증을 겪는 소설가 지망생의 이야기로 발 전시켰다. 그에겐 스물여섯 무렵의 내 모습도 담겨 있다. 트라우마 속에서 사랑의 의미를 이해해가는 이의 영화다.

화두와 질문
과거의 상처를 반복하면서도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가? 자신의 두려움과 기억을 통해 타인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도와 끝맺음 자체를 회피하고 있진 않은가? 관객이 생각하는 절대적이고 진실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감독의 일
애니메이션에서는 배경과 공간, 소품, 캐릭터, 질감과 색감까지 모든 요소를 직접 설계하고 구현해야 한다. 우연히 만들어지는 게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끊임없이 우연성을 발견하고 담아내고자 한다.

영화만의 힘
완성된 세계에 각자의 생각과 상상이 들어갈 자리를 남겨두는 것. 영화는 관객을 낯선 세계에 몰입시키는 동시에 그 세계를 통해 본인을 돌아보게 한다. 좋은 영화는 상영이 끝난 뒤에도 기억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나의 비전
특정 형식이나 장르에 머무르지 않는 장편 애니메이션을 계속 다양하게 선보이고자 한다. 무엇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함께하는 이들까지 살필 수 있는, 건강하고 명랑한 감독이 되는 게 가장 큰 꿈이다.

정지혜 JEONG JI HYE

<풀문 Full Moon>

중학교 댄스팀에서 센터를 차지하고 싶어 하던 혜미. 정월대보름 축제 날 무대에서 의상 사고를 겪으면서 자신만만하던 그의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친구들과 서먹해지고, 무엇보다 숨기고 싶어 비밀로 간직해온 부모의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날 상황에 놓인다.

이야기의 시작
전작 <정순>을 통해 상처 입고 지친 관객을 많이 만나면서 지금 영화가 건넬 수 있는 건 무엇일지 고민했다. 문득 가깝게 지내는 한 가족이 떠올랐다. 삶의 크고 작은 굴곡을 유쾌함과 활기로 꿋꿋하게 뛰어넘는 사람들. 그 삶의 태도를 영화에 잘 담아낸다면, 관객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화두와 질문
세상이 정해놓은 정상성의 궤도에서 벗어난 이는 결핍된 존재로 인식되곤 한다. 혜미는 남들과 비슷한 궤도에 올라타지 못하고,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 달이 시기와 위치에 따라 이지러져 보일지언정 둥근 모양을 잃지 않듯, 누구나 존재 자체로 이미 온전하다. 관객이 자신의 어둠 너머에 둥글게 자리한 본인의 온전함을 발견할 수 있을지 묻고 싶다.

영화만의 힘
영화의전당을 자주 찾아간다. 대여섯 명이 전부인 상영관도, 꽉 찬 상영관도 전부 소중하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스크린에 빠져드는 광경은 매번 새삼스럽다. 바깥세상과 잠시 단절된 채 영화가 펼쳐내는 세계로 기꺼이 몰입하고자 하는 의지가 곧 영화의 힘 아닐까. 그 귀한 의지에 보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겠다.

나의 비전
얼마 전 석좌교수님이셨던 임권택 감독님을 뵈었다. 두 번째 영화를 완성했다고 말씀드리니 “미쳐야 한다”는 묵직한 말씀을 건네셨다. 그 울림이 꽤 오래갔다. 신인이면서도 타협하고 있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관성을 경계하며,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마음을 쏟고 싶다.

박홍민 PARK HONG MIN

<스페이스 Space>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살가운 연인인 소연과 정호는 아이를 갖자는 정호의 말에 관계의 변화를 맞는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진우는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와 맞서다 집을 나간다. 정호는 어렵게 음식점 운영을 시작하고, 진우는 돈을 얻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댄다.

이야기의 시작
2022년 10월 29일. 버티고개역 인근 작업실에 있다가 사이렌 소리와 고함을 들었다. 바깥을 살피다 이태원 참사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의 어느 날, 매해 10월쯤 장사를 시작하는 약수역 시장 골목의 붕어빵 노점에서 당시 핼러윈 축제에 간 이들을 비난하는 노동자를 마주했다. 감정이 북받쳐 그 사람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상황이 아직 내 안에서 말끔히 정리되지 않았 다. 그 지점에서 <스페이스>가 시작됐다.

기억에 남는 순간
영화는 결혼과 출산을 고민하는 커플, 해체 직전의 노동자 가족, 그들이 서로 얽히는 이야기까지 3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다. 각 에피소드 사이의 과정이 기억에 남는다. 상황의 재현, 시공간을 담는 방식, 내면의 기억과 초현실적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고심했다.

화두와 질문
공간의 불안정이 내면의 불안정으로 이어지는 시대다. 그럼에도 우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감독의 일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자 치유의 시간. 영화를 찍고 싶어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면 내 존재가 선명해지고 세상을 바라볼 용기가 생긴다. 관객과도 교감할 수 있는 이 일이 마치 거대한 창처럼 여겨진다.

영화만의 힘
현실 공간을 목격하고, 누군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사회의 진동을 포착하고, 공감과 연대감을 느끼게 하는 것. 영화는 그 어떤 매체보다 실체에 가까이 다 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송열 PARK SONG YEOL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 Beyond Love’s Horizon>

가게의 폐업으로 막막해하던 태영과 주미 부부에게 새 생명이 찾아온다. 임신, 출산, 양육, 돌봄의 고된 과정을 거치며 이들은 극도의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느낀다. 좌충우돌하는 하루가 거듭되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절대적인 행복이 되어준다.

이야기의 시작
아내인 원향라 배우와 늘 함께 작업했는데, 어느 날 아이가 생겼다. 자녀 탄생 이전의 삶에서 그 이후의 삶을 관측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이에 ‘지평선’이 존재하는 듯했다. 갓 태어난 아이를 처음 안은 순간, 새 생명의 신비에 큰 충격을 받았다.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먹고사는 것’ 너머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육아의 체력전, 경제적 쪼들림, 부부 사이의 균열 같은 삶의 틈새를 따라갔다.

기억에 남는 순간
육아를 병행해 체력 소모가 전작보다 컸고 과정도 더뎠다. 아기가 잘 때 촬영해야 하니 주어진 시간이 적었다.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데, 영화 속 장면들의 연결을 위해 속도를 내야 할 때면 지치기도 했다. 그 긴 작업의 마침표를 찍은 순간 아주 홀가분했다.

화두와 질문
생존과 관련한 문제들은 늘 우리를 따라다 녔고, 우리의 손으로 점점 나아졌다. 흐트러진 것들을 조금씩 바로잡으며 나아가는 게 삶이 아닐까. ‘살아 있다는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건네고자 한다.

감독의 일
살아가기 위한 도구.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을 때 쓸쓸하지 않도록 영화를 ‘남겨두고’ 있기도 하다. 회자되고 기억되는 작품을 남길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영화만의 힘
문법, 장르, 연기, 주제, 소재 등 영화를 이루는 대부분의 요소가 이제는 견고한 체계로 확립되었지만, 반복과 순환을 통해 미세한 차이를 낳고 있다. 새로운 언어를 계속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영화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