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를 겪어내면서 저를 한 번 비워내고, 다 털어내며 느껴지는 자유로움이 있었고, 그로부터 어떤 힘을 얻었어요. <도라>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기점이에요.”
김도연 배우가 비로소 ‘도라’가 된 날, 그날의 고통과 환희에 대해.

누군가는 우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저로서는 운명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어요.
정확한 형태나 방향은 모르지만, 어떤 지향을 향해 작은 선택들을 해나갔고, 그 선택들이 모여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싶거든요. 그래서 제가 <도라>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다가가는 과정에서 연결을 느낀 것 같아요.


영화 <도라>는 칸영화제에서 처음 본 거죠?(영화 <도라>는 지난 5월, 제79회 칸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되었다.)
맞아요, 그날 딱 한 번. 그래서 지금은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 있어요.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그날 보면서 느낀 감정이나 에너지가 생각나요. 촬영할 때 되게 인상 깊은 순간들이 많았거든요. 한 번은 감독님이 너무 좋다며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는데, 그 장면이 나올 때 ‘감독님이 이래서 눈물을 흘리셨던 걸까’ 싶더라고요. 영화가 지닌 에너지가 무척 크잖아요. 영화관에서 모두가 같
은 에너지로, 같은 온도로 보고 있는 게 느껴져서 행복하기도 했어요. 그날 되게 많은 생각과 감정이 들었던 것 같아요.
영화 끝나고 보니, 코와 눈이 벌게지도록 오열했던데요.
상영하는 동안에는 영화 자체에서 느낀 감동으로 울고,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땐 곁에 있는 <도라> 팀과 눈을 맞추면서 또 울고.(웃음) 모든 영화가 그렇지만, 진짜 고생하면서 만들었거든요. 특히 <도라>는 아주 어렵고 긴 시간을 버텨온 작품이에요. 감독님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이야기이고, 완성하기까지도 무척 지난하고 어려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이를 영화로 만들고자 노력한 마음들이 더 귀하게 느껴져서 그렇게 눈물을 흘렸던 것 같아요. 모두의 마음이 모여서 이토록 아름다운 영화가 나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실은 저도 꽤 울었습니다.(웃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에도 도라의 눈이 떠올라 울컥하더라고요.
감독님께서 이런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어요. 배우가 완전히 도라가 되는 게 아니라, 둘이 어딘가에서 만나는 거라고요. 그래서 그 눈에는 저도 있고, 도라도 있고, 우리 둘 사이 어딘가의 지점도 담겨 있을 거예요. 영화에서 도라의 눈이 보였다는 말은 한동안 도라에게 닿기 위해 애썼던, 그에게 완전히 몰입해 있던 저의 눈을 발견해주었다는 말로도 들려 기쁘네요.(웃음)

얼마간 도라로 지낸 건가요?
실제 촬영 기간은 두 달이었지만, 시나리오로 도라와 처음 만나고 가까워졌다 떠나보내기까지, 촬영 마치고 저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거든요. 거의 반년은 도라와 함께, 혹은 도라로 지냈어요.
그때 어떤 생각을 많이 했어요?
특별한 생각은 안 했어요. 캐릭터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나 계산도 없었고요. 좀 전에 도라로 지냈다고 했지만, 사실 촬영하지 않을 때는 저로 살았거든요. 실은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시기에 만났던 분에게서, 이전과 눈이 완전히 바뀌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저는 엄청 밝게 웃으면서 장난치고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의 시선에서는 그게 아니었던 거죠. 그러니까 현장에서 집중하고 촬영이 끝나면 다시 나로 돌아온다고 생각했는데, 그 경계가 희미하고 어느 순간에는 사라졌던 거죠.
자연스럽게 도라에게 스며들었던 것 같네요.
맞아요. 저도 모르게 조금씩.
그러다 온전히 도라가 되었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겠죠?
후반부 무렵이었어요. 개봉 전이라 아직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특히 힘들었던 장면이 있어요. 그때 머릿속으로는 감정이 지나치게 과잉되는 걸 원하지 않았거든요. 감독님께 “저는 너무 울고 싶진 않아요”라고 했고, 감독님께서도 그렇게 해도 된다, 그냥 나오는 대로 해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호흡이 잘 안 될 정도로 눈물이 계속 나는 거예요. ‘나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요. 우리 영화의 촬영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분들이 프랑스 사람이라서 현장에 통역사님이 항상 계셨는데, 그날 통역사님이 도라 그 자체로 보여서 안쓰럽다며 제 손을 꼭 잡아주셨어요. 돌이켜보면 그날이 도라와 일체가 된 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한 인터뷰에서 정주리 감독님이 도라를 맡을 배우를 찾는 데만 반년이 넘게 걸렸다고 하셨어요. 감독님께 물어본 적이 있나요? 도라가 된 이유에 대해서요.
그 인터뷰에서 “김도연 배우가 긴 오디션 과정을 묵묵히 치러내는 모습에서 우직함을 봤다”라고 하셨는데요. 그러지 않아도 며칠 전에 감독님을 만나서 여쭤봤어요. “취약함을 보고 뽑으신 거 아니었나요?”라면서요.(웃음) 오디션 볼 때 그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거든요. 당시 저는 스스로 강인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제게서 취약함이 드러난다는 거예요. “제가요?” 답하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의 저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몰두해 있었는데 감독님은 그 틈에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취약함을 발견하신 거죠. 그래서 그 때문에 도라가 된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여쭤보니 감독님께서는 취약하면서도 동시에 우직함을 가지고 있어서라고 하시더라고요.
한편 함께 호흡을 맞춘 안도 사쿠라 배우는 “만약 영화에서 맑고 푸른 생명력을 느꼈다면 그건 김도연이 빚어낸 거다”라며 찬사를 보냈죠. 도라의 푸르른 생명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심한 부분이 있다면요?
너무나 감사한, 영광스러운 말이네요. 그렇지만 그건 온전히 제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 생각해요. 감독님이 창조한 이야기 속에서 이미 도라는 맑고 푸른 생명력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고, 단지 저의 노력이라면 그에게 최대한 가까이 가려고 한 것일 거예요. 사실 처음에는 너무 막막하고 이해가 안 됐어요. 누구나 살아온 경험 안에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치관이 있잖아요. 그런데 <도라> 속 인물들은 모두 그 밖에 있었고, 그만큼 멀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대본을 수없이 읽었고, 감독님과 아주 많은 대화를 했어요. 그렇게 저를 둘러싼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된 거죠.
이해되지 않고, 그래서 멀게 느껴지는데도 그 이야기에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이해가 안 되는 상태에서도 간절히 하고 싶다고 느낀 이유는… 정확히 무엇이라 정의 내리지 못하는 어떤 자유로움을 느꼈어요. 되게 신기하다고 느낀 저만의 경험이 있는데요. 데뷔 초에 어떤 작품의 오디션 과정에서 감독님과 대화를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적이 있어요. 뭔가 특별한 말을 해주신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리고 정주리 감독님을 만났을 때도 계속 울었어요. 제 마음을 울리는 공감의 말을 주고받은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대화를 했을 뿐인데도요. 친한 언니랑 그 경험에 대해 얘기하다가,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만나서 그런 것 같다고 했는데, 그게 곧 <도라>를 하게 된 이유인 것 같아요.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감각적으로 주파수가 맞는 작품을 만난 게 아닌가 생각해요.


작년 여름, 마리끌레르와 ‘자유’를 주제로 함께 화보를 만들어낸 적이 있잖아요. 당시 자유에 대해 골몰하고 갈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연극 작품을 만나게 되고, 자유를 주제로 화보를 찍게 된 것 같다는 말을 했어요. 결국 만나야 하는 건 다 만나진다면서요. <도라>도 어떤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나진 작품이 아닌가 싶네요.
누군가는 우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저로서는 운명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어요. 정확한 형태나 방향은 모르지만, 어떤 지향을 향해 작은 선택들을 해나갔고, 그 선택들이 모여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싶거든요. 그래서 제가 <도라>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다가가는 과정에서 연결을 느낀 것 같고요.
김도연 배우에게 <도라>는 단순히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주고받은 작품인 것 같네요. <도라>를 만남으로써 얻은 것 혹은 떠나보내거나 비워낸 것이 있다면요?
아주 많은 것을 배우고 얻은 작품이라고만 여겼는데, 질문을 듣고 나니 어쩌면 비워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도라를 겪어내면서 저를 한 번 비워내고, 다 털어내며 느껴지는 자유로움이 있었고, 그로부터 어떤 힘을 얻었어요. <도라>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기점이에요.
영화는 칸영화제에 이어 오는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과 만날 예정입니다. 그곳에서 어떤 장면과 마주하길 기대하나요?
기대도 되고 두려움도 있어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 영화가 상당히 다르게 보일 것 같거든요. 앞서 두렵다고 말했지만, 좋은 이야기도 비판의 말도 엄청 흥미롭게 느껴질 것 같아요. 이 이야기의 리액션을 보면서,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지점을 많이 만나고 싶어요. 어떤 반응이든 그저 모두 잘 들어보고 싶어요.
우직해졌네요.(웃음)
으음… 그럴 수도요?(웃음)
이야기를 마무리해볼게요. 작년 청룡영화상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며 “앞으로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면서도 주저하지 않는 배우가 되겠다”는 말을 했죠. 그 말을 듣고 사실 배우의 가장 큰 미션은 어쩌면 ‘주저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그때의 다짐을 잘 지켜가는 중인가요?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때는 조금 닫혀 있던 부분이 지금은 열린 것도 있고, 점점 유연해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를 확장하는 데 주저하거나 겁내지 않는 것, 늘 그게 답인 것 같더라고요. 원체 생각도 걱정도 많다 보니, 걱정에 잠식될 때마다 저를 편안하게 해주는 건 외려 그냥 하는 것이었어요. “그냥 해.” 이 말이 지금의 제게는 가장 명확한 답인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