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nnies welcome

망사 탓에 사망할 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에게 깜짝 이벤트를 해주고 싶었다. 인터넷을 뒤졌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역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여성 동지들이 커뮤니티에서 아이디어의 부재를 호소하고 있었다. 때마침 한 남성 회원이 댓글을 올렸다. ‘여러분, 망사를 믿으십시오. 망사 앞에 고자 없습니다’. 마치 메시아를 만난 길 잃은 양처럼 나의 눈이 번쩍 뜨였고, 바로 폭풍 검색에 돌입했다. 마침 고급스러운 패션 용어로 ‘피시넷 스타킹’이라 하는 망사 스타킹이 트렌드로 떠오르기 시작한 터라 여러 쇼핑몰에서 팔고 있었으니 나에겐 호재였다. 하지만 나는 화끈한 여자다. 한번 할 때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결국 해외 성인 사이트까지 기웃거린 끝에 직구로 전신 망사 올인원을 주문하 고야 말았다. 편의를 위해 중요 부위는 둥글게 뚫려 있는 기능성(!) 아이템이었다. 집에서 신어보니 그럴듯했다.

호기롭게 외투 속에 문제의 올인원을 빼입고 이브 날 그를 만났다. 레스토랑까지 함께 걸었다. 조금씩 망사가 죄어들며 가랑이 주변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허리가 짧은 서양인 체형에 맞게 제작된 때문인 것 같다. 직구의 폐해다. 결국 데이트 내내 불편함을 참다가 모텔에 가자마자 얼른 코트와 원피스를 벗어 젖혔다. 짠. 남자친구는 불의의 일격을 받은 사람처럼 숨을 헉 들이마셨다. 그러더니 양파 망 같다고 했다. 섹시 한 양파 망. 나쁜 놈이었다(물론 크리스마스라고 굳이 빨간색을 고른 내 판단 착오도 있다). 못내 속상했지만 가랑이에 선명 한 망사 자국을 부여잡고 나는 나 자신을 다독였다. 사람 나고 망사 났지, 망사 나고 사람 난 게 아니라고 말이다. K, 디자이너, 28세

 

뜻밖의 자아 성찰

실크 스타킹에 가터벨트를 하고 남자의 시선을 강탈하는 요염한 내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다. 그래서 남자친구와 사귄 지 어느 정도 지났을 때 큰맘 먹고 란제리 숍을 찾아갔다. 얇은 블랙 스타킹을 사고 가터벨트는 고민 끝에 허리 밴드 부분에 기다란 프린지가 장식된 과감한 디자인을 골랐다. 골반을 살짝 움직일 때마다 술 장식이 찰랑이는 게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 속 무희가 된 기분이었다. 남자친구를 위하는 맘보다 오히려 내가 그 속옷을 입어볼 생각에 더 신이 났던 것 같다. 다행히 그는 열렬히 반응했다. 우리의 섹스 라이프에 새 장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남자친구의 정리벽이었다. 본격 피스톤 운동에 돌입했는데 그놈의 프린지가 사정없이 널을 뛰며 뒤집어지고 서로 꼬이는 것이 그 바쁜 와중에도 어지간히 눈에 밟혔나 보다. 정신이 산란하다는 그를 위해 가터벨트를 빼고 다시 분위기를 잡았다. 내 다리를 잡아챈 그가 실크 스타킹의 매끈한 감촉을 느끼면서 다시 한번 흥분이 고조된 순간, 그의 손이 스타킹 끝부분이 이르러 잠시 멈칫했다. 가터벨트 집게에서 해방된 스타킹이 내 허벅지 둘레를 못 이기고 무릎께까지 돌돌 말려 내려간 것이었다. 남자친구는 이번에는 그것에 마음이 쓰여 삽입을 하다 말고 자꾸 말린 스타킹을 도로 추어올렸다. 나는 결국 나는 웃음이 터졌고, 남자친구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보니 그는 이전에도 한창 섹스 도중에 내 엉킨 머리카락을 푸느라 손가락을 꼬물거린 전적이 있었다. 남자친구는 자기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고 분위기를 망친 걸 미안해했지만 나로선 그런 모습도 귀여웠다. 그를 위해 다음에는 장식 없는 가터벨트에 흘러내리는 걸 방지하는 실리콘이 붙은 밴드 스타킹을 준비해야겠다. J, 26세, 학생

 

섹스 라이프에 가성비란 없다

내 생일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남자친구가 짓궂은 표정으로 잠자리에서 특별히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말했다. 색다른 걸 해보고 싶었던 나는 남자용 코스튬이 떠올랐고, 내가 직접 고르고 주문하는 대신 남자친구는 군말 없이 주는 대로 입기로 약속했다. 역시 여자들의 로망인 제복이 좋을까? 아니면 히어로 영화 주인공의 쫄쫄이 스판덱스? 그런데 성인용품 사이트를 돌다 보니 가격이 은근히 만만찮다. 사실 한 번 입고 말 것이 분명한 의상인데 아까운 생각도 들고, 이미 한도에 다다른 그달 카드비도 신경 쓰여서 망설이던 차에 한 웹사이트에서 이거다 싶은 물건을 발견했다. 나비넥타이가 붙은 셔츠 칼라, 앞이 뚫리고 꽁지에 하얀 털 장식이 달린 삼각팬티, 그리고 젖꼭지 부분에 붙일 수 있는 술 장식까지, 이름하여 ‘바니보이’ 3종 세트였다. 결정적으로 가격이 아주 착했다. 기념일 당일, 남자친구를 만나 호텔에 들어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함께 상자를 개봉했다.

나는 그날 큰 교훈을 얻었다. 적어도 섹스에 있어 가성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텔 방에 비치된 무료 콘돔과 편의점에서 제값 주고 산 1만2천원짜리 초박형 콘돔이 주는 만족감의 차이를 나는 왜 간과했던가. 상자 속 바니보이 의상은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사진에서는 반질거리는 새틴 소재로 보이던 삼각팬티는 혹시 코팅한 부직포가 아닐까 싶은 까칠한 화학섬유로 만들어졌고, 탈모가 제대로 온 듯한 빈약한 토끼 꽁지를 보니 골룸 머리털도 그보다는 숱이 많지 싶었다. 내 얼굴에 서린 충격과 공포를 감지한 남자친구는 그래도 이왕 산 것이니 살려보겠노라 코스튬을 입었다. 그의 넓은 마음과 능청스러운 연기력 그리고 탄탄한 엉덩이에 힘입어 분위기는 풀어졌고 덕분에 남은 밤은 뜨겁고 행복했다. 여기까지였다면 해피 엔딩이었을 텐데, 다음 날 그는 코스튬을 걸쳤던 목과 사타구니에 생긴 발진 때문에 피부과에 가야 했다. 이 기회를 빌려 진심으로 남자친구에게 사죄한다. P, 32세,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