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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el

‘샤넬 공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번엔 그랑 팔레가 근사한 공항 터미널로 변신했다. ‘샤넬 에어라인’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보딩 카운터엔 남녀 승무원이 꽤 리얼하게 서 있었고, 도착지를 명시한 보드에는 서울을 비롯해 그간 샤넬이 로컬 쇼를 개최한 도시들이 죽 나열돼 있었다. 그렇다면 칼 라거펠트가 변주한 ‘공항 패션’은 어떨까? 파스텔 톤을 주조로 구성한 멀티컬러 트위드 점프수트를 입은 에디 캠벨이 쇼의 시작을 알린 후 비행기를 지오메트릭 패턴으로 그려낸 니트, 클래식한 트위드 스커트 수트, 고운 플로럴 프린트 프릴로 라이닝한 화이트 룩을 거쳐 메탈 디테일과 거친 가죽의 세련된 믹스 매치까지 쇼는 여느 때보다 다채로운 소재와 스타일로 풍성하게 채워졌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포인트는 보는 즐거움을 더할 액세서리들. LED 라이트를 반짝이는 하이테크 무드의 벨크로 테이프 샌들, 샤넬의 2.55 백을 고급스럽게 변주한 수트케이스, 미러 렌즈 선글라스는 물론 샤넬 로고로 장식한 비행기 모양 배지까지 포인트가 된 액세서리에는 칼의 위트 넘치는 심미안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피날레에 함께 선 카라 델레바인뿐만 아니라 프런트로에 앉은 릴리 로즈 뎁의 취향까지 제대로 저격했을 쇼, 쇼, 쇼!

CéLINE

시종일관 피비 필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했다. 여인의 관능미를 매혹적으로 드러내는 슬립 드레스. 디자이너의 의도는 한 치의 오차 없이 관객에게 닿았고 그녀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우선 덴마크 아티스트 FOS가 선사한 오렌지, 옐로, 블루 컬러 블록 텐트부터 푸른 하늘과 따스한 햇빛, 고즈넉한 석양이 연상될 만큼 예뻤다. 대부분의 룩에 매치된 V자형 레이스 슬립 톱과 슬립 드레스는 실크와 니트, 가죽을 한데 조합해 한결 더 특별해 보였고, 피비 필로 특유의 로맨틱한 여성성을 고스란히 대변한 아워글라스 실루엣의 코트 역시 좋았다. 풍선처럼 봉긋하게 솟은 퍼프소매 블라우스나 몸을 타이트하게 감싸는 발레리나 니트 드레스(등을 따라 끈을 길게 늘어뜨려 뒷모습까지 신경 쓴 세심함을 보라!)는 또 어떤가. 곳곳에 배치된 가죽 에이프런 튜닉이나 잘생긴 와이드 팬츠에서도 컬렉션 전체의 균형을 맞추려는 피비 필로의 영민함을 엿볼 수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여심을 올랑거리게 만든 세린느는 역시(!) 세린느였다.

Dior

청보랏빛 델피늄으로 뒤덮인 산기슭을 루브르 박물관 중앙 정원에 옮겨놓은 디올. 마치 꽃의 동굴에 들어온 듯한 쇼장은 새로운 컬렉션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때만 해도 라프 시몬스가 이렇게 갑자기 디올에 이별을 고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터. 어찌 됐건 그가 디올에서 마지막으로 선보인 옷들은 기이하게도 미래적이면서 로맨틱한 기운이 느껴졌다. 빅토리안 스타일의 언더웨어를 받쳐 입은 투명한 바이어스 컷 드레스는 오버사이즈로 재해석된 바 재킷, 새틴 소재의 가녀린 슬립 드레스, 코튼 슈미즈와 어우러진 러프한 니트, 플리팅 기법을 가미한 테일러드 재킷 등의 룩으로 이어졌다. 관능과 절제, 여성성과 남성성, 클래식과 컨템퍼러리가 한데 어우러진 새롭고 부드러운 퓨처리즘이 탄생한 것. 이토록 아름답고 현대적인 디올 레이디를 탄생시킨 채 홀연히 디올을 떠나는 그에게 아쉬움을 담아 박수를 보낸다.

Stella McCartney

평소 스텔라 매카트니를 좋아하는 에디터에게 또 한 가지 위시 아이템이 생겼다. 그 주인공은 쇼의 오프닝을 장식한 플래드 체크 폴로 셔츠 드레스. 보디라인을 따라 길고 가늘게 흐르는 실루엣이며 단추를 사선으로 단 센스까지 그야말로 완벽했다. “단지 여성을 위한 컬렉션을 구성하고 싶었어요.” 한 인터뷰에서 디자이너가 한 말마따나 쇼에 등장한 옷들은 전부 여인의 환상을 실용적으로 변주한 모습이었다. 정적인 뉴트럴 컬러가 파리 런웨이를 지배한 가운데 톡톡 튀는 원색의 조합으로 스포티한 분위기를 풍긴 스텔라 매카트니 표 페미닌 룩이 유독 돋보인 것도 한몫 단단히 했다. 게다가 형광빛이 감도는 그린과 오렌지, 핫핑크, 레드, 옐로의 섹시한 컬러 매치와 비대칭 컷 플리츠 톱, 롱스커트의 감각적인 레이어드까지 더해졌으니! 프런트로에 앉은 수키 워터하우스의 눈이 반짝거린 건 물론이다.

Louis Vuitton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구현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그의 고민을 반영하듯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루이 비통 재단 건물 안 블랙박스에 난해한 디지털 비디오 영상이 어지럽게 돌아갔다. “사이버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가 여행하는 디지털 세계를 그렸어요.”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로봇과 전투 병기를 조종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을 떠올리게 하는 모델 페르난다 리가 핑크색 모터사이클 재킷과 가죽 랩스커트를 입고 쇼의 포문을 열었다. 니콜라는 퓨처리즘에 어두운 로큰롤 무드를 반영한 분위기를 곳곳에 투영했는데 이는 빈티지 워싱 혹은 우주선 일러스트를 프린트한 점프수트, 가죽을 불규칙적으로 커팅해 관능미를 더한 톱, 헤비메탈 슬립 드레스 등 다채롭게 표현됐다. 루이 비통의 클래식한 모노그램 모티프를 가죽 코트나 바이커 재킷에 프린트한 것 역시 감각적이었다. 여기에 얼기설기 얽힌 체인을 프린트한 알마 백까지 더해졌으니! 루이 비통이 그리는 미래의 여인은 이토록 강렬했다.

Saint Laurent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생 로랑의 여인들에게선 시종일관 퇴폐적인 관능미가 느껴졌다. “록스타 코트니 러브를 오마주했어요. 그녀의 흥미롭다 못해 드라마틱한 인생을 담았죠.” 에디 슬리먼의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창백하다 못해 파리한 피부에 깡마른 몸을 지닌 여인들은 라인스톤 티아라를 쓴 채 속옷이 보일 정도로 짧은 슬립 드레스를 입고 서서히 등장했다. ‘생 로랑 스킨(Saint Laurent Skin)’을 쇼의 타이틀로 명명한 에디 슬리먼이 올가을 제안하는 스타일링법은? 간단하다. 오버사이즈 바이커 재킷 혹은 워싱 데님 재킷에 여릿한 스파게티 스트랩 슬립 드레스를 입어보길. (단, 가슴이 적나라하게 보일 만큼 높은 노출 수위를 감안해야겠지만!) 레인 부츠는 반전의 아이템이다. 에디 슬리먼 특유의 쿨한 르 스모킹 수트나 클래식한 트렌치코트, 탱크톱, 데님 팬츠를 한데 조합하는 등 곳곳에 실용적인 룩도 있으니 눈여겨봐도 좋겠다.

Balenciaga

알렉산더 왕이 발렌시아가에서 선사하는 마지막 축제가 그 화려한 막을 열었다. 핵심은 명확했다. 소소한 디테일과 커팅을 제외하면 비슷해 보이는 란제리와 슬립 드레스의 향연이 펼쳐진 것. 프랑스어로 여인의 침실을 뜻하는 ‘부두아르(boudoir)’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이너는 컨셉트에 충실해 모델들에게 안방에서 신을 법한 레이스 슬리퍼를 신겼고 로브 코트, 브라톱을 로맨틱하게 변주한 실크 톱을 비롯해 갖가지 슬립 드레스를 선보였다. 여기에 아노락 점퍼, 카고 팬츠, 레이서 백 톱, 크로스로 멘 백 등 알렉산더 왕 특유의 스포티 DNA를 드러낼 아이템 역시 깨알같이 챙겼으니 참으로 영민하지 않은가. 오프화이트 컬러로 룩의 색조를 통일한 점도 좋았다. 한 인터뷰에서 학교를 졸업한 듯 속이 후련하다고 말한 그는 유쾌하게 피날레 무대를 뛰어다니며 열심히 셀피를 찍었고 관객의 모습을 인증샷으로 남겼다. 그리고 얼마 후 베트멍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즈바살리아가 발렌시아가의 수장이 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대중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뭐 어떤가! 알렉산더 못지않게 확고한 색을 지닌 뎀나가 하우스의 헤리티지를 어떻게 변주할지 기대된다.

Loewe

조나단 앤더슨은 마치 물 만난 고기 같았다. 유서 깊은 스페인 가죽 명가를 젊고 핫한 레이블 반열에 올리는 데 성공한 그는, 이번 시즌 컬렉션으로 로에베의 빛나는 미래를 보여줬다. 투명한 PVC와 섬세한 오간자, 부드러운 니트와 날카롭게 깨진 유리 조각, 내추럴한 리넨과 매끄러운 새틴 등 상반된 소재를 조합함으로써 퓨처리즘의 코드를 동시대적이고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그뿐인가. 그는 하우스의 자랑이자 아이덴티티인 ‘가죽’ 소재도 자유롭게 요리했다. 부드럽게 무두질한 스웨이드 소재의 트렌치코트와 재킷, 럭셔리한 악어가죽 팬츠는 그의 팬은 물론 기존 로에베 고객까지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고급스럽고 우아했다. 투명한 퍼즐 백, 반복적인 로고 프린트와 새 모티프, 물고기 모양 네크리스 등은 보는 재미를 더했다.

HERMèS

12월 17일 서울에서 에르메스의 2016 S/S 시즌 컬렉션 무대가 펼쳐진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메종 마르지엘라, 더로우, 세린느에서 일한 경험을 집약해 나데주 바니 시불스키만의 방식으로 구현했다는 이번 룩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재단과 고급 소재에 지오메트릭 컬러 블록, 플래드 체크 패턴, 길고 가는 실루엣에 가녀린 여성미까지 더했다. 특히 극도로 럭셔리한 송아지 가죽 원피스며 청색 라이닝과 슬릿으로 경쾌한 리듬감을 더한 플리츠스커트가 어찌나 탐나던지. 더불어 스니커즈까지 빠짐없이 에디터의 취향을 저격했다. 나데주 바니 시불스키가 선사한 두 번째 에르메스 컬렉션은 이견 없이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에르메스 아카이브에 좀 더 과감하게 그녀의 취향을 조합한, 신선한 룩을 기대하는 건 나만이 아닐 듯하다.

Valentino

“저는 여성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요. 그들 모두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죠. 단순해요.”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남긴 유명한 말처럼 발렌티노가 창조해내는 로맨티시즘은 언제나 여인의 로망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이번 시즌도 예외는 아니었다. 디자이너들은 최근 여행을 하며 다양한 문화에 눈길을 돌렸고, 결국 아프리카의 이국적인 분위기에 발렌티노 고유의 미학을 버무려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결과는? 일각에서 ‘블록버스터급’으로 매혹적인 컬렉션이라고 찬사를 바칠 만큼 각각의 룩이 쿠튀르 쇼를 방불케 할 만큼 정교한 디테일로 무장했다. 깃털, 가죽, 레이스, 스터드, 스웨이드 등 완전히 느낌이 다른 소재를 커팅하고 덧붙여 생명력을 불어넣은 디자이너 듀오의 솜씨는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여기에 타코타로 만든 볼드한 주얼리로 트라이벌 무드를 영민하게 표현했으니! 발렌티노의 여전사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Lemaire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기보다 깨끗하고 차분한 자신만의 미학을 더욱 올곧게 밀어붙인 르메르. 크리스토프 르메르와 사라 린 트란은 정교함에 대한 끊임없는 그들의 갈망과 실용성이라는 욕망의 합일점을 찾아낸 듯 보였다. 쇼 전반에 걸쳐 강조된 구조적인 실루엣 역시 그들이 추구하는 바와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다. 뉴트럴 컬러와 가벼운 소재에 집중한 A라인 셔츠 드레스와 허리선을 잘록하게 강조한 프린세스 라인의 코트, 판초 스타일의 톱과 와이드 팬츠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는데, 자칫 지루할 수 있었던 분위기는 적당한 타이밍에 끼어든 데님 팬츠와 수트의 무게감 덕에 균형을 찾았다. 무심하게 두른 머플러, 후반부에 등장한 마블 프린트 룩과 비비드한 컬러의 피스들은 쇼에 율동감을 더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Miu Miu

현재 패션계를 지배하는 이는 미니멀리스트라는 말이 여느 때보다 실감난 이번 시즌, 파리 패션위크의 마지막 날 미우미우 쇼를 보며 영민한 맥시멀리스트 미우치아 프라다의 힘이 더 묵직하게 와 닿았다. 그녀가 선물한, 다채로운 아이템을 레이어드하는 방법은 신선했고, 톡톡 튀는 색과 현란한 패턴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어우러지는 것 또한 신기했으니까. 다이아몬드 패턴으로 장식한 컬러 가죽 재킷과 테일러드 코트, 펜슬 스커트, 러플 오간자 드레스 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믹스 매치됐고 원색으로 염색한 너구리 꼬리 퍼 스톨을 비롯해 글램 록 풍의 레이스업 플랫폼 부츠, 발레리나 플랫 슈즈, 티아라를 꼭 닮은 헤어밴드 등 위트 넘치는 액세서리 역시 한몫 단단히 했다. 미우치아 프라다가 창조한 또 하나의 판타지라니, 참 재미있지 않은가!

Haider Ackermann

올해 서울에 단독 매장이 생길 만큼 국내에도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한 하이더 아크만. 그의 저력은 특유의 펑크 무드를 관능적으로 변주하는 데서 더욱 빛을 발했다. 디스코 클럽을 연상시키는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가죽 베스트에 헐렁한 새틴 로슬렁 팬츠(허리선을 낮춘)를 입고 시스루 타이츠를 브리프인 양 살짝 노출한 모델이 나타났다. “개성 넘치는 여자 갱스터를 떠올렸어요.” 디자이너의 말처럼 하이더 아크만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강렬했으며 섹시했다. 크롭트 바이커 재킷, 시폰 블라우스, 실크 슬립 드레스 등 자극적인 아이템의 조합이 이토록 쿨할 줄이야! 러플 장식 자보(jabot, 가슴에 다는 주름 장식 레이스 액세서리), 뾰족한 앞코를 애니멀 프린트로 장식한 부츠 등 액세서리 역시 감각적이었다. 살짝 아쉬운 점이 있다면, 틸다 스윈턴처럼 키 크고 마른 체형이 아니라면 소화하기 힘들다는 것. 그러나 하이더 아크만의 팬이라면 두 팔 들고 환영할 게 분명하다.

Balmain

H&M과 공동 기획한 콜라보레이션 라인 론칭으로 한동안 타임라인을 떠들썩하게 했던 주인공, 발맹. 명실상부한 패션계의 슈퍼스타임을 증명하듯, 쇼가 열린 호텔 앞은 올리비에와 그의 친구들을 보기 위해 몰려든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번 컬렉션에서 이전 작업의 과정을 응용함과 동시에, 발맹의 새로운 가능성을 다시금 선보이고자 노력했어요.” 그의 말처럼 발맹 우먼들은 이번 시즌에도 여전히 파워풀하고 섹시했다. 지난 시즌 선보인 강렬한 컬러 대신 브라운, 베이지, 블랙, 그린, 탄제린 등의 어스 컬러가 주를 이루었는데, 트라이벌 패턴의 니트 드레스, 목 전체를 감싼 볼드한 메탈 네크리스와 어우러져 이국적인 무드를 완성했다. 그뿐인가. 보디라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보디 콘셔스 점프수트,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보다 두 배는 섹시한 피시넷 소재, 볼드한 주얼 장식과 풍성한 러플 디테일을 버무려 1980년대 후반의 화려함과 1990년대 초반의 미니멀함이 공존하는 새로운 글램 룩을 탄생시켰다.

Dries Van Noten

‘입고 싶은 옷을 입을 용기가 있는 화려한 여자’. 드리스 반 노튼이 이번 컬렉션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 여성상이다. 이 여인들은 어둑어둑한 분위기의 커다란 창고가 현악사중주의 라이브 음악으로 가득 찰 무렵 런웨이로 걸어 들어왔다. 컬러와 패턴 활용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드리스 반 노튼은 이번 시즌, ‘현란한 프린트와 화려한 색상의 콤비네이션을 즐기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예를 들자면 핫핑크 브라톱과 네이비 스커트를 매치하는가 하면, 퍼플 코트 안에 옐로 셔츠를 받쳐 입는 식. 여기에 두 가지 이상의 패턴이 사용됐음은 물론이고 타투를 연상시키는 타이트한 보디수트, 불꽃이 일렁이는 듯한 시퀸 자수가 더해져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됐다. 무대로 관객들을 불러 올려 포토 타임을 가진 피날레 무대도 인상적이었다.

ALEXANDER McQUEEN

사라 버튼이 애정을 기울이는 빅토리안 무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더한 채 그 모습을 드러냈다. “17세기 위그노 교회가 프랑스인의 종교 탄압을 피해 영국 스피털필드(Spitalfield)로 이주했죠. 타지에서 실크 직조 산업을 성행시킨 그들의 이야기가 참 흥미롭더군요.” 영국의 순수하고 아리따운 컨트리 걸은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에 창백한 피부를 지녔고 실크, 태피터, 파유, 자카드, 코튼, 레이스 등 여릿여릿한 소재의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훌륭한 정원사이기도 했다는 위그노인들을 오마주하기 위해 프랑스산 실크에 꽃을 프린트하거나 쿠튀르 쇼를 방불케 할 만큼 정교한 엠브로이더리 장식을 더하는 등 디테일에 유독 신경 쓴 점 역시 눈에 띄었다. 그녀가 인터뷰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여성성(femininity)’이 제대로 반영된 이 쇼엔 거창한 수식어보다 그저 ‘아름답다’는 감탄사 하나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Acne Studios

“패션의 중심부에서 살짝 비켜나 창의적인 관점에서 컬렉션을 구상하는 것이 성장의 비법이에요.” 지난 9월, 서울 청담동에 대규모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을 기념한 인터뷰에서 아크네 스튜디오의 체어맨 마이클 쉘러가 한 말이다. 그래서일까? 아크네 스튜디오가 선사하는 룩은 매번 예상 밖의 비범함과 쿨함이 관객을 흥분시킨다. 이번엔 조니 요한슨이 뮤지션에 꽂혔다! 픽시글라스와 크롬으로 제작한 기타를 프린트한 블레이저와 한쪽 소매를 비대칭으로 커팅한 보디수트는 신선했으며 재킷의 포켓과 칼럼 드레스를 ‘크러시드 벨벳(Crushed Velvet)’으로 제작한 의외성까지 전부 좋았다. 여기에 지그재그 패턴과 동그라미로 음파를 표현하는 센스까지 잊지 않았으니! 특히 사이하이 스니커즈 부츠와 공상 과학 만화에 등장할 법한 뉴웨이브 선글라스는 프런트로에 앉아 있던 M.I.A.를 비롯한 힙스터들에게 제대로 어필할 것이 분명했다.

Maison Margiela

존 갈리아노는 메종 마르지엘라의 유산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학을 덧칠해 매혹적인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가 그려낸 마르지엘라의 여인은 이번 시즌 런웨이 위에서 시공을 초월한 여행을 떠났다. 깨끗하고 단정한 올 화이트 룩에서 시작된 ‘그녀’의 여정은 미래에서 온 듯한 메탈릭한 소재와 유리 파편들을 조우했고, 쿠튀르적인 장식과 미완성된 듯한 디테일이 엉겨 붙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해냈다. 또한 데이비드 보위를 연상케 하는 1980년대 로큰롤 스타일의 점프수트를 입고 등장하나 싶더니, 피날레가 가까워오자 그녀는 일본으로 방향을 틀어 존 갈리아노 식 기모노를 차려입고 등장했다. 어찌 보면 통일감이 없는 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의 ‘창작욕’과 ‘매출’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았다는 것!

COMME DES GARÇONS

그녀의 머릿속엔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 걸까. 더할 나위 없이 전위적이고 음울하며 의미심장한 꼼데가르송의 컬렉션을 눈앞에 마주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이번 시즌 레이는 컬렉션 전체를 블루와 블랙, 화이트 컬러로 가득 채웠다. 커튼처럼 늘어지거나 매듭짓거나 혹은 주름 잡힌 벨벳과 기괴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 갖가지 깃털이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구조물을 형성했고, X자 형태로 연결된 두꺼운 스트랩은 해체된 형태를 다시 결합하고 한편으로 인체를 속박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여기에 기이하게 부풀린 새빨간 헤어피스와 큐피돌처럼 그린 검은 입술, 앞코가 들린 납작하고 뾰족한 신발이 더해져 흡사 기괴한 마녀가 걸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끊임없이 탈개념적인 세계관을 의상에 투영하는 그녀. 이번 시즌에도 그녀에게서 아방가르드의 왕좌를 빼앗을 이는 없어 보인다.

Rochas

하우스의 중요한 화두인 ‘페미니니티’를 바라보는 알레산드로 델라쿠아의 시각이 달라진 걸까? 이번 시즌 로샤스 쇼는 심플하고 스포티한 실루엣, 거대하게 과장된 리본 디테일, 서프 모티프와 굵은 흑백의 스트라이프, 페이턴트 소재의 브라톱과 펜슬 스커트, 큼지막한 정글 프린트 등 새롭고 과감한 시도로 가득했다. 물론 전체를 골드 컬러의 비즈 자수로 도금한 블랙 드레스나 입체적인 폴카 도트로 채운 화이트 코트, 태양 아래 노니는 기린을 표현한 섬세한 자수처럼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의상들이 중심을 잡아주긴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쇼에 비해 난해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것이 사실. 그건 아마도 알레산드로가 이번 컬렉션의 뮤즈로 살바도르 달리의 아내이자 초현실주의 예술 분야의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인 갈라 달리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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