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에는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리라 다짐했다. 쉼과 숨 없이 달리다 보니 정작 진짜 좋아하는 것을 곁에 자주 두지 못한 채 지난 한 해를 보냈다. 그래서 새해의 첫 립스틱은 고이 아껴둔 것으로 골랐다. 직업 특성상 셀 수 없이 많은 립스틱을 발라보지만, 에르메스 뷰티의 립스틱만은 무엇 때문인지 특별한 날에 바르겠다는 생각으로 모셔둔 것만 예닐곱 개에 이른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레드 컬러를 입술에 가뿐히 발라봤다. 입술에 맞닿은 텍스처는 마치 버터처럼 부드럽게 미끄러지고, 정성스레 깎은 밤알처럼 매끈한 표면과 아름다운 컬러 배합을 띤 패키지는 아티스틱한 오브제를 마주한 것처럼 만족감을 준다. 이 립스틱을 바르는 순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주변을 이루자는 대학생 시절의 다짐이 다시금 생각났다. 작은 재주로 큰 꿈을 그리던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M83의 ‘GO!’를 다시 들었다. 새 립스틱을 바르고 옛 음악을 들었을 뿐인데, 어쩐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은 기분이 든다.
<마리끌레르> 뷰티 비주얼 디렉터 김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