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에 대한 조향사의 고집과 집념을 생각해볼 때, 향수는 후각으로 그려낸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향에 대한 깊이 있는 역사를 쌓아온 겔랑이 예술에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겔랑은 설립 초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티스트와 협업해 새로운 보틀과 케이스를 제작했고, 예술계의 다양한 창작 활동을 후원하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 작가와도 전 세계 21개 한정판 아트 퍼퓸 ‘르 플라콘 콰드릴로브 바이 이우환’을 아트 바젤 파리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겔랑과 이우환의 인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3년, 겔랑과 아를 이우환 미술관(LEE UFAN ARLES)이 예술과 환경상 시상식을 공동 개최하며 예술과 환경에 초점을 맞춘 젊은 아티스트들의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해마다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아티스트들은 2주간 레지던시 기간을 거쳐 작업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널리 알릴 기회를 얻게 된다.
영광스러운 2025년 수상의 영예는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카롤린 코르바송에게 돌아갔다. 그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탐구를 통해,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와 마르세유 천체물리학연구소의 지원을 받아온 젊은 아티스트다. 평소 세밀한 목탄 드로잉 작업 스타일을 고수하는 그는 이번 레지던시 기간 동안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 “캔버스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지난 10년간 해온 목탄 드로잉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고 싶었죠. 아크릴, 오일, 잉크, 비닐 페인트, 파스텔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고, 캔버스를 긁어내고 덧칠하는 작업도 반복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예술과 환경상이라는 프로젝트 주제에 맞춰, 그동안 탐구해온 우주가 아닌 지구 속 자연에 시선을 집중했어요.”
프랑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캐나다와 미국을 오가며 성장한 그는 텍사스에서 보낸 시간을 이번 레지던시의 주요 영감으로 삼았다. 코르바송이 살던 동네에는 토네이도가 자주 발생했는데, 그는 폭풍의 눈에서 느낀 고요한 공포를 ‘바람의 양면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후 바람의 본질을 체감하기 위해 프랑스 카마르그(Camargue)의 해변으로 향했다. “세상의 끝에 다다른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마치 경계의 공간 같았죠.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어요.” 사구를 따라 걷던 중,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나뭇가지들이 모래 위에 그려낸 완벽한 형태의 원을 발견하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바람이 마치 생명을 불어넣는 듯 보였어요. 바람이 지닌 생동감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죠.” 이 순간을 영상으로 기록한 그는 이번 전시에서 이를 비디오 설치 작업으로 승화시켰다. 이는 이우환 작가의 “자연과 우리의 공존에 대해 되돌아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라는 메시지를 작품으로 구현한 순간이었다.
코르바송은 작업을 거듭하며 바람을 돌풍과 같은 파괴자이자 동시에 꽃가루를 암술머리로 옮겨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키는 수분(受粉) 매개체로 해석했다. 이러한 해석은 심사위원장인 빔 벤더스(Wim Wenders)와 겔랑의 국제 예술 총괄 디렉터이자 브랜드 문화·유산 아트 디렉터인 ‘예술과 환경상’ 제정자 안 카롤린 프라장(Ann-Caroline Prazan)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프라장은 “수분 매개체 하면 대부분 벌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카롤린은 완전히 다른 시각을 제시했어요. 특히 벌을 매우 특별하게 여기는 겔랑에 이 새로운 관점은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죠. 평생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 완전히 새롭게 정의되는 순간은 그야말로 마법 같아요. 이런 경험을 하게 해준 카롤린에게 깊이 감사해요”라고 전했다.
코르바송은 이번 레지던시가 작업 스타일에 큰 변화를 준 도전이자 기회였다고 말했다. “지난 몇 년간은 아이를 돌보며 작업을 병행하느라 깊이 탐구하기 어려웠어요. 표면만 훑는 기분이었죠. 이번 레지던시를 통해 아직 ‘바닥’까지는 닿지 못했지만, 최소한 그 ‘표면’을 깨뜨렸어요. 이제 본격적인 잠수를 시작할 거예요. 깊이를 향한 수직적 갈망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바닥을 향해 나아가려 해요.” 코르바송은 수상 혜택으로 열리는 개인전에서는 직접 쓴 책도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 레지던시에서 처음으로 이우환 작가의 시를 접했어요. 저도 10대 시절부터 휴대폰이나 노트에 짧은 글귀를 적어두곤 했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줄 용기가 없었죠. 하지만 이제는 텍스트와 이미지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제 글은 그림보다 훨씬 더 내밀하기에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해요. 네 살 된 딸에게 바치는 ‘어머니 예술가(Mother Artist)’라는 시만 봐도 알 수 있죠. 엄마가 된다는 건 내 안의 무언가를 내어주는 고통스러운 과정인데, 이에 대해 솔직히 고백했어요. 그래서 꽤 거칠어요.”
작가 이우환은 “작품은 자아의 안과 밖의 대화를 거쳐 탄생한다. 예술가의 생각과 행위는 주변 환경, 분위기, 그리고 캔버스와 색채의 상호작용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은 카롤린 코르바송이 레지던시에서 경험한 탐색과 작업, 명상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Something Moves’이다. “이 제목은 오랫동안 제 안에 있었던 말이에요. 이곳에 와서야 그 의미를 온전히 체감해요. 실제로 내면에서 움직임이 일어나는 걸 느꼈거든요.” 올여름, 깊고 푸른 색채를 머금은 카롤린 코르바송의 작품들은 아틀리에 MA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며, 그 자신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겔랑과 아를 이우환 미술관이 후원한 카를린 코르바송의 전시
<SOMETING MOVES>
2025년 7월 7일~10월 5일
아틀리에 MA(Atelier MA), 이우환 아를(Lee Ufan Arles)
5 Rue de Vernon, 13200 Arles, Fr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