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의 시선에 휘둘릴 필요도 없고, 사회가 규정한 미적 기준도 필요치 않다. 자기 생각에 따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그 결정을 존중하는
사회가 중요할 뿐이다. 동시대 젊은이들은 매끈한 피부든, 자연스러운 체모든 그 모습 자체가 동등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식을 찾는 중이다.
날씨가 더워지고 옷차림이 가벼워지는 계절. 신체가 드러나고 피부 노출이 많아지는 시기에는 보여지는 부위를 관리하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레 커진다. 네일아트, 페디큐어, 제모 시술이 이 시기에 급격히 증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여름에는 겨드랑이, 다리 라인, Y존 등 은밀한 부위 제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비키니 라인이나 브라질리언 왁싱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다. 생각해보면 고대 그리스 석상도 주요 부위에 체모가 거의 없다. 매끈한 피부를 미의 기준으로 삼는 인식은 이때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지나, 20세기 초·중반 서구 문화에서는 여성의 체모를 ‘지워야 할 것’으로 규정했다. 털은 동물적이고 원시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체모 없는 피부가 이상적인 여성성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광고나 포르노그래피는 이러한 기준을 더욱 공고히 했고, 음모 제모는 위생을 위한 행위이자 ‘기본 매너’로 받아들여졌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는 Y2K, 비키니, 란제리 패션이 급부상하며 브라질리언 왁싱이 대중화됐다. 깔끔함과 청결은 필수적인 미의 기준이 되었고, 이 시기에 왁싱 숍, 셀프 키트, 레이저 클리닉이 대폭 성장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주요 담론으로 부상하면서 제모를 여성성의 상징으로 강요해온 사회적 시선에 의문을 제기하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일부 셀럽은 자기 몸의 털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노출하는 모습을 보이며 “나는 제모를 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으로 파격적이라는 인상으로 이목을 끌기도 했다. 배우 에마 코린은 화보에서 제모하지 않은 겨드랑이와 다리를 공개하며 “나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다”라고 선언했고, 마일리 사이러스는 #freeyourpits(겨드랑이를 해방하자) 캠페인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흐름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며 개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인스타그램, 틱톡 등에서 #bodyhairdontcare, #noshavenoshame 같은 해시태그가 등장한 것. 만세 포즈를 하며 당당히 드러낸 겨드랑이 털, 듬성듬성 난 다리털도 개의치 않고 보여주는 콘텐츠가 많아졌다. 이런 행동은 단순한 탈제모가 아니라,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이자, 더 나아가 자기 몸에 대한 주체적 선택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듯 제모를 받아들이는 다양한 태도가 공존하는 가운데, 영구 제모와 자연 체모 유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분분하다. 50대 이탈리아 여성 A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스무 살의 나에게 말할 수 있다면 레이저 제모를 멈추라고 하고 싶어요.” A는 속옷이나 수영복 솔기가 닿는 부위에 마찰로 생기는 인그로운 헤어를 케어하기 위해 제모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경험이 만족스러워서 허벅지, 팔, 겨드랑이까지 확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체모가 줄고 얇아질수록 피부는 더욱 매끈해졌고, 그 느낌에 매료된 A는 더 깔끔하고 매끈한 피부를 위해 제모를 이어갔다. 그 시기 유행하던 제모 트렌드 또한 이 선택을 부추겼다. 그러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거울을 봤는데 음모가 거의 없는 내 모습이 아주 낯설게 다가왔어요. 왜 이렇게까지 없애버렸을까. 갑자기 후회되더라고요.” 문득 A는 깊은 회한을 느꼈다. 그가 느낀 감정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었다. 사회의 시선과 미의 기준을 좇아 만든 ‘매끈한 나’는 결국, 내면의 자신과 점점 멀이지게 했다고 한다. A의 고백은 단지 개인적 회한이 아니라, 제모를 둘러싼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반면 30대 한국 여성 B는 지난 11년간 꾸준히 제모를 해온 ‘제모 강경파’다. 처음에는 왁싱으로 시작했지만, 매달 숍을 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왁싱 특유의 단점들이 점차 불편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왁싱은 주기가 짧고,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인그로운 헤어가 생기더라고요. 모근이 다시 자라날 때 느껴지는 간지러움도 신경이 쓰였고요.” 이런 불편함을 견디던 B는 레이저 제모에 눈을 돌렸고, 그때부터 신세계를 경험했다고 한다. “초반에는 제모 부위를 면도한 후 시술을 받아야 하는 약간의 수고가 따르지만, 시술 자체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요. 왁싱보다 자극도 덜하고, 관리 시간도 줄어서 만족스러워요. 무엇보다 착색도 확실히 덜하고요.” B는 특히 생리 기간에도 청결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냄새나 위생적인 측면에서도 훨씬 쾌적하고, 스스로 더 깔끔하게 느껴진다는 것. 그의 선택은 단순히 ‘털을 없애는 행위’를 넘어 피부 자극, 착색, 위생까지 고려한 라이프스타일 일부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제모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도 있다. 20대 한국 여성 C는 ‘굳이 제모를 해야 하나?’라는 물음을 자주 던지게 된다고 한다. “대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무조건 왁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비키니를 입든, 반바지를 입든, 털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근데 이제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나이가 들면 어차피 털이 빠지고 가늘어질 텐데, 굳이 지금 인위적으로 뽑아내야 하나 싶어요. 지금보다 늙었을 때 털 없는 내 모습이 더 초라하게 느껴지면 어떡할지 걱정도 되고요.” C의 말에는 솔직함과 불안감이 공존했다. 지금은 제모를 멈추고 체모가 자라나는 속도와 방향마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중이라는 C. 오히려 전보다 편하고 자연스러운 나를 받아들이는 기분이라고 전한다. 미적으로는 불편할 때도 있지만, 이 선택은 스스로를 존중하는 그의 결심처럼 다가왔다.
제모는 여전히 문화, 세대, 취향에 따라 개인적 선택이자 사회적 메시지로 작용한다. 제모를 대하는 태도는 단순히 털을 없앨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를 넘어선다. 어떤 이는 스스로를 더 깔끔하고 편안하게 가꾸기 위한 선택으로, 또 다른 이는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 위한 선언으로 받아들인다.
정답은 없다. 남의 시선에 휘둘릴 필요도 없고, 사회가 규정한 미적 기준도 필요치 않다. 자기 생각에 따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그 결정을 존중하는 사회가 중요할 뿐이다. 동시대 젊은이들은 매끈한 피부든, 자연스러운 체모든 그 모습 자체가 동등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식을 찾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