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디자인을 공부하던 대학생 시절, 전공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지만, 내 머릿속에 오래 남은 수업 내용이 하나 있었다. 바로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누구나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디자인 개념으로, 일반적인 사용자뿐 아니라 왼손잡이를 위한 가위처럼 ‘특수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까지 함께 고려하는 방식을 뜻한다. 특수교육 교사인 누나의 영향인지, 이 개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유난히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약 10년이 지난 지금, 내가 일하는 뷰티 신에서 이 개념은 더없이 구체적인 형태로 체감되고 있다. 성별, 인종, 피부 타입을 넘어 다양성을 고려하는 흐름은 이제 노약자와 장애인을 포함해 뷰티 문해력이 낮은 이들까지 포괄하는 단계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뷰티 신은 모두가 가진 다양한 속도와 방식에 귀 기울이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아름다움의 문을 넓히고 있다. 이런 변화들이야말로 포용이 설명이 아닌 일상이 되는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기에.

랑콤이 손과 팔의 움직임이 제한적인 사용자를 위해 개발한 휴대용 전동 메이크업 애플리케이터 ‘합타(Hapta)’는 이런 변화를 대표한다. 스마트 모션 컨트롤과 맞춤형 부착 장치가 마스카라를 열고 립스틱을 바르는 일상의 작은 동작까지 섬세하게 보조하며, 신체적 한계로 메이크업 자체가 어렵던 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뷰티는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로레알 그룹의 철학을 기술의 형태로 증명한 순간이기도 하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 셀레나 고메즈가 창립한 레어 뷰티(Rare Beauty)는 유니버설 디자인이 ‘연민’이나 ‘예상 고객층 확장’이 아닌, 한 사람의 고통에서 출발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전신 자가면역질환인 루푸스로 인한 관절염으로 병뚜껑조차 열기 어려웠던 그의 경험은 브랜드의 설계 철학을 ‘접근성 강화 공식 프로젝트(Made Accessible Initiative)’라는 이름으로 구축하게 했다. 열고 닫기 쉬운 캡, 미끄러지지 않는 패키지 마감, 손가락이나 손목에 부담을 덜 주는 애플리케이터 형태는 단순한 편의성을 넘어 ‘나는 할 수 있다’는 감각을 되돌려줬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올해 출시된 ‘레어 오 드 퍼퓸’은 스프레이 표면을 손가락은 물론 손바닥이나 팔꿈치로도 뿌릴 수 있도록 넓고 평평하게 디자인했다. 실제 장애인들이 이를 사용하는 영상을 올리며 따뜻한 응원의 흐름이 만들어져 유니버설 뷰티 아이템이 어떤 공감의 파장을 일으키는지 보여준 감동적 풍경을 자아냈다. 이런 뷰티 신의 모두를 위한 아름다운 동행의 역사는 오래전인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록시땅 창립자 올리비에 보송(Olivier Baussan)은 자신의 매장에서 한 시각장애인이 제품의 향을 천천히 음미하는 모습에 감동해 브랜드 전 제품에 점자를 도입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여동생이자 그래픽 스튜디오 책임자인 파스칼 보송(Pascale Baussan)과 함께 약 6개월간의 연구를 거쳐 세계 최초의 점자 라벨 샴푸가 탄생했는데, 그는 그 노력에 대해 “옳은 일이기 때문에 했다”라는 단 한마디를 남기며 유니버설 뷰티의 근간을 다졌다.

이러한 글로벌 브랜드의 행보는 국내 뷰티 신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에스쁘아는 2022년 단상자와 용기에 점자 형압을 도입하며 ‘모두를 위한 뷰티(Beauty for All)’를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아모레퍼시픽은 2023년 화장품 및 생활용품 10개 카테고리에 점자 스티커를 제작해 전국 94개 기관에 걸쳐 2천5백여 명에게 5천 권을 무상으로 배포했다. 이는 단순히 패키지를 넘어 하나의 캠페인 활동으로 유니버설 뷰티의 외연을 확장했다. 이렇듯 유니버설 뷰티가 국내에도 자리 잡자 뷰티 문해력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그 일환으로 로레알 코리아는 2025년 국가평생교육진흥원과 협력해 올바른 화장품 사용법과 성분이나 효능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뷰티 이해력인 뷰티 리터러시(Beauty Literacy) 향상을 위한 <화장품으로 배우는 생활과학 문해교과>를 제작했다. 이는 익숙하지 않은 뷰티 루틴 앞에서 막막함을 느끼던 노년층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단순한 뷰티 교육을 넘어 ‘배움에 대한 자신감’을 단단히 심어준 시간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흐름은 기술적 실험에서도 이어져, 에스티 로더의 AI 기반 음성 지원 메이크업 도우미 ‘보이스-언에이블드 뷰티(Voice-enabled beauty)’와 시세이도의 음성 안내 튜토리얼 같은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졌다.

유니버설 뷰티는 사업의 차원을 넘어 제도적 수준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2023년 이후 한국 식약처는 화장품 점자 표시 지침을 강화했고, EU는 2025년 6월부터 EAA(European Accessibility Act)의 의무 적용을 시행하며 패키지부터 웹과 앱 사용자 경험(UX)까지 접근성을 의무화했다. 이는 접근성을 ‘배려’가 아닌 ‘기본권’으로 바라보는 변화이며, 뷰티가 특정한 일부만의 영역이 아니라 모두가 누려야 할 공적 경험임을 선언한다. 결국 이러한 논의의 중심에는 ‘뷰티는 자기 돌봄의 언어’라는 중대한 사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런 뷰티 신의 움직임을 신체적 혹은 감각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실제로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 변화의 온도가 그들의 삶에 닿고 있는지, 혹은 아직 손보아야 할 지점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를 느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군포e비즈니스고등학교 현혜림 특수 교사에게 질문했다. 그는 “장애가 있는 학생들도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아이돌을 동경하고, 그들의 메이크업을 따라 하고 싶어 해요. 머리에 젤을 바르고, 데이트 전 수염을 다듬는 일도 똑같죠. 강도와 디테일이 다를 뿐이에요. 이런 맥락에서 지금의 변화를 아주 긍정적으로 느끼고 있어요.” 그의 말은 손끝은 조금 느리고 어떤 배움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뿐, 아름다움을 향한 마음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켰다. 그는 신체적 어려움을 가진 학생뿐 아니라, 발달장애 학생들이 뷰티를 즐기고 싶어도, 그들에게 맞는 교육 방식이나 접근법이 거의 마련돼 있지 않은 현실에 대한 아쉬움도 전했다. “지적장애가 있는 이들은 스킨케어와 메이크업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울 수 있는 체계가 아직 충분하지 않아요. 실제로 지적 장애 학생들도 메이크업을 하지만, 손에 익지 않은 터치 때문에 오히려 장애 특성이 더 도드라져 보일 때가 많거든요. 전용 패키지 제품은 현실적 접근성이 낮고, 교육 면에서도 여전히 보완이 필요한 상황이죠.” 그의 말은 지금의 흐름이 충분히 반갑고 의미 있지만, 조금 더 세심한 손길이 더해진다면 이 변화는 더 많은 이들에게 실질적인 힘이 될 것임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한다.

뷰티 신의 이런 지속적 노력은 모두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마음의 문턱을 하나씩 낮추고 있다. 누군가는 더디게 배우고, 누군가는 다른 방식으로 익혀야 하지만 그 차이가 더 이상 배제의 이유가 되지 않는 세계, 각자의 속도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포용’이라는 단어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온다면,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뷰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모두를 품을 더 넓은 포용의 마음으로, 그날을 조용히 진심을 다해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