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DON CHOI

유돈 초이는 매 시즌 오차 없는 완벽한 테일러링을 기반으로 로맨틱한 여성성을 더해 매력적인 컬렉션을 선보인다. 그는 2021 S/S 시즌 컬렉션을 선보이기 위해 런던의 한 스튜디오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한여름 지중해를 감싸는 기분 좋은 공기와 햇살을 떠올리며 컬렉션을 구상했다는 디자이너는 그대로 따라 입고 싶을 만큼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리조트 룩을 선물처럼 펼쳐 보였다. 부드러운 뉴트럴 팔레트는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는 듯했고 바삭거리는 질감의 코튼 드레스며 오버사이즈 스트라이프 셔츠, 채도가 낮은 트로피컬 프린트 셔츠와 원피스는 당장이라도 휴양지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만큼 매혹적이었다. 물론 유돈 초이의 장기인 테일러드 수트도 빠지지 않았다. 다양한 소재의 수트 안에 비대칭 컷 브라톱이나 루스한 슬리브리스 톱을 입어 통일감을 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프레젠테이션 내내 귓가에 맴돌던 청량한 새소리까지 전부 아름다웠던 컬렉션.

COACH 1941

스튜어트 베버는 이번 시즌 브랜드의 과거와 현재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1980년대 포스트모던 룩부터 1990년대 그런지 룩까지 다양한 시대의 패션을 위트 있게 재해석한 컬렉션이 탄생했다. 관전 포인트는 유르겐 텔러의 시선으로 포착한 톱 모델들의 모습을 담은 흥미로운 사진들. 케이트 모스를 비롯해 팔로마 엘세서, 메건 디 스탤리언, 미즈하라 키코 등 코치 1941의 새 컬렉션을 입은 스타 모델들이 저마다 개성을 담은 포즈를 취한 사진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매력적인 스타일링도 눈에 띄었다. 티셔츠 위에 빈티지한 플로럴 패턴 원피스를 덧입고 원색 슬라우치 삭스와 투박한 워커로 마무리하거나 메가사이즈 리사이클링 토트백과 ‘cool’, ‘uptown’ 등 위트 있는 단어를 새긴 미니 토트백을 한꺼번에 든 모습이 신선했다. 지속 가능한 패션을 지향하는 트렌드에 동참한 브랜드답게 식물성 염료로 가공한 베지터블 가죽 백, 플라스틱 병을 재활용한 토트백 등 업사이클링에 열과 성을 다한 부분 역시 감동적이었다.

CHRISTOPHER KANE

코로나19로 록다운 시대를 맞은 지금, 크리스토퍼 케인은 자유로운 영혼을 담은 아트워크로 컬렉션을 완성했다. 디자이너는 지난 6개월간 런던에 있는 집 정원에서 톡톡 튀는 컬러 팔레트를 기반으로 추상화를 그려왔다. 그리고 이번 컬렉션을 위해 자신의 노고가 담긴 작품을 독창적인 프린트로 재현했다. “이 그림엔 팬데믹 시대를 맞아 느낀 두려움과 당혹감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요.” 디자이너는 이 특별한 아트워크에 희망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낙낙한 시프트 드레스, 오버사이즈 코트 등 다양한 옷에 크리스토퍼 케인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아트 프린트가 빼곡히 채워졌다. “어떤 의미에서든 변화는 좋은 거예요. 희망을 잃지 마세요.” 크리스토퍼 케인의 진심 어린 메시지가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CAROLINA HERRERA

“우아함은 당신이 입은 옷에서부터 결정돼요.” 젊고 패기 넘치는 디자이너 웨스 고든은 대선배 캐롤리나 헤레라의 이 유명한 말을 되새기듯 이번 시즌 자신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자유로이 펼쳤다. “팬데믹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기념할 만한 순간을 마주하죠. 그들에게 잊지 못할 시간을 선물하고 싶어요.” 웨스 고든은 자신의 의도를 유감없이 구현했다. 쇼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한 룩을 전부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로맨틱했으니까. 과장되게 굽이치는 러플과 튈, 폴카 도트 패턴, 커다란 리본 장식은 여전했지만 미아 패로, 샤데이를 뮤즈로 언급한 만큼 웨스 고든이 구현한 캐롤리나 헤레라 쇼는 한층 더 귀엽고 활기 넘쳤다. 시상식 레드 카펫 쇼에 어울릴 만큼 드라마틱한 드레스를 입은 모델들이 전부 뻔한 스틸레토 힐 대신 플랫 슈즈나 브로그를 신은 채 워킹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 “여태껏 내가 진두지휘한 캐롤리나 헤레라 컬렉션 중 가장 만족스러운 쇼였어요.” 웨스 고든의 이유 있는 자신감이 증명된 시간이었다.

BALENCIAGA

코로나19 사태로 브랜드마다 각기 개성을 담은 방식으로 2021 S/S 시즌 룩을 공개했는데, 이 중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몇몇 브랜드 중 하나가 발렌시아가다. 힙스터들이 열렬히 추종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의 선택은? 텅 빈 파리의 밤거리를 종횡무진하는 파리지엔의 모습을 쿨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코리 하트의 노래 ‘Sunglasses at Night’를 배경으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나이와 관계없이 자유로이 캐스팅한 모델들이 노래를 흥얼대며 거리를 워킹하는 모습이 한 편의 힙한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 감각적이었다. 팬데믹의 장기화로 변화된 일상을 반영한 로브, 파자마, 슬리퍼, 트랙 수트, 트롱프뢰유 데님 등의 기본 아이템에 브랜드 DNA를 담아 구현해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농구 바스켓 그물을 엮은 메탈 네트 드레스를 비롯해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아카이브에서 영감 받은 아이템을 더한 뎀나 바잘리아의 영민한 감각 역시 빛을 발했다. 스타일링은 또 어떤가! 메탈 슬립 톱에 헐렁한 조거 팬츠를 입어 반전 매력을 보여주거나 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커다란 메탈 볼 이어링을 차고 오버사이즈 메신저 백을 옆구리에 낀 등 딱히 신선하지 않은 아이템을 개성 있게 매치해 독특한 분위기를 완성한 예가 속속 눈에 띄었다. 게다가 컬렉션에 사용한 직물의 90% 이상이 지속 가능한 패션이라는 시대 흐름에 발맞춰 업사이클링 소재라고 한다. 올바른 의식을 지닌 뎀나 바잘리아의 내일을 응원한다.

FENDI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는 브랜드가 맞을 큰 변화에 앞서 열과 성을 다해 컬렉션을 준비한 것이 분명하다. 2021 F/W 시즌부터 킴 존스가 펜디의 여성복 디자이너로 부임하면서 이번이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가 홀로 주도하는 마지막 컬렉션이기 때문에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펜디는 유서 깊은 가족 기업이에요. 가족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추억하며 컬렉션을 완성했죠.” 로마에 있는 집 창가나 정원에서 안과 밖을 들여다보며 보낸 소중한 기억은 오간자 위에 그림자 형태로 아름답게 프린트됐다. 그는 상반되는 요소 사이의 충돌을 감각적으로 조합해내는 데도 집중했다. 그 결과 스포티즘과 로맨티시즘, 여성성과 남성성, 감추거나 노출하는 것을 모두 느낄 수 있다. 가벼운 리넨 코트와 투명한 오간자 드레스를 선보이는가 하면 무거운 깃털 스커트와 도톰한 퍼, 덕다운 아우터가 공존하는 것 또한 흥미로웠다. 액세서리는 또 어떤가? 돌돌 만 수건을 콕 끼운 라피아 피크닉 백이며 재활용 PVC로 짠 미니 장바구니 백도 귀엽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쉬어 바게트 백이었다. ‘핸드 인 핸드’ 바게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선보인 이 백은 이탈리아 아브루초주와 마르케주 장인들과 합작한 결과로 15세기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사용한 기법을 따른 것이 특징이다. 결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펜디 하우스를 향한 실비아의 애정이 듬뿍 묻어난 컬렉션이었다.

ZIMMERMANN

니키 짐머만은 새 컬렉션을 ‘야생 정원 (Wild Botanica)’으로 명명했다. 그의 영감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런웨이 양쪽에는 색색의 꽃이 길게 늘어섰고, 모델들은 꽃과 같은 색감의 화사한 컬렉션 룩을 입고 등장했다. 쇼는 섬세한 기술력과 로맨틱한 감성의 조화로 완성됐다. 꽃 모양 아플리케가 잔뜩 붙은 드레스가 선두를 차지했고, 나비가 몸 위에서 노니는 듯 입체적인 드레스가 그 뒤를 이었다. 간혹 디테일 없이 베이식한 셔츠와 팬츠, 비교적 실용적으로 보이는 스커트가 등장했지만, 색감이 화사해 전체적인 쇼의 흐름을 해치지는 않았다. 니키 짐머만 역시 대다수 디자이너들처럼 코로나19와 쇼의 테마를 연관 지어 집에 머물며 바라본 것들에 대해 표현하고 싶었다는 생각을 전했지만, 몇 시즌째 이번 컬렉션과 비슷한 단편적인 디자인을 고수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그다지 공감할 수 없는 설명이었다.

ANDREAS KRONTHALER FOR VIVIENNE WESTWOOD

안드레아스 크론탈러가 괴짜인동시에 예술가라는 말에는 누구도이견을 표하지 않을 것이다. 새 시즌안드레아스 크론탈러 포 비비안웨스트우드 컬렉션에는 그의 예술적인장난기가 유감없이 녹아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이동 제한령을 이유로 그는모델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이고,휴대폰을 이용해 룩북을 촬영했다.비비안 웨스트우드를 포함한 여러명의 모델들은 자유분방한 포즈로카메라 앞에 섰고, 자연스럽게 엉키고찢어진 것처럼 보이는 의상과 완벽한합을 이뤘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전매특허인 타탄체크와 망사 스타킹,예술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프린트와원색적인 동물 패턴은 어김없이등장했지만 색감과 전체적인 분위기를고려했을 때 어느 때보다도 차분한느낌을 주는 컬렉션이었다. 비록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옷 일색이었지만,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이룩한 예술적인패션 세계를 수호하려는 안드레아스크론탈러의 노력은 실용성을 뛰어넘는감동을 안겨주었다.

GABRIELA HEARST

뉴욕의 핫한 신진 디자이너로 각인되던 가브리엘라 허스트는 이번 시즌 파리로 무대를 옮겨와 꿈을 펼쳤다. 컬렉션은 장인정신을 발휘해 정교한 수공예 기술에 초점을 맞췄는데, 현란한 팔레트의 크로셰 드레스나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손으로 짠 프린지 디테일 캐시미어 판초 등 니트웨어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이뿐 아니다. 흰색과 검은색을 반반 섞은 양질의 가죽 드레스며 수작업으로 염색한 무지갯빛 날염 프린트 셔츠 원피스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컬렉션 전반에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운 소재의 미니멀 룩에 조개 모양을 곳곳에 장식한 것 또한 흥미로웠다. “어릴 적 어머니가 선물해준 조개 팔찌가 생각났어요. 그것이 이번 컬렉션의 시작이었죠. 록다운으로 절망에 빠졌지만 지금만큼 가족의 소중함을 마음 깊이 느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가브리엘라 허스트의 진심이 전해진 순간이었다.

YOHJI YAMAMOTO

꼼데가르송의 레이 카와쿠보와 준야 와타나베, 사카이의 치토세 아베에 이르기까지 파리에서 활동하던 일본 디자이너 대부분이 잠시 고국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요지 야마모토는 40년간 머물러온 자리를 꿋꿋하게 지켰다. 변화를 싫어하고 좋은 의미의 고집으로 똘똘 뭉친 그의 성향이 반영된 선택이다. 요지 야마모토는 언제나처럼 예술적으로 주름진 천과 매듭, 가시덤불처럼 몸에 엉킨 옷 조각들, 철사가 군데군데 튀어나와 미완성의 쿠튀르 피스처럼 보이는 드레스, 패브릭 덩어리를 덮어쓴 것처럼 보이는 컬렉션 룩을 선보였다. 혼란한 시대지만, 그는 다른 디자이너들처럼 코로나19 로 인한 우울을 희망적인 디자인으로 털어내자는 일률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가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적으로 이뤄내고 지켜낸 요소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안정감을 느끼게 만들었으며, 떠들썩한 메시지보다 훨씬 큰 울림을 주었다.

ETRO

이토록 럭셔리한 마린 룩이라니! “오래된 레코드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온 나폴리의 전통음악을 들으며 그 고요하고 평온하며 우아한 분위기에 매료되었어요.” 디자이너는 컬렉션을 구상할 때 과거에 떠났던 여행을 곰곰이 회상했다고 한다. 이스키아섬을 비롯해 카프리, 나폴리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의 환상적인 지역과 그날의 분위기를 떠올린 것. “매혹적인 이탈리아에 바치는 찬사예요.” 그 결과 베로니카 에트로는 이탈리아의 낭만적인 공기가 전해질 만큼 아름다운 리조트 룩을 완성했다. 1990년대 아카이브에서 차용한 프린트는 아이템 곳곳에 새겨졌고 브리지트 바르도부터 소피아 로렌까지 1970년대를 풍미한 여배우들이 입었을 법한 홀터넥 톱과 하이웨이스트 쇼츠, 풀 스커트 등 매혹적인 아이템이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냈다. 팬츠 수트에 실크 프린트 행커치프로 포인트를 주거나 튜브톱 드레스에 덧입은 코튼 셔츠의 밑단을 묶어 연출하는 등 스타일링 역시 한몫 단단히 했다. 로프 핸들이 독특한 토트백과 플랫 샌들, 챙 넓은 라피아 햇까지 액세서리 또한 빠짐없이 탐났으니! 팬데믹의 비극적 사태를 잠시나마 잊을 만큼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 쇼를 완성한 디자이너의 역량에 박수를!

ERDEM

팬데믹의 혼돈 속에서도 에르뎀이 구현한 로맨티시즘은 여전히 서정적이며 아름다웠다. “세기의 스캔들이자 수전 손택의 명작 <화산의 연인(The Volcano Lover)>의 주인공 에마 해밀턴과 넬슨 제독의 불꽃같은 사랑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여태껏 수많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뮤즈를 선택한 에르뎀 모랄리오글루는 이번 시즌 영국의 전설적인 요부이자 비운의 삼각관계에 휘말렸던 여인 에마 해밀턴을 떠올리며 동화 같은 컬렉션을 완성했다. 울창한 숲 사이를 서서히 걸어 나오는 에르뎀의 뮤즈들은 리본을 단 밀리터리풍 엠파이어 실루엣 가운을 비롯해 야생화를 입체적으로 장식한 오간자 소매 원피스, 진주를 알알이 수놓은 수트 등 여성성을 극대화한 옷을 입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에마 해밀턴의 다사다난한 상황에 걸맞게 어딘가 다듬어지지 않은 요소를 첨가하고 싶었어요.” 이런 바람은 깊게 파인 오버사이즈 브이넥 카디건을 느슨하게 걸치는 스타일링을 통해 매력적으로 구현됐다. “당장 종말이 온다고 해도 그 누가 핑크색 무아레 가운을 입고 싶지 않겠어요?” 한 매체와 인터뷰하며 디자이너가 한 말마따나 처절한 록다운의 시대에도 아름다움을 향한 동경은 쭉 계속될 듯하다.

VERSACE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폐허가 된 듯한 바닷속으로 관객을 초대했다. 부서지고 흐트러진 조각상과 기둥들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흩뿌려놓은 모래 위로 모델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쇼장이 주는 어두운 느낌과 달리 컬렉션은 밝은 색감과 스포티 무드, 현란한 패턴으로 구성됐다. 해조류가 연상되는 러플과 조개껍데기에서 영감 받은 브라톱 등 베르사체가 완성한 해저 세계에는 다채로운 요소가 자리 잡고 있었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1992 S/S 컬렉션에서 공개되며 화제를 모은 불가사리 패턴의 부활이다. 스커트와 톱, 재킷과 쇼츠 등 다양한 아이템 위에서 존재감을 뽐내며 등장한 불가사리들은 마치 춤추는 듯 역동적인 분위기를 더하며 쇼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누군가는 미니멀리즘이 지배하는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라고 혹평하겠지만,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도나텔라 베르사체의 노력만큼은 어느 쇼와 견주어도 아쉽지 않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DOLCE & GABBANA

결론부터 밝히자면, 맥시멀리즘의 대가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 듀오의 진가가 빛을 발한 컬렉션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꽃과 레오퍼드, 도트, 스트라이프 등 현존하는 패턴을 모조리 모아 짜깁기한 듯한 리조트 룩이 수도 없이 쏟아졌으니 말이다(‘시칠리아를 상징하는 프린트의 패치워크’란 테마에 이보다 더 충실할 순 없을 듯하다). 이번 컬렉션은 프린트뿐 아니라 꽤 다양한 실루엣이 눈에 띄었는데 이는 스페인, 아라비아, 노르만, 프랑스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하우스의 장인정신을 최대로 발휘해 시폰, 조젯, 데님 등 폭넓은 소재를 한데 조합한 기술력 또한 인상적이었다. 다만, 돌체 앤 가바나가 1993년 선보인 컬렉션에서 직접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쇼에 등장한 아흔여덟 벌이 전부 비슷해 보일 만큼 신선한 요소가 부재한 것이 문제였다. 이탈리아에 바치는 돌체 앤 가바나 듀오의 일편단심 러브 레터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VALENTINO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는 새 시즌 테마를 ‘평등’으로 정하고, 극소수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쿠튀르의 우아함을 수호하는 대신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결과 베이식한 쇼츠와 재킷, 편안한 셔츠, 심플한 데님 팬츠 등 활용도 높고 캐주얼한 아이템과 희망적인 색감으로 이루어진 컬렉션 룩을 대거 선보이며 활기찬 분위기를 선사했다. 변화는 이뿐 아니다. 쇼가 열리는 도시를 파리에서 밀라노로 옮기고, 기품이 넘쳐흐르던 기존 컬렉션 장소 대신 밀라노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상징적 공간이자 폐공장인 폰데리아 마키(Fonderia Macchi)를 쇼 베뉴로 정하며 의미를 더했다. 리바이스와 협업하며 화제를 모은 제품 또한 이날 공개했다. 유스 컬처가 떠오르던 1960년대에 ‘자기표현’이라는 가치에 기반을 두며 인기를 얻은 브랜드이니 이번 컬렉션이 지닌 의미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발렌티노가 밝힌 협업의 이유다. 궁극의 화려함을 자랑하던 기존 컬렉션처럼 탄성을 자아내지는 않았지만,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이 시기에 피치올리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찾아낸 합의점은 꽤 멋지고 쿨했다.

DIOR

여성의 궁극적인 아름다움과 행복을 패션이란 매개체를 통해 감각적으로 구현하는 능력이 탁월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2021 S/S 시즌엔 이탈리아의 진보적인 페미니스트이자 비주얼 아티스트 루차 마르쿠치의 작품을 담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쇼 스페이스에서 장엄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세톁차 9.3의 성스러운 오페라 역시 인상적이었다. “소설가 수전 손택과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그 결과 정교한 엠브로이더리와 플로럴 모티프를 패치워크한 디테일을 기반으로 매우 시적인 쇼가 펼쳐졌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듯한 시폰 가운부터 기모노의 실루엣을 변형한 샹브레 재킷, 날염 프린트 앙상블, 이카트 프린트 데님 팬츠 등 오리엔탈리즘을 가미한 보헤미안 룩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이 밖에 크리스찬 디올이 1957년 일본에서 선보인 컬렉션에서 소개한 바 재킷의 실루엣을 로브로 재해석한 아우터며 2000년대 초반에 히트한 발레리나 슬리퍼 등 하우스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아이템도 눈에 띄었다. 여러모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꼭 어울리는 긍정적인 컬렉션을 완성하고 싶었다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진심이 느껴진 쇼!

SPORTMAX

스포트막스가 긴 시간 동안 두터운 마니아층을 보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클래식한 테일러링에 트렌디한 요소를 녹여낼 줄 아는 영민함과 고루하지 않되 고급스럽게 디자인을 풀어내는 섬세함. 이번 시즌에는 말라골리 고유의 감각이 정점을 찍었다. 자연스럽게 주름진 소재와 가늘고 길게 떨어지는 실루엣, 과감한 드레이핑과 오버사이즈 아우터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멋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 것. 그라치아 말라골리는 쇼 노트에서 편안한 분위기와 사이키델릭한 무드를 오가는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입기 편하면서도 미적 완성도가 높은 룩들은 그의 말을 완벽하게 뒷받침했다. 창립자 아킬레 마라모티(Achille Maramotti)의 설립 의도에 따라 정교한 재단과 과감한 직물 실험, 믹스 매치,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며 무사히 50주년을 넘긴 스포트막스의 앞날을 기대하게 만드는 쇼였다.

DAVID KOMA

데이비드 코마는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운동선수가 됐을 거다. 그의 형은 프로 테니스 선수이며 어머니는 전직 체조 선수다. 그도 다양한 스포츠에 능한데 그 중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테니스를 즐겼다. 이런 성장 배경은 디자인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특히 ‘테니스 팔찌’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테니스 선수 크리스 에버트의 일화가 데이비드 코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시그니처인 날렵한 보디 콘셔스 실루엣과 테니스의 만남은 매력적인 결과물로 완성됐다. 브이넥 니트 스웨터와 플리츠스커트, 클래식한 엠블럼, 테니스 라켓 모티프 이어링, 코트를 연상시키는 크리스털 네트 드레스 등 아주 직접적인 상징을 풍부하게 사용했다. 거기에 구조적인 뷔스티에, 컷아웃, 테니스 팔찌를 닮은 크리스털 라인 장식으로 우아한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그래픽 로고로 젊은 감각을 추가했다. 비록 디지털 런웨이로 쇼를 감상해야 했지만, 곧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 그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기에 충분했다.

SALVATORE FERRAGAMO

“올봄에는 집에 틀어박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고전 영화를 다시 감상했습니다. <마니(Marnie)>(1964), <새(The Bird)>(1963), <현기증 (Vertigo)>(1958) 같은 작품 말이에요. 이번 컬렉션은 <현기증>의 초현실적 색 포화도를 반영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폴 앤드루의 말처럼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새 컬렉션은 히치콕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기묘한 색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특히 애시드 오렌지와 브라운, 버건디와 은은한 핑크의 고급스러운 조합은 이번 시즌 컬렉션 중 가장 인상 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몸의 곡선을 따라 흐르는 동시에 낙낙한 느낌을 주는 실루엣은 모던하기 그지없으며, 발등이 깊게 파인 고전적인 형태의 펌프스 힐이나 얇은 가죽끈을 엮어 만든 슬링백 힐은 슈즈 부문 디렉터로 저력을 드러내던 2년 전의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시선을 끄는 장치도, 요란한 이벤트도 없었지만 조용하고 묵묵하게 나아가는 폴 앤드루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RICK OWENS

이번 시즌 역시 파격 그 자체였다. 전 세계가 함께 겪고 있는 역경을 디자이너 릭 오웬스는 더욱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현했다. “옷으로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죠. 서로에게 보내는 작은 메시지입니다.” 그는 코로나 19, 돌이킬 수 없는 지구온난화, 미국 대통령 선거 등 부정적인 현재 상황을 극복하고 강하게 맞서 싸우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주 반항적인 룩을 선보였다. 코로나19 상황을 대변하는 듯한 마스크,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사이하이 부츠, 파격적인 핑크와 레드, 독창적인 형태로 솟은 어깨 장식으로 이루어진 룩을 입은 모델들은 마치 미래에서 온 전사 같기도 하고 사이버 세상에 존재하는 게임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번 시즌 역시 상업적인 측면은 고려하지 않은 듯한 그의 옷들은 전위적이지만, 디자이너가 보내는 응원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힘이 솟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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