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ORGIO ARMANI

한국을 떠나올 때만 해도 국내에 코로나19의 감염 확진자는 불과 30명 정도였다. 밀라노엔 단 한 명의 확진자도 없었다. 하지만 밀라노 패션위크가 진행되는 닷새 사이 세상이 변했다. 한국엔 하루에 1백 명 단위로 확진자가 증가했고 이탈리아는 이를 매일 속보로 다뤘다. 일정 마지막 날, 밀라노에 확진자가 나왔다는 속보를 전달받았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결국 게스트 없이 쇼를 진행했다. 쇼의 후반부엔 중국에서 영감을 받은 아카이브 피스 12벌을 선보였다. 2009년과 2019년 봄 시즌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었다. 그 누구보다 큰 아픔을 이겨내고 있을 조국에 보내는 작은 응원이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평상시처럼 조용히 걸어 나와 손님들 자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새로운 평범함(New Normal)'이라 불리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 삶의 예고편을 보는 기분이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쇼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때도, 지금도, 간절하게 바라본다.

ANTONIO MARRAS

안토니오 마라스 쇼엔 늘 동화적인 서사가 빠지지 않는다. 이번 시즌에는 디자이너의 오랜 뮤즈이자 스승, 마리아 라이(Maria Lai)가 컬렉션의 핵심 요소를 제공했다. 실을 엮어 경이로운 작품을 만든 마리아 라이 그리고 실을 꿴 룩으로 매 시즌 컬렉션을 완성하는 안토니오 마라스. 누구보다 특별한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둘은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요정에 관한 것. 안토니오 마라스는 이번 시즌, 마리아 라이의 요정을 자신의 고향 런던으로 데려갔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1980년대 런던. 고스, 펑크, 로맨티시스트가 공존하던 격변의 시대. 그물 스타킹, 러플 드레스, 타탄체크, 버클 부츠와 비비안 웨스트우드 식으로 스타일링한 데님 점프수트엔 모두 스승의 작품을 새겨 넣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다. 마리아와 안토니오가 함께 있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마리아 라이는 2013년 세상을 떠났다) 이 둘이 마음을 맞대고 완성한 전시는 아직 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타에 위치한 국립 중세 근대 미술관에서 진행 중이다.

ALBERTA FERRETTI

시대의 흐름을 읽는 건 중요한 일이다. 더군다나 패션에는 암묵적인 규칙 같은 트렌드가 존재하니까. 하지만 알베르타페레티 급의 디자이너는 이를 깔끔히 무시해도 좋다. 알베르타 페레티만이 할 수 있는 것, 브랜드가 갖고 있는 강점을 매 시즌 업그레이드하기만 해도 성공이 보장될 테니까. 알베르타페레티는 이번 시즌, 트렌드라는 흐름에 몸을 싣기로 결정한 듯했다. 1980년대 스타일의 오버사이즈 재킷에 플리츠 팬츠를 매치한 수트, 볼드한 골드 주얼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헤본 옷으로 차려입은 모델들은 센‘ 언니’ 포스가 넘쳐흘렀다. 알베르타 페레티 식의 데이웨어에 반기를 들고 싶지 않지만 그녀의 강점인 이브닝 웨어에 더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과하디 과한 러플 드레스, 크리스털을 촘촘하게 장식한 오간자 드레스는 뼛속까지‘페레티!’를 말하고 있었다. 메탈릭 실버미니드레스, 넉넉한 핏의 가죽 플리츠팬츠도 예쁘긴 하지만 이자벨 마랑이나 베르사체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룩이다.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면 조금 뻔하더라도 다음 시즌에는 고전적인 알베르타 페레티의 옷을 보고 싶다.

GCDS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시즌 GCDS 컬렉션은 눈 둘 곳을 찾기 힘들어 고통스러웠다. 일본 만화에서 영감을 받은 줄리아노는 곰 인형 비키니와 성인 만화물을 프린트한 드레스를 선보였다. 이번 시즌 그는 정신을 다잡은 듯했다. 과장을 보태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하늘색 새틴 블레이저와 크리스털 스트랩 비키니 톱, 보이프렌드 데님과 롱부츠의 조합은 1990년대 팝 스타를 연상케 했다. 짧은 치파오, PVC 소재의 티어드 스커트는 남들의 시선 따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도전해볼 만한 수준이었다. 근간의 GCDS 컬렉션에 비하면 이번 시즌 룩은 모두 심의 규정을 준수했다. 물론 2019 S/S 시즌,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가슴 세 개 달린 여신상을 쇼장에 세우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애교로 받아줄 수 있다.

SPORTMAX

스포트막스 쇼에서 확실하게 보고 갈 수 있는 것. 잘 재단된 롱 코트, 가죽 베스트, 휴가를 떠날 때 꼭 챙기고 싶은 맥시 드레스. 그라치아 말라골리는 이번 시즌 퓨처리즘에서 영감을 받았다. 1990년대 스타일로 눈두덩 전체에 은빛 아이섀도를 바른 메이크업, 귀가 뾰족하게 드러나도록 스타일링한 머리는 스포트막스에서 볼 수 없었던 뷰티 룩이다. 다행히(?) 옷은 안전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고상해 보일 수 있는 니트 플리츠 드레스에 강인한 인상을 더해준 가죽 베스트, 간결한 니트 투피스와 긴 장갑을 매치한 룩은 스포트막스 식 럭셔리가 분명했다. 컬렉션 후반에 등장한 퓨처리스틱한 룩은 1990년대 개봉했던 공상과학영화의 코스튬처럼 우스꽝스러웠다. 특히 실버 보까지 더한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장식 벨벳 턱시도 수트는 데이비드 보위나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MILIO PUCCI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브랜드에 새 바람을 불어넣는 방법은 여러 가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교체하거나 지난날 토즈, 베르사체 그리고 현재의 몽클레르처럼 ‘게스트 디자이너’를 들이는 것. 에밀리오 푸치는 앞으로 몇 시즌 동안 젊은 디자이너에게 컬렉션을 맡기겠다 발표했다. 첫 번째 주자는 코셰(Koch )의 크리스텔 코셰. 농도 짙은 컬러와 현란한 프린트가 시그니처인 에밀리오 푸치는 섹시하고 진취적인 여성복을 만들곤 했다. 몸에 꽉 맞는 수트, 데콜테 라인이 드러나는 블라우스, 마이크로미니 드레스와 보태니컬 프린트 파자마 수트가 하우스를 대표했다. 코셰는 여기에 스트리트 감성을 더했다. 에밀리오 푸치 특유의 페이즐리 프린트는 티셔츠와 레이스 스커트에 더해졌고, 미니드레스는 캐주얼한 폴로 드레스로 재해석됐다. 브랜드의 스테디셀러인 트윌리 스카프는 블랙 드레스를 입은 모델의 다리에 가터벨트처럼 연출됐다. 에밀리오 푸치의 고객 평균 연령을 열 살 정도 낮출 수 있는 컬렉션임은 분명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코셰 같지도, 그렇다고 에밀리오 푸치가 떠오르지도 않았다는 거다.

PORTS 1961

패션위크 일정 마지막 날 첫 쇼를 관람하는 건 늘 힘들다. 그래서 밀라노 디자이너들은 최고의 에스프레소를 내어주곤 한다. 하지만 에디터의 잠을 깨운 건 에스프레소가 아닌 컬렉션이었다. 내년에 60주년을 맞는 포츠 1961은 지난 9월, 유명 스타일리스트이자 <인터뷰> 매거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칼 템플러를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했다. 신선한 뉴스였다. 컬렉션은 그렇지 못했지만 말이다. 칼 템플러의 포츠 1961은 현란했다. 변형한 피셔맨 니트, 동그란 실루엣의 코쿤 케이프, 드레이프 드레스처럼 클래식에 기반을 둔 룩에 과한 요소가 더해졌다. 지나치게 크고 선명한 장미 프린트, 출처를 알 수 없는 여자의 초상, 볼드한 체인 목걸이와 커다란 드롭 이어링이 한데 어우러졌다. 게다가 거의 모든 룩에 커다란 실크 스카프를 매치했다. 모두 분리한다면 매혹적일 수 있겠지만 칼 템플러의 스타일링은 그렇지 못했다. 쇼를 살린 슈퍼히어로는 카이아 거버. 그녀가 입은 흰색 파이핑 드레이프 드레스는 포츠 1961 그 자체이면서도 새로웠다. 지난날의 포츠 1961이 그리워진 순간이었다.

PHILOSOPHY DI LORENZO SERAFINI

로렌조 세라피니의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열광할 만한 컬렉션이었다. 어깨가 봉긋하게 솟은 드레스, 커다란 코르사주를 단 벨벳 셔츠와 프릴 블라우스, 반짝이는 플랫폼 부츠, 부드러운 크림색 실크 드레스는 당장 카드를 꺼내 들 만한 아이템이었다. 로렌조 세라피니는 이번 시즌 특별함과 자기표현에 중점을 둔 컬렉션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룩은 매력적이지만 그 말엔 동의할 수 없었다. 자기표현, 개인의 개성에 중점을 둔 컬렉션이라기보다 필로소피에서 늘 볼 수 있는 스테디셀러를 잘 조합해놓은 듯했다. 대신 이전에 볼 수 없던, 품을 요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옷 한 벌을 완전히 완성한 후 염료에 담그는 딥 다잉 기법으로 염색한 벨벳 블라우스와 트렌치코트는 새로운 시도였다. 하지만 ‘필로소피 걸’은 딥 다잉 셔츠보다 오스트리치 퍼 숄과 파스텔 핑크 재킷에 더 마음이 갔을 것이다. 에디터 역시 그랬으니까.

ETRO

남미 카우보이, ‘가우초’에게서 영감을 받은 에트로는 전형적인 카우보이 룩에 하우스의 시그니처를 더한 컬렉션을 보여줬다. 라이딩 팬츠와 롱부츠, 프린지 장식으로 마무리한 카디건, 페이즐리 프린트를 더한 실크 스카프와 이리나 샤크의 몸에 완벽하게 맞던 섹시한 턱시도까지. 모두 에트로가 실패한 적 없는 카드다. 베로니카 에트로는 ‘오트 보헤미안’을 지향했다. 느슨한 핏의 라이딩 팬츠, 카우보이 모자와 완벽히 어울리는 러플 드레스, 금사가 섞인 재킷과 베스트에도 에트로 하우스의 재단 실력이 녹아 있었다. 그렇다면 왜 칠흑같이 어두운 런웨이를 고수한 걸까? 어두운 배경이 금빛 수트를, 새빨간 드레스를, 흩날리는 판초를 돋보이게 하긴 했지만 더 효과적인 대안(텐트 밖 화창한 날씨?)이 있어 이해가 가진 않았다. 의문은 쇼가 끝날 무렵 풀렸다. ‘단체복’ 피날레를 고수하는 에트로는 이번 시즌 트렌치코트를 선택했다. 소매와 끝단에 페이즐리 프린트를 새긴 트렌치코트를 입은 모델들은 하나같이 에트로가 선보이는 새로운 가방, ‘블랙 페가소’를 들고 있었다.

MSGM

MSGM은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발랄함’을 담당한다. 그런데 올해 마시모 조르제티는 호러영화에 사로잡힌 듯했다. 지난 1월 선보인 남성복 컬렉션에 이어 이탈리아 영화감독 다리오 아르젠토와 또 한 번 손을 잡은 것. 기숙학교 유니폼이 연상되는 플리츠스커트와 보이프렌드 핏의 블레이저, 앞코가 네모난 메리제인 슈즈가 등장했는데 거기엔 <서스페리아>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고양이> <페노미나>의 스틸 컷과 포스터가 더해졌다. 정작 에디터의 위시리스트에 오른 건 MSGM 클래식이다. 과장된 러플 장식의 베이비 돌 드레스, 모델의 워킹에서 무거움이 느껴지던 롱 시퀸 드레스, 목 끝까지 플리츠가 잡힌 블라우스, 흰색 양말과 매치한 클리퍼. 눅눅하게 젖은 머리, 어딘가 뚱한 표정, 새빨간 립스틱을 꽉 채워 바른 모델들의 얼굴까지 지극히 MSGM다웠다. 호러영화는 옷이 아니라 극장에서 보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DOLCE & GABBANA

이번 시즌, 쇼장 앞엔 인스타그램에서 주목받고 있는 1인 시위자(?), @dudewithsign이 돌체 앤 가바나의 수트를 입고 A‘ m I #DGEnough? (저, 충분히 돌체 앤 가바나스럽나요?)’ 라는 사인을 들고 서 있었다. 계획된 행위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목은 끌었다. 쇼장 안엔 또 다른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다. 돌체 앤 가바나의 슈메이커, 크로셰 장인, 재봉사, 주얼리 세공사가 각자 워크숍을 차려놓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번 시즌 돌체 앤 가바나는 컬렉션을 완성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하우스 장인들을 찬양했다. 여체를 강조한 코르셋과 속살이 비치는 레이스, 오간자보다는 포근한 니트, 레이스 셔츠, 남성복에서 영감을 받은 알파카 코트, 시어링처럼 무거워 보이는 니트 코트가 등장했다. 섹시함보다는 편안함, 관능미보다는 은밀함에 초점을 뒀다는 듀오. 쇼 당일엔 밀라노에서 코로나 19 확진자가 처음 확인됐다. 돌체 앤 가바나는 우리 모두가 곧 타의적으로 ‘격리’되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STAYatHome에 돌체 앤 가바나보다 완벽한 컬렉션은 없었다.

MISSONI

에디터는 오랫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미쏘니를 사랑해왔다. 미쏘니 특유의 자유분방함, 니트가 주는 포근함과 섹시함, 안젤라 미쏘니가 보여주는 여성상, 환경보호를 위한 노력 모두를 응원한다. 늘 명쾌한 메시지를 컬렉션으로 풀어내며 장소, 룩, 퍼포먼스로 보는 이에게 감동을 전할 줄 아는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 역시 여성의 힘과 자기 인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안젤라 미쏘니. 런웨이엔 커다란 베레모를 쓰고, 몸에 꼭 맞는 피케 셔츠에 와이드 팬츠를 입은 모델이 등장했다. 미쏘니이기에 가능한 스타일링이라 생각했다. 간혹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가늠할 수 없는 룩(이를테면 튜닉 드레스와 레깅스의 조합)이 집중력을 흐트러뜨렸지만 좋은 것이 더 많았다. 이브닝 룩으로 손색없던 메탈릭한 컬러의 롱 카디건, 수트나 드레스 소매 위까지 올라오는 니트 장갑, 지지 하디드가 입은 오버사이즈 가운은 남성 고객도 탐낼 게 분명했다. 지난 시즌처럼 강렬한 메시지는 없었지만 오랜 팬을, 미쏘니의 충실한 고객을 만족시키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MOSCHINO

이탈리아는 패션에 있어 장인정신, 헤리티지, 전통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밀라노의 디자이너들은 현대적인 기술과 장인정신, 하우스의 시그니처와 자신의 취향, 오래된 것과 미래적인 것 사이에서 끝없는 줄다리기를 한다. 물론, 휘둘리지 않는 디자이너도 있다. 제레미 스캇은 항상 자신이 가장 신나는 컬렉션을 선보인다. 이번 시즌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코로나 19 사태가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는 지구, 끊이지 않는 내전, 꺼지지 않는 산불이 코앞에 닥친 문제였다. 제레미 스캇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었을 법한 파니에 드레스, 1960년대를 상징하는 미니스커트를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보여줬다. 특별한 의미를 담진 않았다. 하지만 환호하는 관중, 일주일 내내 본 것 중 가장 밝은 얼굴로 워킹을 하던 지지 하디드의 모습에서 제레미 스캇의 큰 그림을 읽을 수 있었다. 즐거움, 웃음, 행복. 제레미 스캇은 이래저래 골치 아픈, 상처받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었다. 쉴 틈 없는 스케줄에 지쳐 있던 에디터 역시 어린아이처럼 환호하며 쇼를 즐겼다.

BOSS

보스는 미니멀리즘의 대표 주자다. 늘 짙은 네이비, 블랙, 화이트를 중심으로 컬렉션을 완성하고 디테일보다는 실루엣, 절제된 동시에 정확한 재단에 힘을 싣는 브랜드다. 라일락색 카펫이 깔린 쇼장이 생경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남성복, 더군다나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브랜드에서 라일락색 수트를 선보이는 것(의외로 아름다웠다), 지브라 프린트를 가미하는 것, 프린지 장식을 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다. 글로만 보면 거부감이 들 수 있지만 보스 식 지브라 프린트는 꽤 그럴 듯했다. 특히 아이보리 컬러 수트 위에 걸친 지브라 프린트 코트는 오피스에서도, 이브닝 웨어로도 제 몫을 할 룩이다. 그렇다고 브랜드의 정수를 잊은 건 아니다. 담백한 네이비 컬러 트렌치코트, 부드러운 커피색 스커트 수트는 보스 그 자체였다. 정작 본인은 늘 그렇듯 올 블랙 차림으로 등장했지만 잉고 윌츠는 이번 시즌 보스 컬렉션에 사상 가장 많은 컬러를 사용했다. 어쩜 그는 변화를 꾀하는지도 모르겠다.

VERSACE

인비테이션엔 거울이 들어 있었다. 인스타그램의 노예인 에디터는 쇼장으로 향하며 본능적으로 ‘거셀’을 찍었다. 쇼장 입구엔 거울로 만든 홀이, 쇼장엔 게스트를 라이브로 스트리밍하는 LED 스크린이 설치됐다. 지난 시즌 정글 드레스를 입은 제니퍼 로페즈를 등장시키며 인스타그램을 폭파했던 베르사체는 이번 시즌 쇼장을 찾은 게스트들의 ‘거셀’로 인스타그램을 도배할 계획이었다(모두가 그 계획에 기꺼이 동참했다). 베르사체는 처음으로 남성/여성 컬렉션을 함께 선보였다. 타 디자이너에 비해 늦은 감이 있지만 베르사체는 본래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브랜드가 아니다. 혼성 컬렉션을 선보인다고 해서 유니섹스 룩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대신 남성과 여성 버전의 핫핑크 수트, 지브라 프린트 셋업, 섹시한 이브닝 룩은 그 누구보다 화끈하게 보여줬다. 웬만한 티셔츠보다 짧은 드레스를 입은 켄달 제너가 쇼의 마침표를 찍었다. 피날레 인사를 기다리고 있을 때 LED 스크린에 등장한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컴퓨터 화면이 꺼지듯 한순간에 사라졌다. 사이버 세상에만 실존하는 존재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N°21

시퀸, 오스트리치 퍼, 무거운 체인, 잘 재단한 셔츠와 코트, 태피터 스커트. 누메로벤투노를 대표하는 수많은 키워드. 알레산드로 델라쿠아는 사랑하는 게 많은 디자이너다. 10 주년을 맞는 브랜드로서 기념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을까? 그가 사랑하는 코드만 모아 컬렉션을 완성해도 찬사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날을 돌아보는 일은 사치였다. 지난 시즌 옷을 입는 방식으로 장난을 쳤던 그는 이번에 프로포션으로 재미를 더했다. 코발트블루 셔츠는 슈퍼 오버사이즈로 재해석됐고, 스쿱 넥은 명치까지 깊게 파였다. 지나치게 짧아 드레스나 톱으로 규정할 수 없는 룩이 등장했고 아무 장식 없는 담백한 피코트는 모델 발등에 닿을 듯 길었다. 앞코가 날렵한 슈즈엔 두꺼운 체인 스트랩이 더해졌고 오스트리치 퍼 코트엔 손목을 가죽으로 묶은 셔츠가 매치됐다. 알레산드로 델라쿠아는 단 한 벌의 아카이브 피스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같은 날 밤 열린 파티장에서 사라졌다. 누메로벤투노 최고의 룩을 입은 손님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알레산드로 델라쿠아다운 회고전이었다.

TOD’S

밀라노를 대표하는 브랜드들의 세대교체가 끝나지 않았다. 보테가 베네타의 다니엘 리, 마르니의 프란체스코 리소 그리고 토즈의 발테르 키아포니. 키아포니가 토즈에서 첫 여성복 컬렉션을 선보였다. 토즈는 이미 여러 시즌 동안 훌륭한 기성복과 액세서리 라인을 선보인 바 있다. 미우미우, 구찌, 보테가 베네타를 거쳐온 그는 과연 어떤 미래를 설계하고 있을까? 헐렁한 보이프렌드 재킷, 대충 둘러맨 스카프, 새파란 코듀로이 팬츠와 하늘색 셔츠. 첫 번째 룩이 나오자마자 신인 디자이너에 대한 의구심은 사라졌다. 뒤이어 허리가 잘록한 라이딩 코트, 포플린 셔츠와 함께 입은 1950년대 스타일의 가죽 드레스, 헤링본 소재의 스리피스가 등장했다. 토즈에서 쉬 볼 수 없던 데님 팬츠, 오버사이즈 호보 백, 진주 체인 목걸이는 새로운 (=젊은) 고객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가죽 액세서리를 만들고 남은 조각은 1970년대 스타일의 패치워크 코트와 스커트로 다시 태어났다. ‘편안하면서 고급스러운 이탈리아의 취향’을 보여주고 싶었다던 그는 뜻하는 바를 모두 이룬 듯하다.

MAX MARA

막스마라 쇼장에 <올드보이> OST 수록곡 ‘Farewell, My Lady’가 흘렀다. 프런트 로에 앉아 가슴에 손을 얹었다. 때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차지한 지 고작 열흘 뒤였다. 이탈리아의 작은 영화관에서 <기생충>을 상영하고 이 나라를 대표하는 브랜드의 쇼장에 박찬욱 감독의 영화음악이 울리다니.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막스마라 2020 F/W 컬렉션은 넓고 깊은 겨울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여성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겨울의 바다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춥고 거칠다. 선장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바람 들 곳 없이 재단된 세일러 코트, 로프로 허리를 단단히 고정한 후드 코트, 귀까지 덮는 비니는 필수다. 그렇다고 여성성을 포기할 수 없는 일. 거친 파도를 형상화한 러플 장식이 데님 셔츠의 어깨, 단단한 치맛단, 다운 점퍼에 더해진 이유다. 막스마라는 겨울 항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튼튼하고 우아한 유니폼을 제안했다. 항해는 자신 없지만 크림색 세일러 코트와 함께하면 그 어떤 풍파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SALVATORE FERRAGAMO

카를 구스타프 융은 한 에세이에서 여성을 일곱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사냥꾼, 어머니, 여왕, 현자, 정부, 신비주의자, 처녀.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이 글을 정독한 폴 앤드루는 사무실로 돌아와 오프라 윈프리, 미셸 오바마처럼 실존하는 강인하고 용감한 여성의 초상을 무드 보드에 붙였다. 여성성과 지속 가능성. 오늘날 던져진 가장 큰 화두. 폴 앤드루는 이를 적절히, 지극히 살바토레 페라가모 스타일로 풀어냈다. 롱 실크 드레스, 점잖은 데님 스커트, 군더더기 없는 점프수트와 가죽 케이프는 무드 보드에 붙은 모든 여성의 일상에 녹아들 룩이었다. 하우스의 시그니처 역시 빼놓지 않았다. 타이츠 위에 입은 체인 스커트는 페라가모의 체인 프린트에서, 포니테일을 묶은 리본은 바라 슈즈에서 영감을 받았다. 가죽 액세서리는 사장될 위기에 처한 재고를 업사이클링해 제작했다. 어디에선가 보고 들은 것을 조합해 컬렉션으로 완성하는 디자이너들도 많다. 스스로 학습해 해석하고 받아들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재탄생시키는 이는 드물다. 폴 앤드루는 후자에 속한다. 1979년생, 이제 40대 초반인 그의 앞날에 믿음이 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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