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아메리칸 허슬>은 인물들을 믿을수록 뒤통수를 맞는 영화다. 관객을 홀리는 배우들의 변신부터 심상찮다. 첫 장면부터 대머리가 된 크리스천 베일이 열심히 부분 가발을 붙이며 희대의 사기꾼 얼바인으로 분하느라 바쁘다. 섹시한 에이미 애덤스가 또 다른 사기꾼 시드니로 등장해 그와 팀을 이루고, 사랑의 ‘밀당’을 벌인다. 얼마 안 있어 FBI에 체포되지만 더 큰 건수를 바라는 디마소 요원(브래들리 쿠퍼)은 이 잡범들을 이용해 거물 범죄자를 잡을 함정수사 계획을 세운다. 세 사람의 사기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동안 시드니의 사랑을 얻기 위한 두 남자의 경쟁도 치열해진다. <아메리칸 허슬>에는 이리저리 얽힌 사기극이 들통 날까 반신반의하는 재미뿐 아니라, 삼각관계에 놓인 인물들이 끊임없이 사랑싸움을 하는 로맨틱 코미디의 재미도 어우러진다. 그러다 막판에는 다른 카드로 관객의 허를 찌른다. 제대로 한 방 먹이는 멋진 사기 영화인 셈이다.

공개되자마자 호평이 이어진 <아메리칸 허슬>은 지난 1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미국배우조합상 시상식에서 앙상블 연기상을 수상했다. 미국배우조합상을 받으며 대표로 수상 소감을 말한 브래들리 쿠퍼는 모든 공을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에게 돌렸다. 골든글로브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에이미 애덤스도 감독을 바라보며 “여배우를 위한 놀라운 역할을 만들어주어 고맙다”는 소감을 남겼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제니퍼 로렌스와 <파이터>로 무명 배우에서 벗어나 여우조연상을 품에 안은 멜리사 레오도 캐스팅해준 감독 덕분에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다. 브래들리 쿠퍼가 그를 두고 “배우들의 감독”이라고 말한 건 과장이 아니다. 데이비드 O.러셀은 배우들이 변신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드는 걸 좋아한다. <아메리칸 허슬> 초고를 읽었을 때는 주인공을 크리스천 베일로 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바로 배우의 집을 방문했다. 천하의 배트맨에게 여자들에게 벌벌 떠는 소심한 사기꾼 역할을 맡기다니! 베일은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며 기꺼이 20그램 가량 살을 찌웠다. 남자를 보조하는 야무진 조연 캐릭터만 맡아왔던 에이미 애덤스에게는 남자들을 쥐고 흔들 권력을 안겼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동네 사이코 커플로 이미 한차례 망가진 적이 있는 브래들리 쿠퍼와 제니퍼 로렌스는 <아메리칸 허슬>의 더 망가지는 배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모두 무대만 제대로 갖추어지면 몇 억 관객도 거뜬하게 속일 수 있는 최고의 연기 달인들인 것이다. 데이비드 O. 러셀은 배우들이 더 풍부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도록 삶 속에서 고전하는 밀도 높은 캐릭터들을 만들어낸다. <파이터>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아메리칸 허슬>의 모든 인물은 내외적인 문제로 갈등하며 서서히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나간다.

처음부터 데이비드 O. 러셀이 감정이 풍부한 영화를 만들었던 건 아니다. 데뷔작 <스팽킹 더 멍키>는 성적으로 억압된 소년이 근친상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려 논란이 된 블랙코미디였다. 이 영화가 1994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으면서 그는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았다. 조지 클루니와 마크 월버그 주연의 걸프전을 소재로 한 코미디 <쓰리 킹즈>는 호평을 받고 흥행에도 성공한 그의 출세작이다. 그러나 성공은 여기까지였다. 동시대 감독으로 함께 주목받은 스파이크 존스, 웨스 앤더슨, 소피아 코폴라가 꾸준히 경력을 쌓아가는 동안, 스타들이 총출동했으나 흥행에 참패한 2004년작 <아이 하트 헉커비스>를 마지막으로 데이비드 O. 러셀의 소식이 끊겼다. 아내와 이혼하고 양극성 장애 아들을 돌보며 자신의 상처 안에 머물던 그를 다시 할리우드로 불러들인 이는 <쓰리 킹즈>의 주인공을 맡았던 마크 월버그였다. 자신의 제작사에서 <파이터>를 준비 중이던 그는 데이비드 O.러셀에게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그가 그려온 쿨한 캐릭터와 전혀 다른 애잔한 밑바닥 인물들이 가득한 영화였다. 동시에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각색 작업도 진행됐다. 상처받은 인물들이 과거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간다는 면에서 두 이야기는 비슷했다. 데이비드 O. 러셀은 자신의 인생담을 두 이야기에 녹여냈다. 그가 긍정적이고 따뜻한 영화를 들고 와 생존 소식을 알리자 영화계는 열렬히 환영했다. 세상을 보는 눈은 더 성숙해졌고, 이야기는 더 깊이가 생겼고, 영화 테크닉은 더 정교해졌다. <파이터>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 이어 완성한 <아메리칸 허슬>은 이 귀환이 반짝하고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하게 하는 영화다. 게다가 데이비드 O. 러셀은 미국인의 삶과 정신을 누구보다도 디테일하게 영화에 담아낸다. 당분간 미국 영화계에서 그를 넘어서는 이야기꾼을 찾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