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공주>를 다른 이에게 추천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가 상영되는 두시간 동안 온몸의 피가 마르는 경험을 누군가에게 적극 권하긴 어려우니까. 하지만 이 영화를 본 것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며칠이고 영화 장면이 남긴 잔상에 괴로워하면서도, 과거로 돌아가 영화를 볼지 말지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고민할지언정 결국 보는 쪽을 고르겠다고 마음먹게 하는 게 <한공주>다. 한공주는 사춘기 소녀고, 극악한 성범죄를 당한 뒤 전학을 왔다. 불운이나 불행이라는 단어는 그녀의 경험을 매우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기가 막히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세상이 경악할 범죄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일제히 그 사건을 이야기한다.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어떤 영화는 충실하게 사건을 알린다. <한공주>는 그와는 조금 다른 길을 택했다. 사건 이후에도 당사자의 삶은 계속된다. 영화는 그걸 말하고 싶었다. 전학을 온 공주는 새 친구를 만나지만 끝난 줄 알았던 사건의 잔재는 잔인하게 그녀의 현재를 쫓는다. 그녀의 미세한 표정, 짤막한 대사 몇 줄에도 관객의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탄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이수진 감독의 섬세한 연출에 조응하는 천우희의 눈이다. 맑았다가 흐려졌다가, 고통과 집념이 공존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오랫동안 공을 들여 캐릭터를 고찰한 흔적이 엿보인다.
“고민이 아주 많았어요. ‘만약에 현실에서 이런 일을 겪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게 쉬운일일까? 아닐 것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계속 감정을 숨기는 연기를 하면, 관객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수많은 물음표 사이에서 단 하나 지키고 싶었던 건 제 진심이었어요. 주인공에 대한 진심, 공주라는 역할에 대한 책임감이요.” “제가 생각하는 공주는 대단히 강한 아이예요. 그런데 이 친구를 연기하는 내가 힘들어서 지쳐버리면 이야기가 끝까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싶었어요. 영화를 보신 분들이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사실 촬영하면서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건 이미 각오한 일이었거든요. 그보다는 모티프가 된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에게 혹시 상처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마음이 훨씬 컸어요. 역할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촬영 들어가서는 앞뒤 재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영화를 통해 헤아릴 수 없는 아픔과 삶에 대한 절절한 의지를 표현해낸 그녀지만, 배우라는 타이틀을 벗고 나온 천우희의 일상은 스물여덟의 청춘, 딱 그만큼 평범하고 또 특별하다. 20대 후반이 되니 시끌벅적한 곳보다 카페에서 조곤조곤 수다 떠는 게 더 좋다고 맞장구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다정한 남매의 대화라고 하긴 어렵지만 꼬박꼬박 동생에게 잔정이 묻어나는 문자를 보내는 오빠와 딸의 연기 생활을 늘 지지해온 부모님을 둔 그녀는 스크린 밖에서 그야말로 보통의 삶을 살고 있다. “얼마 전 내한한 브루노 마스 공연에 꼭 가고 싶어서 직접 티케팅까지 했거든요. 그런데 공연 날이 평일이라 일 때문에 가지 못했어요. 결국 오빠에게 표를 넘겼죠. 아, 물론 티켓 값은 받고요.(웃음) 근데 조금 지나자 오빠가 약 오르게 문자를 보내는 거예요. ‘노래 완전 잘해’, 이러면서요. 그저 부러웠어요.”
배우로서 받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못지않게 그녀를 빛나게 하는 건, 곁에 있는 사람들과 만들어나가는 이런 매일의 사소한 기억들일 것이다. 청년 실업을 걱정하고, 좋아하는 가수에 환호하고, 서른이 되기 전에 좀 더 열심히 놀아보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그녀는 지금을 살고 있다. 가늠할 수 없을 누군가의 끔찍한 상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놓지 않으려는 강인한 마음가짐도, ‘보통의 행복’을 아는 그녀이기에 연기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써니>를 찍은 이후로 특별한 연기활동 없이 2년을 보내면서 고민이 많았어요. 이 일을 더 해야 하나, 다른 걸해야 하나 갈등도 하고요. 그런데 이번에 그런 고민이 모두 해소되었어요. 뭐랄까, 제가 공주에게 의지하고 많이 기댔어요. 내가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고 산 사람인가 돌아보게 되고, 주변 사람들의 사소한 모습 하나하나가 고맙게 느껴지더라고요. 공주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어요.”
사실 그녀의 얼굴은 그간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연극반에 들어간 그녀는 경기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이후 줄곧 연기자로 살아온 착실한 배우다. 처음 주연을 맡은 옴니버스영화 <사이에서-생수>에서는 섬에서 스쿠터를 배우고 밧줄 하나에 의지해 바다에 뛰어들며 영화를 찍었고, <써니>를 하면서는 ‘진짜 본드를 마신 것 같다’는 격찬(?)을 받으며 대중에게 ‘본드걸’로 각인되었다. 어떤 영화에 출연하든 그녀는 제 몫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했다. <마더>에서 주인공의 친구인 ‘진태’의 여자친구로 등장했을 때도, <우아한 거짓말>에서 온화한 성품을 지닌 주인공의 친구 역을 맡았을 때도 그랬다. 좋은 연기는 러닝타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온 그녀에게도 <한공주>는 큰 산이었다. 그 산을 넘고, 천우희는 스스로 배우로서 나아갈 다음 장을 열었다.
그녀의 다음 영화는 <카트>다. 88만원 세대를 대표하는 알바생 겸 취업준비생 역할이다. 드디어 몇 년간 해온 고등학생 역할에서 벗어났지만, 이번엔 교복 대신 마트 유니폼을 입는다는 게 함정이다. 하지만 그녀는 조급히 변신을 꿈꾸기보다 아직 느긋하다. “그냥 지금처럼만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전 제가 한 발 한 발 딱 맞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서 만족하거든요. 정신 못 차리게 빠르지도, 답답하게 느리지도 않은 지금이 좋아요. 최고의 목표요? 연기를 평생 하는 것. 이제 시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