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분이나 일찍, 생각보다 너무 일찍 스튜디오에 도착한 송승헌은 촬영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점심도 걸렀다고 했다. 샌드위치 하나면 충분하다는 말만으로도 그의 성격이 읽혔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세워두고 몇 시간을 관찰하고 나니 새삼 송승헌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순조롭지 않고 지루한 시간의 흐름에도 그는 단 한 번도 불편함을 언급하지 않았다. 촬영에 필름 카메라를 디지털 방식으로 개조한 카메라를 사용한터라 모델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다시 핀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한번 카메라 앵글 안에 들어가면 그 시간이 얼마든 컷 사인이 날 때까지 ‘멈춤’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로봇도 아니고,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부동 자세로 있기가 어디 쉬울까. 불평불만이 생기기에 충분한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생각보다 어렵네요” 한마디 하는 게 전부다. 그러곤 조용히 피팅 룸으로 들어가 서둘러 다음 옷으로 갈아입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잖아요. 더 잘, 더 멋지게 담아주시려는 건데 짜증 내면 오히려 저한테 손해죠. 그래도 예전에 어릴 때는 막 불평하고 그랬어요. 세월의 더께가 쌓여서 그런지, 요즘은 이해되는 상황에 그때는 왜 그렇게 예민하고 까칠하게 굴었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느긋하고 여유로워진 것을 두고 나이 덕을 본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바르게’ 타고난 사람이다.

도트 프린트 네이비 트렌치코트 하이더 아크만(Haider Ackermann), 블랙 티셔츠 릭 오웬스(Rick Owens),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카키색 플라워 프린트 재킷과 베스트, 팬츠 모두 구찌(Gucci), 부츠와 반지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빗살무늬 니트 톱 다미르 도마(Damir Doma), 블랙 팬츠 닐 바렛(Neil Barrett), 팔찌 티에르(Thiers).

언밸런스 컷 블랙 점퍼 릭 오웬스(Rick Owens).

그레이 재킷 꼼데가르송(Comme des Garcons), 언밸런스 컷 블랙 점퍼 릭 오웬스(Rick Owens). 블랙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자수 디테일 화이트 셔츠와 스트라이프 베스트 모두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

트렌치코트 마르셀로 불론(Marcelo Burlon), 블랙 티셔츠 릭 오웬스(Rick Owens), 팔찌 티에르(Thiers), 팬츠와 반지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네이비 점퍼와 팬츠 모두 루이비통(Louis Vuitton).

블랙 자수 장식 재킷 발맹(Balmain), 블랙 티셔츠 릭 오웬스(Rick Owens), 광택이 있는 진 플락진((Plac Jeans), 반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레오퍼드 셔츠 마커스 루퍼(Markus Lupfer), 광택이 있는 블랙 진 플락진(Plac Jeans).

이날 촬영에는 담배 피우는 신이 필요했다. 영화 <인간중독>의 ‘김진평’이 자신의 마음을 누르고 눌러, 벼락처럼 꽂힌 자신의 사랑을 날려버려야 할지 고민할 때처럼.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김진평의 사심을 끌어내고 싶었다. 10년 넘게 금연해왔다는 그의 손가락에 담배 한 개비가 쥐어진 순간, 그는 담배를 건넨 촬영팀 어시스턴트에게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담배를 받았다. 예의 바른 척, 겸손한 척 굴려는 게 아니라 몸에 밴 습관으로 자연스럽게 감사의 표시를 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송승헌이라는 이름값은 거대하고, 그 이름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많았겠지만 그는 결코 급하거나 소란스럽지 않은 소박함을 지니고 있다.

“저 재미없는 사람 맞아요. 특별히 쇼핑을 좋아하지도 않고, 맛있는 집을 찾아다니지도 않아요. 운동을 좋아하지만 건강을 위해 하는 거지, 보여주기 위해 몸을 만들겠다는 의도는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참 좋아하는 게 없네요. 이건 좀 억울한가, 싶은데요.(웃음) 그냥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 만나는 게 제일 좋아요. 무엇보다 카메라 앞에 있으면 누군가와 교류해야 한다는 직업적인 압박감에 사로잡히는데 친구들한테는 그냥 나 자신을 내보여도 되니까요. 시간이 쌓일수록 알게 되는 사람은 많은데,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은 좁혀져요. 그만큼 내 사람의 범위가 좁아지는 거겠죠.”

배우에겐 무엇보다 정신적인 여유가 필요하다. 송승헌은 그 여유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 특별한 미팅이 아니면,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그를 목격하기도 쉽지 않다. “주로 혼자 있어요. 친구들이 놀러 오지만, 대부분 회사에 다니니까 퇴근 후나 주말에 집중되죠. 그렇다고 오늘은 뭐 해 먹을까 고민하는 주부 스타일도 아니에요. 요리는 즐기지도 않고, 잘 해 먹지 않아요. 빨래랑 청소는 직접 하죠. 어쩔 때는 하루 종일 쓸고 닦을 때도 있어요. 독립한 지 오래됐는데 한 번도 도우미를 부른 적이 없어요. 제가 해요, 혼자서.” 그러다 <시네마 천국>이나 <언페이스풀> 같은 좋아하는 영화 한 편 보면 금세 하루가 간단다. 이런 말을 쏟아내는 중에도 격렬한 말투로 말한다거나 힘주어 말하는 대목은 없다. 한결같이 ‘도’와 ‘미’ 사이를 오갈 뿐, 송승헌의 일상에 대단한 반전은 없다는 말이다.

송승헌은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배우로서 ‘정상’의 자리를 지켜왔다. 다작한 것은 아니지만, 1년에 한 작품 정도는 꾸준히 선보였고, 작품의 성격도 제법 다양하다. 문제는 그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보다 우리가 원하는 그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반응이 더 좋았다는 것. 예를 들면 드라마 <가을동화>나 <마이 프린세스> 등 로맨스물의 왕자님 같은 캐릭터를 연기했을 때다. 반듯하게 이등분되는 얼굴선이 잘생긴 남자 배우의 대명사로 군림하는 동안, 그의 필모그래피는 그리 완만한 상승 곡선을 그리지 못했다. 매번 팬들이 원하는 작품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종종 일탈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연기한 세월에 비해 대표작이 넉넉하지 못한 건 아쉽다. 단 하나라도 제대로 된 대표작이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연기에 대한 욕심이나 열정으로 보건대 그가 만족할 만한 결과는 아닌 것이다. “평생 연기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뒤에야 비로소 두 번째 목표가 보이기 시작했죠. 대표작도 좋고, 인기도 좋은데 그보다는 연기할 때 배우로서 임한 과정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부끄럽지 않았는지에 무게를 두게 됐어요. 제가 무너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견뎌냈다면, 결과가 조금 아쉬워도 다음 작품을 위해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인간중독>은 그런 면에서 스스로를 다지고 다진 끝에 꺼내놓은 작품이다. 김대우 감독이라는 그늘 밑에 자신을 쑥 밀어 넣고는, 어떠한 편견이나 거부감 없이 맡겨버렸다. <인간중독>의 티저 포스터가 공개된 날, 송승헌은 하루 종일 검색어 순위 상위권을 장악하며 기대감을 높였다. “어떤 작품보다 고민이 많았던 작품이지만, 반대로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임한 영화이기도 해요.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가장 컸고, 무엇보다 현장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 ‘내가 잘 가고 있나’라는 의문 자체를 말끔하게 지워줬죠.” 티저에 대한 반응이 좋은 건 다행이라면서도 지나치게 노출에만 관심이 쏠리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마케팅 면으로는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어쩐지 영화의 본질보다 외양에 치중하는 것 같아 조금 불편했던 모양이다. “관계의 형성부터, 출발점부터가 부도덕한 셈이죠. 이 세상에서 절대로 만나면 안 되는 두 사람이 만난 거니까. 아내가 있는 남자와 남편이 있는 여자가 나누는 사랑이라니요. 그런데 둘에겐 그 위험한 사랑의 무게를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처가 있어요. 칼 끝에 올라선 아슬아슬한 상태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탐닉하죠.”

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다. 군대 관사가 주요 배경인 만큼, 제복 차림의 송승헌은 영화의 캐릭터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그동안 그가 지향해온 남성적이면서도 여성 팬의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캐릭터. 마치 어려운 숙제를 끝낸 것처럼, 언젠가는 그가 뛰어넘어야 할 허들을 이제 한 개쯤 뛰어넘은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는 작품 선택에서 융통성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된다’와 ‘안 된다’의 경계가 높고 굳건했죠. <인간중독>은 여러 면에서 작품 선택의 범위가 한 뼘 더 넓어졌다고 해야 하나… 제가 준비해놓은 별다른 보호막도 없는 것 같은데, 별로 두렵지 않은 걸 보면 말이에요.”

작품마다 늘 사랑받는 쪽이었던 그에게, 영화가 개봉하고 난 뒤에 관객이 달콤한 사탕을 내어줄지 어떨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송승헌 자신이 스스로를 믿었던 것처럼, 한번쯤 관객도 그의 선택에 믿음을 얹어주어야 할 타이밍이 아닐까. 줄곧 괜찮은 배우로 꼽히고, 섭외 1순위 리스트에 올려져 있으면서도 송승헌이 제대로 드러난 작품은 손에 꼽을 만큼 빈약했으니까. <인간중독>을 기점으로 그는 살짝 숨죽여 자신을 관찰하는 중이다. 그동안 작품으로 얻은 멍과 한숨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으므로.

“연기는 한계가 없는 예술인 것 같아요. 정해진 모양새도 없고, 지켜야 할 룰도 없고. 배우 자신과의 힘겨루기랄까. 결국 자기가 만들어놓은 덫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한번 뛰어볼 만한 경기죠.” 20대의 송승헌이 희망과 절망 사이를 격렬하게 오갔다면, 30대의 송승헌은 배우라는 중심축만 세워놓았을 뿐, 무형의 지도를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은 다음 작품을 만나기 위한 소중한 기회가 되고, 그 기회를 만들기 위해 현재에 충실하고. 어느 순간, 배우 송승헌과 인간 송승헌이 되돌이표를 반복하다 한 지점에서 만나 합체된 것 같은 느낌.
“패션 스타일이나 인기는 세월에 묻히잖아요. 유행이란 건 지나가야 새로운 것이 오고, 스타는 우리 주변에서 늘 탄생하니까. 결국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건 감정을 전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연기는 온몸으로 표현해서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감정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온도를 지켜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