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셔츠 원피스 하쉬(Hache).

화이트 재킷 타스타스(Tasse Tasse), 화이트 원피스 랄프 로렌 블랙 라벨(Ralph Lauren Black Label).

아이보리 시폰 롱 원피스 캘빈 클라인 컬렉션(Calvin Klein Collection).

지난해를 기점으로 많은 것이 변했어요.
그 후에 일어난 모든 일이
제게는 다 처음이거든요.
지금 이 인터뷰도 배우는 과정인 거죠.
이제 시작이니까 그냥 뭐든지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커요.

살다 보면 분명 어떤 순간이 온다.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지만, 크건 작건 한 사람의 삶을 그 일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결정적인 순간. 아마도 임지연에게는 김대우 감독을 처음 만난 때였을 것이다. 감독의 전작 영화 <음란서생>과 <방자전>을 좋아했고, 미팅을 불과 며칠 앞두고 새 영화 <인간중독>의 시나리오를 받아 봤다는 스물네 살의 신인 배우가 캐스팅을 위해 감독을 만날 때엔 기대는 커도 예측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출연작이라곤 단편영화 세 편이 전부인 그녀에게 감독은 미팅 내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욕심은 났지만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잘 안 되려나보다, 아쉬워하고 있는데 덜컥 여주인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 보니 김대우 감독은 미팅 현장에 들어선 임지연을 보자마자 이미 마음을 정했지만, 그 자리에서 단박에 결정을 내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일부러 그녀를 외면했다고 한다. 감독에게도, 배우에게도, 그리고 그 배우가 연기할 ‘종가흔’에게도 운명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여주인공 역을 캐스팅할 때 꼭 신인 배우만 고려한 건 아니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더 감사하고, 놀라기도 했어요. 정말 하고 싶었던 영화지만 한편으로는 ‘왜 나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사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는 이 캐릭터가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영화로 표현될까 하는 식의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어요.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어버려서요. 다 읽고 나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가흔이가 꼭 되고 싶다, 잘해내고 싶다. 간절하면서도 어렵겠다 싶었던 역할에 캐스팅되니까 신기했어요.”

영화감독이 백지상태에 가까운 신인 배우에게 덜컥 1백30분의 러닝타임을 맡기는 데는 몇 가지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선한 이미지가 필요할 수도 있고, 제작비를 고려한 결과일 수도 있다. 오디션에서 본 배우의 연기력에 감명을 받아서 선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배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외모나 풍기는 분위기, 말투와 눈빛,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모든 것이 배역에 척 들어맞아 특별히 상상하지 않아도 이미 주인공으로 분한 듯한 묘한 느낌. 김대우 감독은 임지연이라는 배우에게서 <인간중독>의 여주인공 종가흔을 본 것이 아닐까? 1969년, 군인인 남편을 따라 군 관사에 입성한 말수 적고 아름다운 화교 출신 여자. 어쩌다 한 번씩 내뱉는 말은 놀라울 정도로 가식도, 꾸밈도 없지만 여전히 전부 말할 수 없는 아픔 혹은 비밀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시사회가 열리기 전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만 아는 채로 만난 임지연을 보며 어렴풋이 왜 그녀가 종가흔일 수밖에 없는지 느낄 수 있었다. 임지연은 소위 말하는 ‘분위기 미인’이다. 하얗고 고운 피부와 대비되는 검고 큰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보는 깊은 눈매는, 속을 알 수 없다 싶다가도 때론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해 뜨끔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마치 가흔이 그렇듯이 말이다. 베트남전쟁의 고독한 영웅이자, 장군의 딸로 남편의 입신양명에 목을 매는 부인과 영혼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대령 김진평을 사로잡은 건 바로 그 눈과,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에서 나오는 그녀만의 관능적인 아우라였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가흔이 가진 관능미가 제일 욕심이 났어요. 그 면모가 확 드러나지 않고 은근하게 사람을 이끄는 식이어야 하는데, 그걸 표현하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처음에는 외적인 모습으로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려니까 제 외모와 어울리지도 않고, 어색했어요. 그러다 대사를 곱씹고 두 사람의 관계에 빠져드니까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영화에서 안개 낀 밤, 가흔의 관사 밖에 가득한 새장을 둘러보던 김진평은 우연히 그녀와 처음 마주치게 된다. 옅은 색 파자마를 입고 남편의 상사 앞에 선 그녀는 우아하고 신비로운 한편, 어쩐지 위험하고 또 도발적이다.

우연하고 강렬한 만남 이후 급격하게 불붙은 두 남녀의 사랑은 영화 중반에 이르러 대담하고 격정적으로 표현된다. ‘무삭제’라는 타이틀을 단 예고편이 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스크린으로 접한 두 사람의 정사 신은 전에 없이 과감하고, 또 솔직하다. 미화되거나 과장되지 않은 그 장면들에서, 가식과 허울 가득한 일상에서 벗어나 ‘진짜 감정’을 갈구하는 진평과 가흔의 절박한 심정이 날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 속 이야기에서 잠시 빠져나와 지금껏 대중 앞에 한 번도 등장한 적 없었던 한 여배우의 연기로 그 장면을 보면, 솔직히 대단하다 싶다. 쉽지 않은 결정이자 대담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가흔으로서는 그 순간이 전에 없이 진심이었을 거예요. 그동안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본 적 없는 여자가, 그동안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을 표현하는 거잖아요. 그 감정에 젖어드니까 촬영장에 남자 스태프가 몇 명이 있는지, 내가 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촬영하고 있는지,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하고 찍었어요. 물론 감독님과 송승헌 선배님, 촬영 스태프 모두 제가 그럴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고요.” 그녀는 처음 하는 연기에 두려워하거나 초조해하는 대신, 작품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곱씹었다. 이를테면 연애나 사랑에 관한 생각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많았어요. 내가 이런 사랑을 해본 적이 있었나?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 그런 생각에 결론은 없었지만, 사랑하는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느껴요. 어떤 상황에서도요.”

스물다섯 살의 임지연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배우가 되고 싶어 홀로 입시를 준비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동기들과 뛰고 구르면서 연기를 배우고 영화를 알아갔다. 또래의 친구들이 사회초년생으로 세상을 알아갈 때, 그녀 또한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었다. 떨리기도 하지만, 첫 촬영 때 그랬던 것처럼 차분해지려 애쓴다. 그런 다짐이 이 젊은 배우를 대담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이 작품을 찍기 시작한 지난해를 기점으로 많은 것이 변했어요. 그 후에 일어난 모든 일이 제게는 다 처음이거든요. 지금 이 인터뷰도 배우는 과정인 거죠. 연기하는 친구들이 인터뷰할 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조언해주기도 했어요.(웃음) 이제 시작이니까 그냥 뭐든지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커요. 잘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