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현이 입은 원피스 오스트발트 헬가슨 바이 분더샵앤컴퍼니(Ostwald Helgason by BoonTheShop & Company), 재킷 미샤(Michaa), 반지 겟미블링(Get Mebling), 구두 스티브 매든(Steve Madden). 천정명이 입은 베스트와 팬츠, 화이트 셔츠, 셔츠 칼라 핀, 화이트 도트 패턴 블랙 슈즈 모두 디올 옴므(Dior Homme).

천정명이 입은 네이비 셔츠와 딥 올리브 그린 보트넥 니트 스웨터, 레드 브라운 팬츠 모두 구찌(Gucci). 김소현이 입은 원피스 안티포디움 바이 분더샵앤컴퍼니(Antipodium by BoonTheShop & Company), 톱 유돈 초이(Eudon Choi).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뭐, 지금보다 속 편하게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하는 기억만 남겨두고 슬프고 화나고 나쁜 기억은 모조리 없애버리는 거다. OCN에서 8월부터 방영 예정인 10부작 드라마 <리셋>은 괴로운 기억을 스스로 지운 한 남자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겪은 끔직한 일로 여자친구를 잃고 그 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해 검사가 되어 온갖 강력 범죄만 골라 맡는 ‘우진’이 그 주인공이다. 우진은 몸을 사리지 않고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자신의 첫사랑을 빼앗아간 범인을 잡지 못하고, 사건은 공소시효가 지난다. 범인을 잡지 못한 우진은 차라리 자신이 당한 범죄의 기억을 ‘리셋’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드라마에서 흔하디흔하게 등장하는 기억상실증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지우는 거다. 그게 가능한 건 우진의 특별한 능력인 최면술 덕분이다. 그는 범인을 잡을 때 쓰던 최면술로 자신의 기억 속 악몽 같은 순간을 지워버린다. <리셋>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기억을 지운 뒤부터 시작된다. 기억을 지운다고 이미 벌어진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범죄 현장에 자신의 존재를 암시하는 증거물을 남기는 연쇄살인범 X가 등장하며 지워진 기억이 하나 둘 다시 떠오르고, 범인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나 누구게?’

천정명이 최면술로 범인을 잡는 검사 ‘우진’을, 그리고 김소현이 그의 첫사랑 ‘승희’와 현재의 우진 앞에 나타난 첫사랑과 똑 닮은 날라리 여고생 ‘은비’를 연기한다. <리셋>은 이 두 배우에게, 그리고 <리셋>을 연출한 김용균 감독에게 용기가 필요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우선 김용균 감독에게 <리셋>은 첫 드라마 연출작이다. 그간 <와니와 준하> <분홍신> <더 웹툰: 예고 살인>을 연출한 그가 만든 드라마라니, 얼마나 쫄깃한 스릴러일지 기대된다. 김소현은 이번 작품으로 주인공의 아역이 아닌 여주인공을 맡았다. 게다가 전혀 상반되는 성격의 두 인물을 연기한다. “승희는 우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소녀예요. 반면에 은비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워요. 처음에는 연기하기가 무척 어색했어요. 헷갈리기도 하고요. 한 가지 성향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반항적이면서도 속이 깊고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거든요. 감독님이 혼란스러워하는 제 마음을 알아채시고는 일단 다양한 것을 한 번 해보라고 하셨어요. 일단 해보니까 조금씩 풀려가는 기분이에요. 지금은 재미있게 잘 찍고 있어요.” 그리고 김소현은 상대 배우인 ‘친근하고 멋있는 천정명 오빠’ 덕에 좀 더 힘을 내는 중이다. “얼마 전에 오빠랑 은비가 우진을 믿게 되는 감정을 표현하는 신을 찍었어요. 그런데 오빠 눈을 보고 있으니 진심으로 믿음이 가는 거예요.” 의지가 많이 된다는 김소현의 말에 쑥스러운지 작은 목소리로 “진짜? 고마워”라고 말하는 천정명은 어느새 현장에서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선배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우진이라는 역할은 그가 지금껏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어른스러운 남자다. 그래서 그에게도 <리셋>은 도전이다. “스릴러라는 장르도, 이렇게 계속 한 가지 사건에 진지하고 골똘히 몰입하는 역할도 처음이에요. 범인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추리해야 하죠. 지금껏 연기해온 캐릭터와 많이 달라요. 처음에는 우진을 파악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작가님에게 우진이라는 친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물었죠. 작가님이 말하기를, 이 친구는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어린 시절 겪은 범죄가 아니었다면 검사가 되지 않았을 거라는 거예요. 오로지 그 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해 검사가 된 거고, 첫사랑의 부모님에게 꼭 범인을 잡겠노라 약속하고 그 사건에만 매달려 사는 거죠. 아마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게 될 것 같아요.” 두 배우의 도전, 그리고 이 둘이 빚어낼 의외의 케미, <리셋>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민하는 천정명

그는 요즘 <리셋> 현장에 가는 것이 신난다고 한다. 지금껏 맡아보지 않은 역할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고, 포커페이스부터 극도로 흥분된 상태까지 진폭이 큰 감정을 연기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도 그렇다. 그는 요즘 영화도 부쩍 더 많이 본다. 어떤 날에는 극장에서 하루에 연이어 두세 편 볼 때도 있다. 장르 불문, 규모 불문 영화라는 영화는 모조리 챙겨 보는 중이다.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의 어리바리 연하남이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대한민국 육군의 빨간 모자를 쓴 ‘악마 조교’가 되었었다. 제대하고 돌아온 그는 여전히 청년과 어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어쩌면 그가 최근에 보여준 모습이 영화 <밤의 여왕> 속 여전히 어리바리한 남편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제 그는 진짜 어른을 보여주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며 준비하는 중이다. 범인을 잡기 위해 추리에 추리를 거듭하는 우진이라는 캐릭터는 그가 지금껏 보여준 캐릭터들보다 나이도, 마음도 쑥 자라 있다. 그리고 우진을 연기하는 지금의 천정명도 과거보다 좀 더 치열하고 진지하게 작품을 준비하는 중이다. “볼수록 궁금해지는 매력적인 대본 때문에도 그렇고, 오랜만에 하는 드라마라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제가 벌써 30대 중반이 되었더라고요. 정신 바짝 차리고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마흔을 맞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이때 열심히 공부해서 마흔을 준비하려고요.”

천정명은 요즘 욕심이 많아졌다. 연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더 해야 하는 시기라는 걸 깨달은 참이다. 그래서 다른 배우들의 인터뷰를 열심히 탐독하고 술자리에서 선배 배우가 하는 조언도 놓치지 않고 새겨듣는다. “다른 배우들의 인터뷰를 읽다 보니 작품을 대하는 배우들의 태도가 저마다 다르다는 걸 알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느낀 건,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알고 생각해야 한다는 거예요.” 상대역인 열여섯 살의 배우 김소현도 그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된다. “어제 촬영하다 소현이한테 왜 연기를 시작했는지 물었어요. 저는 당연히 부모님 권유로 시작했을 거라고 짐작했죠. 그런데 자기가 하고 싶어서 시작했다는 거예요. 순간 뜨끔했어요. 저는 어느 날 갑자기 길거리 캐스팅 되면서 이 바닥에 들어왔거든요. 연기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호기심에 시작했죠. 그리고 소현이만한 나이 때는 진로에 대한 고민이라곤 모르고 놀기만 했어요. 뭐 하나 집중해서 하는 일이 없었고 미래에 대한 별다른 생각도 없었죠. 만약 제 인생을 리셋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정신 상태로 딱 소현이 나이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면 아주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배우로서 더 잘 해내면서 말이죠.”

천정명은 지금 조용히 성장통의 시간을 보내는 눈치다.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 늦은 사춘기를 겪느라 흘려보낸 학창 시절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성장통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방황하는 대신 좀 더 단단하게 자신을 단련하는 중이다. 그래서 그의 시간은 요즘 간단명료하게 나뉜다. 연기와 운동. 연기하지 않는 시간에는 죽도록 땀 흘리며 시간을 보낸다. 부쩍 생각이 많아진 요즘, 운동하는 시간만큼은 아무 생각하지 않고 그저 땀을 흘린다. 그러니까, 몸을 만드는 재미가 아니라 땀 흘리는 느낌이 좋아 운동을 하는 것이다. 촬영이 없는 날에는 운동을 마치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며 다른 배우의 연기를 지켜본다.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선배 배우들을 보면 일에 미쳐 살아서 그 자리에 올라간 게 아니라, 천천히 성실하게 자신의 실력을 쌓아가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40대엔 지금보다 괜찮은 배우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김소현의 모험

그러고 보면 배우란 불공평한 면이 많은 직업이다. 시간을 들여 죽도록 연습한다고 해서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인생의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서 다양한 감정을 연기하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 <보고싶다>에서 김소현은 극 중 윤은혜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다. 그냥 활짝 웃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러웠던 이 여고생은 어느 날 잔인하고 끔찍한 일을 당한다. 카메라는 김소현의 넋이 나간 눈만을 보여주었다. 그 눈빛만으로도 그 잔인한 사건은 충분히 설명됐다. 그리고 이제 겨우 열여섯의 김소현은 <리셋>에서 1인 2역을, 그것도 누군가의 아역이 아닌 여주인공을 맡았다. “처음에는 은비라는 아이에 대한 확신이 없다 보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뒤죽박죽 연기했어요. 눈치도 많이 보고 카메라 앞에서 얼어있었죠. 그 아이의 감정은 알겠는데, 제가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갈팡질팡하는 저를 감독님이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해보도록 이끌어주셨어요. 그래서 지금은 은비를 많이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저보다 더 나이 많은 인물을 주로 맡았어요. 그래 봤자 고등학생이지만.(웃음) 그럴 때면 영화나 책을 보며 캐릭터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애썼는데 이번에는 현장에서 만들어보고 싶어요. 다른 것을 참고하기보다는 감독님과 대화하며 여러 스태프의 이야기도 듣고, 현장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포착해보려고요. 마치 모험을 떠난 기분이에요.”

인터뷰를 위해 마주한 열여섯의 김소현은 예뻤다. 질문을 던지면 가끔 수줍어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조근조근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노련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답을 내놓는다. <리셋>의 촬영장에서 김소현이 사랑받는 막내라는 천정명의 설명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소현이는 성실해요. 나이는 어리지만 현장에서 자신의 몫을 충분히 다 하죠. 연기만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스태프들의 먹을 것도 살뜰하게 챙겨요. 정말 사랑받는 친구예요.” 사실 천정명과 김소현은 3년 전에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다. 김소현은 드라마 <짝패>에서 천정명의 어린 시절 동생을 연기했다. 그런데 <리셋> 촬영을 위해 만난 자리에서 그는 김소현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3년 동안 부쩍 자란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그 꼬마가 엄마 손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연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일찌감치 자신의 꿈을 찾아 ‘모험가’로 자랐을 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학교가 아닌 다른 세상을 탐험 중이지만, 여전히 김소현은 열여섯 중학생이다. “공부랑 연기, 다 잘해나가고 싶어요. 내년에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하는데 고민이 많아요.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할지, 예술 고등학교에 가야 할지도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요. 벌써부터 대학 진학을 놓고 고민하는 친구도 많은데 저는 아직 고등학교조차 정하지 못했어요. 학교 친구들은 제게 큰 힘이 되어줘요. 예전보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었지만 제가 연락을 자주 못 한다고 서운해하거나 저를 멀리하지 않아요. 오히려 늘 제 숙제를 도와줘요.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에요.” 친구가 든든한 버팀목인, 아직은 어린 10대 김소현의 미래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리라는 것을 짐작해볼 따름이다. “언젠가 한 선배님이 이런 얘기를 해주셨어요. ‘인생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배우는 것을 즐기고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 한다. 자신이 뭐든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성장은 멈춘다’고요.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김소현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생각하며 잘 자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