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보 촬영을 앞두고 최강희와 만났다. 그녀가 휴대폰 사진첩에서 몇 장의 일러스트 컷을 꺼내 보여줬다. 반라의 소녀들만의 은밀하고 사적인 시간을 담은 일러스트레이터 야마구치 아이의 작품이었다. 상대적으로 노출에 자유로운 일본 작가의 작품이어서 더 그랬는지, 수위는 제법 높았다. 그러나 누군가를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농염하거나 뇌쇄적이지도 않았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소녀들이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일러스트였다. 최강희가 보여준 일러스트는 남자의 눈으로 본 여자가 아닌, 여자 스스로 자신의 순간에 충실했고, 아무런 의심 없이 내면을 열어놓은 존재들처럼 보였다. 야마구치 아이의 일러스트는 우리 화보의 모티프가 됐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미나 문방구>와 드라마 <7급 공무원>을 끝으로 최강희는 공식적인 작품 활동을 멈췄다. 그사이 어느 즈음에 그녀가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소속사를 떠나 새로운 사람들과 일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에 대해 들은 얘기가 없었다. 보통 배우들의 잡지 인터뷰 화보는 영화나 드라마의 시작과 끝을 계기로 이뤄진다. 늘 그랬던 건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관행처럼 그렇게 굳어졌다. 좋은 점이 많다. 눈앞의 작품을 앞에 두고 얘기하다 보면, 나눌 수 있는 얘기가 풍성해진다. 최근 배우가 집중하고 몰입한 연기, 되돌아볼 수 있는 이전의 작업들, 좋든 싫든 고조된 감정적 상태와 근황까지 아우를 수 있다. 작품 홍보 좀 한다고 탓할 건 없다. 작품을 만드는 게 배우의 일이니, 그 일을 얘기하는 건 나쁜 게 아니다. 아쉽긴 하다.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인터뷰를 하는 배우에게 중첩되는 질문들에 답하는 건 참 지루한 일일 것이다. 관성적으로 답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해야 할 얘기가 정해지지 않은 보통의 대화에서 진심을 찾고 싶은 건 인터뷰어도 마찬가지다. 운 좋게 최강희와는 아무 제약 없이 만날 수 있게 됐다.
사람들은 최강희가 4차원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적어도 평범하고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건 분명했다. 최강희, 하면 라디오 DJ를 하면서 한 얘기들, 보통의 여배우라면 쉽게 결정하기 힘들었을 선의의 행동들이 먼저 떠올랐다. 최강희에 대한 그런 인상은 잡지 화보들을 통해서 심화됐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같은 몽환적인 눈빛과 분위기의 화보들은 그녀가 비현실을 사는 요정 같은 이미지를 갖는 데 큰 몫을 했다. 영화 <애자>는 그런 최강희를 다르게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다. 싸우고, 미워하고, 서로를 지긋지긋해하는 애증의 모녀 관계, 어느 순간에는 내 살과 당신의 살이 구분되지 않는 원형적인 관계, 서로의 남편이고, 연인이고, 아들이고, 딸인 그 관계를 연기하는 배우 최강희는 비로소 무중력의 공간에 사는 막강 동안의 외계 소녀가 아니라 뼈와 살로 빚은 사람 같았다. 이번 화보에 그런 최강희를 담고 싶었다.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이 세상 너머가 아닌 이곳의 누군가를 바라보는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촬영이 끝나고 최강희와 나는 이전과 달라진 눈빛에 대해, 그 밖의 다른 많은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자신에게 이즈음이 충전의 시간이 아니라 방전의 시간을 갖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휴식의 시간이고, 이는 생의 다음 문을 열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가혹하고 잔인한 말에 무뎌진 세상을 바꾸자는 취지로 모인 한 사회단체 활동에 열심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빛을 발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초조하게 빚쟁이한테 쫓기듯 연기하는 대신,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배우가 되면 좋겠다는 얘기도 나왔다.
인터뷰 다음 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메일을 한 통 보낼 테니 읽어봐달라고 했다. 여러 번 메일을 읽고 난 후, 나는 녹취해둔 인터뷰 파일을 삭제했다. 그녀의 메일을 받은 것은 나지만, 그녀가 말을 걸고 싶은 건 세상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인터뷰어는 통역관이다. 굳이 통역이 필요 없을 때도 있다. 자기만의 문 앞에 선 최강희가 당신들과 나누고픈 얘기들을 전한다.
사실 그동안 아주 건강하고 멋진 시간을 보냈어요.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참 오랜만인데, 촬영하는 동안 지난 나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두려움도 들고, 또 안심도 되더라고요.
다음 작품은 제 안에서 새로운 아바타를 꺼낼 수 있을 때 선택할 거예요. 지금껏 나의 모든 것을 거짓 없이 보여줬다고 해도 대중이 본 모습은 온전한 저일 수는 없을 거예요. 많은 역할을 했고, 일상의 모습처럼 보인 것 또한 편집이라는 과정을 거친 이야기였을 테니까. 온전히 배우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저는 스스로 최강희라는 아바타를 비교적 잘 만들며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닌 시간을 통해 생겨난 모습이지만요. 우연한 기회에 운 좋은 행복을 누리고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제가 진심으로 존중하는 한 언니의 도움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럴 수 있게 된 걸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어느 날 그 언니와 가벼운 대화 중일 때였어요.
“강희야, 넌 지금까지 최강희라는 캐릭터를 아주 잘 만들었고, 꽤 훌륭하게 해냈어. 그런데 이제 또 다른 최강희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렇다고 이전의 너를 버리면 절대 안 되지. 그게 대중이 좋아하는 모습일 텐데. 변신하라는 게 아니고 그것은 곱게 접어 필요할 때 꺼내 쓰고, 이제는 또 다른 최강희라는 아바타를 만들어보는 거야.” 또 다른 나를 입어본다…. 그 순간 언니의 말이 제게 실존하는 문처럼 그려졌어요. 그 말은 결국 저를 살리는 말이 되었죠. 그즈음 전 몹시 지쳐 있었고, 외로웠고, 사라지고 싶은 게 아니라 사라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지금 제가 무엇을 바꾸고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 후로 저는 스르르 바뀌고 있습니다.
변화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소속사도 바뀌었고요. 아직 오랜 시간을 함께하진 않았지만 포근하고 따뜻한 곳인 것 같아요. 아픔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좋아하는 것이 바뀌었고, 나의 시간이 바뀌었고, 마음이 바뀌었죠.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사랑하게 되었고요. 이제는 책을 읽지 않아요. 기회가 되면 다시 책을 읽겠지만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창밖을 보고, 하늘을 보는 시간이 더 좋아요. 반짝이는 밤도 매력적이지만 매일 맞는 새로운 아침은 눈물 나게 아름다워요. 영화도, TV도, 노래도 잠시 떠나게 된 것 같아요. 영화 몇 편은 빼고요. <플립>과 <디태치먼트>는 참 좋았어요.
많은 것이 심플해졌어요. 옷장을 차지하던 옷가지들도 3분의 1로 준 것 같아요. 쉬는 동안 집도 옮겼는데 전보다 조금 작은 집이에요. 덕분에 물건들도 많이 정리가 되었죠. 이태원의 한 카페에 양해를 구하고 몇 주에 걸쳐 인터넷상에 공개하지 않고 벼룩시장을 열었어요. 특별히 좋아하던 옷들과 작은 장난감들은 제가 간직하기로 했고요. 이사 날짜가 맞지 않아 한 달 반 정도 레지던스 호텔에 머물게 되었는데 참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누가 현지인처럼 여행하고 여행자처럼 살아보기를 권했을까요? 여행자처럼 살아보니 서울도 여행지였습니다. 큰 트렁크 하나면 부족하지 않은 삶, 그렇게 가벼운 삶을 살아본 것 같아요. 나는 얼마나 불필요한 것들로 나 자신을 무겁게 했던가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환경이 바뀌면 많은 게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환경이 바뀐다고 많은 것이 달라지진 않아요. 모두가 큰소리로 욕을 한다면 유리컵이 깨지는 정도일까요? 나를 바꿀 차례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아니라 나를 바꿀 차례죠. 말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어요. 비난 같은 거요. 비난은 상대를 죽이기 이전에 나를 죽인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를 죽이는 말이 아닌, 살리는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진정한 말의 폭력은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제게 어떠한 말을 했나 되돌아보게 되었고, 지금은 가장 잘했을 때의 나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기자님에게도 물어보고 싶어요. 평소에 자신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고 계신가요? 저는 자존감이 높지 못해서 모두가 좋다, 예쁘다 해도, 심지어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내게 기대하지 않는 어떤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닌데 몰라서 그렇지”라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칭찬을 내 것으로 만드는 법을 잘 알지 못했죠. 이제는 축복하는 말을 많이 하고 있어요. “아 그렇구나”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많이 긴장하는 편인데, 요즘 제가 깨닫게 된 것을 나누는 강의도 하고 있습니다. 다리를 달달 떨면서요. 예전에는 피하던 것들, 두려워하던 것들을 하나씩 정면으로 마주해서 뚫어 나가는 것에도 재미를 느끼는 요즘입니다. 저한테는 그게 만사형통의 길이더라고요. 그저 모든 것이 술술 잘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뚫고 이제 그만 지나가는 것. 그래야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쉬어가는 시간, 저는 많이 바뀌고 있었고, 많은 것을 버리고 비우다 보니 하고 싶은 것을 알게 되었고, 멈춰 있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것이 명확해졌으니 이제 본업에도 충실하려고요. 지금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얼른 좋은 작품을 만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