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_ 원피스 브루넬로 코치넬리(Brunello Cucinelli), 딥 그린 컬러 스틸레토 힐 나무하나(Namuhana). 천우희_ 블랙 원피스 타임(Time), 블랙 오픈토 슈즈 나무하나(Namuhana), 네크리스와 뱅글 골든제이(Golden J). 염정아_ 드레스 맥앤로건(Mag & Logan), 스팽글 스틸레토 힐 디올(Dior).

 

코트와 체크 톱, 슈즈 모두 디올(Dior).

이웃집 여배우, 염정아

배우의 인생을 예측하는 것만큼 불확실한 도박은 없다. 염정아는 데뷔 후 자신에 관한 모든 기대와 선입견을 배반하며 여기까지 왔다. 미스코리아로 출발해 트렌디 드라마의 주역으로 활약할 때, 그녀에게는 세련되고 냉정한 도시 여자의 이미지가 있었다. 자신을 내던지고 뒤틀어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절박함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진 화려한 여자, 그게 그녀의 이미지였다. 오해였다. 영화 <장화, 홍련>(2003)의 예민한 새어머니 ‘은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배우로서 재평가받은 이후,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캐릭터에 허기진 배우였는지 주장이라도 하듯 다양한 작품에 도전해왔다.

또 다른 반전은 그녀의 사생활이다. 염정아가 TV 토크쇼에 출연해 결혼, 출산, 육아에 대해 얘기하며 보인 소탈한 면모는 즉각 대중의 주의와 호감을 끌었다. 결혼 후 대중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혀가면서도, 한편으로 그녀는 트라우마와 집념의 화신(<로열 패밀리>(2011))이나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억척스러운 여자(<내 사랑 나비부인>(2012)), 유리 천장에 가로막힌 도도한 알파걸이자 치정에 휘말리는 위기의 부인(<네 이웃의 아내>(2013)) 등으로 꾸준히 연기의 지평을 넓혀왔다.

곧 개봉할 영화 <카트>에서, 염정아는 10년 전이라면 아무도 그녀에게 기대하지 않았을, 그러나 최근의 필모그래피를 충실히 섭렵한 팬이라면 그녀가 설득력 있게 그려낼 거라는 걸 결코 의심하지 않을 매력적인 인물을 연기한다. 대형 마트 계약직 노동자 ‘선희’는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다. 성실하고 온순한 그녀는 동료들에 이끌려 마지못해 노조에 가입하지만 결국 가장 오래 투쟁의 현장을 지킨다.

<카트> 배우들끼리 사이가 아주 좋다고 들었어요. 화보 촬영하면서 만담하듯 농담을 주고받는 거 보니까 실제로 그렇구나 싶어요. 김영애 선생님은 워낙 개인적으로도 자주 뵈어요. (문)정희도 성격이 상당히 털털해서 서로 탐색하고 어쩌고 할 필요가 없었어요. 초반에 제작자랑 밥 먹고 술 한잔하면서 바로 친해졌죠. (천)우희는 아직 저를 좀 어려워하는 것 같고요. 우희가 인터뷰할 때 그런 말 하지 않았어요?

너무 좋아하던걸요. 처음에 어려운 사람 같아 보였다는 얘기는 하죠. 아들로 나온 EXO의 디오 군도 염정아씨 첫인상이 무서웠다잖아요. 후배들이 왜 그렇게 보는 걸까요? 내가 뭘 어렵고 무서워. 외모 때문이겠죠. 아니면 그 전에 했던 역할들이나.

<카트>는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출연을 결정했어요? 시나리오를 처음에 읽었을 때는 좀 건조하게 봤어요. 그러다 두 번째 읽을 때 엄청 울었죠. 야, 이거 이 시나리오대로 느낌만 살려서 찍으면 굉장히 감동적이겠다 그랬죠. 하지만 내가 이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많이 들었어요. 저를 믿고 캐스팅 해주신 분들이 있지만, 연기를 그렇게 오래 했어도 이 역할은 부담스러웠어요. 하는 내내 연구를 정말 많이 했고요.

저는 관객으로서 염정아씨 캐스팅에 대해 전혀 의구심을 갖지 않았어요. 최근에 서민적인 역할을 잘해오셨으니. 오히려 그 역할의 정점이 될 거라 생각했죠. 뭐가 그렇게 부담스러웠던 거죠? 극 중에서 가장 변화가 큰 인물이잖아요. 처음에 무지렁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애가 점점 사명감 같은 걸 가지게 되고, 사람들하고 별로 교류도 없던 애가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고. 내가 한 신이라도 놓쳐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관객이 그런 변화에 전혀 공감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극이 무너져버리는 거죠. 내가 글로 읽으면서 느낀 감정을 과연 연기로 전달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감독님하고도 현장에서 의견이 잘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끝까지 잘 마치긴 했어요.

문정희씨에 대해서는 사전에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었나요? 연기 잘하는 배우라 생각했고, 아주 똑부러진다는 느낌? 실제로도 그래요. 게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에너지가 넘쳐. 쟤는 일주일 내내 드라마 촬영하고 오늘도 촬영장에서 바로 온 거잖아요. 그 정도면 쓰러져야 하는데 나보다 훨씬 생생해. 난 집에 있다 왔는데.(웃음) 현장에서 밥도 많이 안 먹어요. 그 힘이 어디서 나는지 모르겠어요. 운동을 해서 그런가봐요.

천우희씨와는 일대일로 붙는 신이 거의 없지만 같이 연기하면서 받은 느낌이 있을 텐데요? 연기 잘하는 착한 동생이에요. 전혀 모난 부분이 없는 아이죠. 상당히 가정교육도 잘 받은 아이고. 평상시에는 참 평범하고 얌전해요.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세거나 그러지 않고.

나름 세 보이던데요? 배우의 기랄까, 그런 게 있던걸요. 있어요?

촬영에 실제 해고 노동자들이 참여한 장면이 있다던데, 분위기가 어땠나요? 처음 보는 광경이었어요. 그분들 참 대단하시더라고요. 우리야 해야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분들은 일 다 끝나고 와 그 밤에 몇 시간을 꼼짝도 안하고 자리를 지키시더라고요. 진짜 집회하는 것처럼. 깜짝 놀랐어요. 그분들로서는 존재를 알릴 흔치 않은 기회니까요. 그러셨던 거 같아요.

요즘은 사회의 뭔가가 잘못됐다고 발언을 하는 게 정치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잖아요. <카트>가 다루는 비정규직 문제, 부당 해고 같은 건 실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고요. 혹시 이런 영화에 출연하는 게 배우로서의 이미지에 영향을 끼칠 거란 생각은 안 들었나요? 영화 다 찍고, 제작보고회 때 그런 말이 나와서 알았어요. 배우로서 연기를 하는 게 제 개인적인 의사 표현이나 주장은 아니잖아요. 정치적으로 보일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어요. 사람이 착하게 살고, 약한 사람 배려하고, 그건 너무 당연한 얘기라 정치적인 거라 할 수도 없고요. 김영애 선생님이 그날 얘기를 하셔서 그제야 나도 ‘아, 이게 그럴 수도 있는 문제구나’ 생각했어요(<카트>에 청소 노동자로 출연한 김영애는 ‘여태껏 정치색을 드러낸 적이 없고, 개인적으로 보수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노동운동 얘기라 해서 망설였는데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그들이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았다. 다른 사람들도 알아줬으면 했다. 사회적 의무감을 느끼며 촬영에 임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극 중에서 선희가 아들이 처한 분란을 무마하기 위해 무조건 상대에게 비는 대신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잖아요. 그런 게 집안의 교육철학이죠. 개인적으로 아이들에게 이것만은 꼭 가르쳐야겠다 생각하는 게 있나요? 굳이 뭘 가르치려 하기보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 하는 걸 따라 하기 때문에 부모가 잘 살면 될 것 같아요. 지금도 그런 걸 많이 느끼거든요. 내가 실수로 내뱉은 잘못된 말을 아이들이 그대로 따라 해요. 여섯 살, 일곱 살인데 말이에요. 우리가 바르게 살면 아이들도 바르게 자랄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정직한 사람이면 좋겠고, 내가 뭘 해야 행복한지 알고, 찾아서 사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남들하고 똑같이 사는 그런 거 말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제대로 알고 노력하는 사람.

예전의 염정아씨는 상당히 도회적이고 ‘난 나야’ 뭐 이럴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어느 순간 그게 바뀌었어요. 옛날엔 좀 그랬던 거 같아요. 캐릭터가 바뀌었어요. 그때도 털털하긴 했고요. 성격이야 어디 가겠어요? 하지만 워낙 가정생활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긴 했어요. 나한테는 그래요. 가정이 원만해야 밖에 나가서도 웃을 수 있죠. 남편한테도 제가 그런 힘을 실어주고 싶어요.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인데.(웃음)

 

 

니트 톱 블루핏(Blue Fit), 스커트 폴 앤 앨리스(Paul & Alice), 슈즈 슈콤마보니(Suecomma Bonnie).

열혈 배우, 문정희

그녀는 어렵게 이름이 난 배우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뮤지컬 배우, 살사 댄서 등으로 활동하다 춤바람 난 사람들의 영화 <바람의 전설>(2004)에 주역으로 출연하며 시선을 모으긴 했다. 하지만 배우로 어딘가에 계약이 돼 아르바이트도 못 하면서 막상 일은 없는 갑갑한 시간을 다시 몇 년 보냈다. 드라마 <연애시대>(2006)의 스타일 좋고 다재다능한 첫사랑 여인 역할이 또 하나의 전기였다. 그후 문정희는 주로 영화보다 소프 오페라의 여주인공으로 더 깊이 각인되었다. 아침드라마 <며느리와 며느님>(2008)의 천덕꾸러기 며느리, 주말연속극 <사랑을 믿어요>(2011)의 꿈 많은 철부지 아내 등이 그랬다. 방송에서 안정적인 커리어를 쌓아간 반면 작품 수에 비해 활동 내용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영화 쪽에서도 최근엔 분위기가 달라졌다. <연가시>(2012)와 <숨바꼭질>(2013)이 연달아 흥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입지가 마련되었다. 특히 <숨바꼭질>의 광기 어린 범죄자 연기는 며느리, 아내, 엄마, 친구로 더 익숙했던 문정희라는 배우를 장르물의 역동적인 주체로 다시 보게 만들었다.

문정희는 취미로 마라톤을 완주하고 살사 댄스 그룹을 만드는가 하면 영어와 프랑스어에도 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누구와든 어떤 주제로든 몇 시간은 너끈히 대화를 주도할 법한 달변과 유머 감각, 그리고 기분 좋은 에너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카트>에서 그녀는 계약직에서 파견직으로 전환한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동료들을 조직해 항의에 나서는 적극적인 인물 ‘혜미’를 연기했다. 그녀에게 썩 잘 어울리는 옷이다.

<카트> 완성본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본 거죠? 어땠어요? 실은 정상적인 관람이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EXO 팬이 4~5천 명이 와서 꽤 소란스러웠거든요. 언론시사회에서 다시 정확히 봐야겠지만 일단 전체적인 인상은, 조금 불편할 수 있는 사회적인 문제를 우리 옆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쉽게 풀었다는 데 대단히 호감을 느꼈어요.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연대가 시나리오 보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끈끈하게 그려졌어요. 부산에서 보신 분들이 굉장히 많이 우시더라고요. 오히려 제가 의아할 정도로요. 기자 분들은 술 당긴다 그러고.

아직 기자 시사 전이라 저는 시나리오로만 봤는데, 거기엔 혜미의 과거가 자세히 그려지지 않았어요. 평범한 노동자가 그런 사건이 벌어졌을 때 혜미처럼 바로 법을 들이대며 조직화에 나서는 게 쉽지 않을 거란 말이죠. 그래서 그녀의 배경이 궁금했어요. 저랑 똑같이 느끼셨네요. 선희(염정아)는 삶이 나와요. 아들, 딸도 있고요. 하지만 혜미의 개인사는 잘 드러나지 않아요. 과연 캐릭터가 보일까? 임팩트가 있을까? 이렇게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과연 관객이 혜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저는 명 필름을 믿었어요. 명필름이 가진 사회적 코드랄까, 영화적인 꼿꼿함이랄까, 그런 것이 <카트>를 만드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하고 결정했죠. 현장에서도 제작자, 감독과 끊임없이 상의하고 고민하며 답을 찾으려고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혜미가 가려진 게 잘됐다고 생각해요. 영화의 속도감을 위해 선희의 삶을 집중해서 보여주는 게 옳은 선택이었던 거죠. 혜미의 역할은 전 직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조를 형성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아줌마들을 이끌어가고, 선희에게 영향을 미치는 걸로 충분했어요.

대부분의 배우들은 작품이 우선이라고 말하면서도 자기 캐릭터를 부각시키기에 급급하죠. 문정희라는 배우는 흘러가는 연기, 받쳐주는 연기에 워낙 능하고, 작품이 요구하지 않는 이상 캐릭터를 돌출시키지 않는 배우인 것 같아요. 욕심부려서 제 캐릭터가 튄다고 저한테 무슨 이익이 있을까요? 저는 콤비네이션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제 캐릭터가 튄다는 건, 글쎄 어떻게 하는 건지 방법도 잘 몰라요. 몰라서 더 안 했을 수도 있죠. 그때그때 그 역할이 가져야 할 포지션이 있어요. 제가 욕심 내고 말고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역할 자체의 운명을 선택하는 게 맞다고 보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는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만약에 제가 속된 말로 ‘따먹어야 하는’ 역할이라면 또 그렇게 하겠죠.

작품을 먼저 보고 거기에 녹아드는 연기를 하려면 배우가 여유가 있어야 하잖아요. 신인 때는 빨리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에 과욕을 부리기도 하고요. 그런데 문정희씨는 처음부터 그런 게 없었죠. 그렇죠. 저는 아무런 타이틀 없이 연극을 하고, 뮤지컬을 하고, 오디션을 봐서 영화를 하고, 오디션을 봐서 TV를 하고, 그렇게 된 케이스거든요. 저를 어필할 수 있는 수단은 작품밖에 없었어요. 그런 생각이 들었죠. 작품이 쉽게 ‘짠’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 기회가 올 때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게 잘하는 걸까. 그런데 제가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배우가 욕심을 부리면 그게 다 보인단 말이죠. 그런 배우가 매력적인 게 아니라, 뜨뜻미지근하더라도 그 중심에 그 역할로 딱 있는 게 멋있어 보여요. 제가 생각하는 존재감이란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염정아씨가 좋고, 천우희가 좋아요. 각자 있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제 삶의 모토는 ‘인생 멋지게 살아보자!’ 이런 게 아니에요. 문정희로 살고 싶어요. 어차피 제가 죽을 때 문정희를 기억하는 사람, 그렇게 많을 거 같지 않거든요? 그래서 관객한테 인정받는 걸 떠나 기쁘게 연기하고 싶고, 스스로 배우로서 양심을 가지고 살고 싶어요. 그 작업물을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있다면 더욱 좋고요. 그게 잘 안 되기 때문에 만날 넘어져서 슬퍼하고 많이 울고 그러는데, 그러다 보면 언젠가 좋아지겠죠. 이미 나눌 기회가 많이 왔고요. 저 연기 욕심 정말 많아요. 그 욕심과 매일 싸워요. 그게 걸러져 작품에 투영돼야지, 문정희로 보이는 건 매력이 없어요.

그 때문에 드라마를 잘 못 보는데 문정희씨는 제가 불편하지 않게 계속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 중 한 명이에요. 아유, 감사합니다. 저는 만날 안돼서 넘어져요. 배우는 현실에 없는 얘기를 현실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다 경험해본 것도 아니고, 매 순간 저를 던진다고 던져봐도 한계가 많아요. 늘 고민해요. 문정희라는 인간의 한계와 만날 싸우고 울고 그러는 거죠.

<카트> 찍으면서 여배우들이 많아서 생기는 특수한 상황은 없었나요? 그게 쉽지 않았어요, 실은. 여배우들 40명이 대기를 하니까요. 보통은 배우들이 가면 공간을 따로 주거나 차에 있거나 그럴 텐데, 우리는 똑같이 마트 유니폼 입고 앞치마 하고 커다란 대기실 세트에서 같이 있었거든요. 근데 그렇게 한번 살아봐야 그 인물들의 세계를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아마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 비슷한 느낌이었을 거예요.

<바람의 전설> 후에 공백기가 있었는데, 그때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하진 않았어요?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죠. 그게 가장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카트>의 절박한 저소득층 얘기가 아주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은 아니었겠네요? 사실 배우가 고소득자이긴 해요. 상위 몇 프로는 그렇죠. 하지만 비정규직이고, 대부분은 수입이 형편없어요. 말이 예술가지 생계가 어려운 사람도 있고요. 그들을 보호할 장치가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요. 하지만 비정규직의 한 사람으로서 이 문제가 비단 마트에서 일하는 분들에게만 국한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살사 팀 바모스(Vamos)을 만들었다고 하던데, 어떻게 진행하고 있나요? 음악은 제 삶에서 떨어뜨리기 어려운 것 같아요. 뮤지션은 아니지만, 내 감성의 많은 부분이 음악에서 나오고요. 라틴 문화에 깔린 서글픔 같은 것이 저랑 잘 맞아요. ‘바모스’는 제가 어차피 살사를 계속 할 거니까 언제든 갈 수 있을 만한 하나의 적을 만들어둔다는 의미에서 결성한 단체예요.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지만 제 파트너와 친구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저도 동참한다는 의미도 있고요.

같이 춤추던 사람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려 애쓰는 것 같아서 이분 좀 의리파구나 생각했어요. 우리나라에서 잘 조명되지 않은 분야고, 댄스스포츠랑 헷갈리는 분들도 많아요. 그러다 보니 댄서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편이고요. <댄싱 위드 더 스타>에 나오는 춤들이 규격화되어 있는 댄스스포츠라면 살사는 라틴댄스에 포함되지만 약간 민속춤 같아요. 하지만 그 안에 자유로움이 있죠. 아… 춤 얘기 하면 3박4일 걸려요, 저는. 아무튼 그런 즐거움이 있어서, 그것을 알리고, 같이 춤추는 친구들을 알릴 좋은 무대가 있으면 제가 앞장서기로 한 거죠.

액션 영화를 찍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몸을 쓰는 배우들이 액션을 할 때 느낌이 다르잖아요. 소문 좀 내주세요. 애크러배틱한 것에 관심 많아요. 저 초등학교 때 기계체조 선수였잖아요. 지금은 춤을 추고. ‘몸 쓰는 게 둔해지면 어떡하지? 나도 그럴 때가 올 텐데’ 생각하면 슬퍼요.

나머지 두 배우와 다르네요. 그분들은 연기 외에는 별 취미가 없는 것 같던데요. 저는 영화, 연기 말고도 관심 있는 게 많아요. 우선 제 삶에 관심이 많고요, 남의 삶에도 관심 많지만 예의를 지켜야 하니까 그건 좀 그렇고.(웃음) 제 삶을 소중하게 여기다 못해 때론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할 정도예요. 세상에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시간이 유한하잖아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여기 사는 내가 참 소중한 거 같아요.

 

 

화이트 터틀넥 톱 그레이 양(Grey Yang), 코트 폴 앤 앨리스(Paul & Alice).

천우희, 피어나다

그녀의 최근작을 기억하는 관객에게, ‘한공주’는 아직도 들으면 눈물 나는 이름이다. 돌이켜 보면 영화 <마더>(2009)에 여고생으로 출연해 정사신을 찍었을 때도, <써니>(2011)에서 본드에 취해 눈을 희번덕거리며 난장을 피울 때도, 천우희는 천우희였다. 연기 잘하는 배우, 주목해야 할 배우, 신 스틸러, 뭐 그런 찬사들이 따랐다. 하지만 그녀를 찾는 곳은 많지 않았다. 천우희는 스크린을 비집고 나오는 송곳 같은 개성을 지녔으되 범용성에 대한 확신은 주지 못하는 배우였다. 하지만 최근 그녀는 인생의 영화를 만났고, 그 한 편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밀양 미성년자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프로 한 걸작 <한공주>(2013) 말이다. 그녀는 의리 있고 당당한 여고생에서 불가항력의 테러를 당하고도 보호받지 못하는 희생자, 비밀을 감춘 우울한 소녀로 입체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올해 가장 유명한 영화라곤 못 하겠으나 중요한 작품에는 늘 이 영화를 통해 관객뿐 아니라 산업 관계자들도 그녀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있다. <카트>에서 천우희는 88만원 세대의 아이콘 ‘미진’을 연기한다. 면접에서 거듭 떨어지고 비정규직 마트 종업원이 된 암담한 청춘이다. 최근작 <우아한 거짓말>에서도 교복을 입어야 했던 그녀가 모처럼 제 세대의 현실로 뛰어든 것이다.

<카트>에서 거의 막내였는데, 선배님들 모시기가 어렵지는 않았나요? (웃음) 저도 처음엔 걱정했거든요. 주요 배우 말고 조연 분도 30~40명 되는데, 그분들도 다 저보다 선배였어요. 그래서 내가 잘해야 되겠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분들이 제가 주눅 들지 않도록 도와주셨어요.

원래 연장자들과 얘기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 편이에요? 오히려 또래나 어린 친구들보다 선배들과 더 잘 맞는 거 같아요. 인생 얘기 하거나 이럴 때 문정희 선배님도 “너, 나이 속이고 있지?” 그래요.(웃음) 또래들은 저를 재미 없어 할 때가 있더라고요. “왜 이렇게 진지해?” 하죠.

<카트>의 부지영 감독은 어떤 스타일이에요? 현장에서 변화를 많이 주시는 거 같아요. 아침에 나왔는데 갑자기 새로운 대사가 생긴다거나, 새로운 설정이 생긴다거나, 그런 게 조금 낯설기는 했어요. 근데 또 금방 적응되더라고요.

그런 거 싫어하는 배우들도 많잖아요. 자기 것 준비해와서 그것만 하려는 배우들. 네, 그렇죠. 그래서 연기가 재미있는 것 같아요. 어떤 연출가, 어떤 배우를 만나는지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상황을 겪게 되니까요.

극 중 미진은 88만원 세대의 아이콘이에요. 천우희씨도 <써니> 이후 몇년 동안 작품이 없어서 힘든 시기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공감이 됐겠어요. 맞아요. 그래도 그나마 운이 좋았죠. 제 친구들 중에는 연기하려고 저보다 훨씬 고생하는 애들도 많거든요. 그런 친구들끼리 서로 웃으면서 “야, 나 무슨 일 있었는지 아냐?” 이러며 얘기하다 보면 참 씁쓸할 때가 많아요. 그런 부분이 사실 이 영화에 많이 담겨 있진 않아요. 등장인물이 워낙 많다 보니까. 하지만 젊은 친구가 오죽하면 취업을 못 하고 거기까지 흘러가게 됐을까, 말 안해도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랬고요. 작품 하면서 제 친구들이나 저를 많이 돌아봤어요.

<한공주> 미팅할 때 감독이 전작 <써니>의 이미지 때문에 고민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의외로 배우에게서 다른 모습을 끌어내보고 싶어 하는 감독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게요. <써니>를 하고 나서 다른 역할을 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아쉬운 면이 있기는 해요. 이미지는 사실 말 그대로 이미지일 뿐이고, 배우는 무엇이든 연기로 표현할 수 있는 건데 말이죠. 그리고 감독님이 제 나이가 마음에 걸리셨대요. 열일곱, 열여덟의 인물을 표현하려면 어느 정도 제한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신 거죠.

근데 왜 성형 안 했어요? 그냥 오기예요.(웃음) ‘아, 그래? 그럼 나는 내 마스크로, 연기력을 쌓아서 그걸로 한번 이겨볼래.’ 무슨 자신감이 있었던 게 아니라 진짜 오기였던 것 같아요. 지기 싫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다 똑같이 생각하는데, 아니란 걸 좀 보여주고 싶었고요.

‘그래도 내가 연기는 잘해’라는 자기 확신이 없다면 오기도 못 부렸겠죠. 대중에게 알려지기 전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던가봐요? 고등학교 때 연극반 활동을 했는데, 청소년 연극제에 나가서 연기상을 탔어요. 뭣도 모르고 상 타니까 ‘어머, 나 잘하나봐’ 생각했죠. 학교를 다니건 연극 대회를 나가건 못한다는 얘기는 듣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근데 점점 현실에 부딪히면서 내가 진짜 평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잘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고. 그래서 지금은 누가 잘한다고 해도 안 믿어요.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는 믿지 못할 것 같아요.

올해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는 뭐예요? 근래 본 작품 중에는 <해무>요. 원래 연극을 먼저 보고 영화화되길 바랐어요. 사실 오디션도 봤어요. 근데 떨어졌죠.

한예리씨가 한 역할? 네. 근데 한예리 언니가 나오는 거 보고 ‘아, 훨씬 잘 어울린다!’ 그랬어요.

북쪽 사투리 쓰는 역할은 한예리씨한테 다 가는 것 같아요. (웃음) 맞아요. 전문 배우. 근데 그 역할에 참 잘 어울리고, 박유천씨와의 호흡도 굉장히 좋더라고요.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 갔다가 사적인 자리에서 언니를 만났어요. 서로 영화 잘 봤다, 고생했다 얘기했는데 좋더라고요. 긴 얘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조만간 제가 연락해보려고요. 제가 원래 농담으로 “나 여덕이야” 이런 얘기 하거든요.

그게 뭐예요? 여자 덕후. 예쁜 여자 좋아하고. 전에는 시사회에서 수지를 본 거예요. 평소 제가 너무 좋아하거든요. 예뻐서. 소속사 식구들이 그걸 아니까 “어, 수지 왔어” 그러는데 제가 진짜 얼굴이 빨개진 거예요. 가서 인사할 시간이 있었는데 고백했어요. (갑자기 목소리를 깔면서) “좋아해요.” 그렇게 남자가 여자한테 작업 걸듯이? 네. 수지씨가 좀 당황하면서 “감사합니다” 그러더라고요. 너무 예뻤어요. 아, 나 올해 재밌게 본 영화 또 생각났어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굉장한 영화죠. 배우들 연기도 엄청나고요.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런 영화라면 그 정도 노출도 가능해요? 안 그래도 문정희 언니랑 보고 나서 그런 얘기 했어요. 나는 가능할 것 같아요. 근데 우리 사회가 그 정도 수위를 용인할 수 있을까 의문이에요.

연애는 하고 있어요? 아니요. 항상 노력은 하는데,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쉽진 않은 거 같아요. 아니다, 노력을 안 하는 걸 수도 있겠다. 왜냐면 제가 좀 의심이 많아요. 그래서 약간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 보면 그걸 참지 못하고 어느새 다 떠나버리더라고요. 모임을 갖거나 뭔 활동을 해야 새로운 사람을 만날 텐데, 전 또 집에 있는 걸 워낙 좋아하고요. 그렇다고 소개팅은 어색하고. 빨리 로맨스 영화 찍어서 남자 배우들을 공략해야겠네요. 그러고 싶어요. 어, 이런 말 하면 안 되나?(웃음) 그러고 싶죠. 연기로라도 좀 풀고 싶긴해요. 어쩔 수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