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설터는 군더더기 없이 내적 풍경을 묘사하는 완벽한 문장으로 유명한 작가다. 작가들의 작가라는 수식이 따를 만큼 완성도가 높지만, 폐부를 찌르는 통찰로 가득해 생각할 거리 투성이인 설터의 소설은 진도도 잘 나가지 않고, 읽고 나면 진이 쭉 빠진다. 조여정에게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 뭐냐고 물으면서 적어도 제임스 설터보다는 더 화사한 글을 쓰는 작가의 책을 답할 줄 기대했다. 삭막하고 막막한 기분 대신 산뜻하고 상큼한 감성이 조여정에게 더 어울릴 거라는 지레짐작은, 그러니까 완전히 빗나갔다. 조여정의 20대는 그런 속 모르는 사람들의 착각과 오해로 뒤죽박죽 상처투성이였다.
“슬럼프요? 20대 내내 그랬어요.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더니 정말 그랬어요. 누구나 슬럼프는 있지만, 배우를 내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어요. 물론 일은 계속 하고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일을 하는 직업이면 좋겠는데 내가 원하지 않는 길로 점점 다가가면서 돈을 벌고 있었으니까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럼 서른 살까지만 기다려보자고 스스로 유통기한을 정했어요. 일단 기다려보자. 보답이 없으면 연기에 대한 짝사랑을 접자. 그러다 서른에 <방자전>을 만났죠.”
스스로 슬럼프였다고 말하는 그 시절의 조여정이 어땠는지 어렴풋이 기억난다. 조여정은 인형처럼 예뻤다. 문제라면 그거였을 것이다. 그냥 예쁜 게 아니라 주물로 떠낸 것처럼 흠잡을 데 없이 예쁜 외모에서는 인간적 허점과 흉터, 실수, 좌절 같은 것들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깜찍한 외모와 거기 어울리는 발랄한 말투는 실존하는 누군가의 삶을 사는 배우보다는 고만고만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연예인이 더 어울릴 법한 것이었다. 이름 석 자 대면 누구나 아는 연예인 됐으면 됐지 배부른 소리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연기에 목마르고, 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그건 감옥이다. 그러다 조여정에게는 <방자전>이 왔고, 그녀는 그 전과 달랐다.
“인지도가 애매하다는 건 배우에게 족쇄예요. 누가 손을 내밀어주지 않으면 재발견될 수 없어요. 조여정? 예쁘지, 좋지, 거기까지인 거죠. 나를 만나고, 얘기를 해보고, 외모와 다른 사람이네, 저 사람을 꺼내주고 싶다, 하는 건 다른 거고. 그래서 캐스팅되건 안 되건 저는 미팅하는 걸 선호해요. 얘기를 나누면서 나를 보여주고 싶으니까. 그냥 인터넷에서 나에 대한 피상적인 정보만 알아낸 사람한테는 내가 그 왜 그 역할을 하고 싶어 하고, 할 수 있는지 와 닿지 않으니까요. <방자전> 때 김대승 감독님이 저를 알아봐주셨죠. 제 안에 극 중 캐릭터한테 있을 것 같은 내적 파도가 있다고 느끼신 것 같아요.”
조여정의 춘향은 현대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춘향이와 조여정 둘 다 새로운 색깔을 입는 계기가 됐다. 세상은 몰랐던 조여정을 처음으로 만났다. 남들 모르게 깊이 가라앉아 있었던 20대를 지나온 조여정에게는 어렵게 만난 길이었다. 하지만 조여정의 다음 행보는 조심스럽기보다 돌발적이었다. 공중파가 아닌 채널에서 만드는 드라마는 이류 배우나 하는 거란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을 때 <로맨스가 필요해>를 차기작으로 선택한 건, 누가 봐도 어렵게 되살린 불씨를 위태롭게 만드는 무모한 결정이었다. 노출 있는 사극에 재미 들렸느냐는 비아냥거림을 감수하고 <후궁: 제왕의 첩>을 택한 것도, <인간중독>에서 굳이 남자 혼을 빼놓는 주연 대신 ‘잠자리 안경’ 쓴 스노브한 아줌마 역을 맡은 것도 그랬다.
“그게 저예요. <방자전>을 끝내고 <로맨스가 필요해>를 한다고 했을 때 다들 의아해했죠. 중요하지 않아, 나는 작품 보고 따라다니는 바보야, 내가 던지고 싶으면 던지는 거지. 그런데 내가 미쳐서 하면 사람들은 쳐다보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후궁: 제왕의 첩> 때도 또 노출한다고 미쳤다고들 했어요. 난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봐, 어떻게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것인지 그게 너무 고민이지, 나는 조금씩은 바뀔 거라고 생각해, 그랬어요. 진심은 언젠가 통하게 돼 있으니까요.”
안전한 선택을 거부한 조여정의 모험은 그만큼의 보상으로 돌아왔다. <로맨스가 필요해> 이후 케이블 드라마는 작품의 완성도가 있다면 채널은 중요하지 않다는 평가를 끌어냈고, <후궁: 제왕의 첩>에서는 20대 여자에게서는 우러나올 수 없는 슬픔과 욕망, 내적 갈등을 눈빛에 담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녀가 통통 튀는 목소리가 아닌 차분하고 기품 있는 목소리를 가진 배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이 영화에서였다. 짧게 출연했지만 조여정 연기 하나는 진짜 볼만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인간중독> 역시 배우에게 중요한 건 출연 분량과 비중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하는 작품이었다. 어느 순간 조여정은 연말 연예대상 시상식보다는 영화제 레드카펫이 어울리는 배우가 돼 있었다. 그런 그녀의 다음 선택은 코미디다. 조여정은 지금 <워킹걸>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제가 코미디를 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배우는 기다리는 거지 스스로 기획을 할 순 없잖아요. <기담>을 보고 정범식 감독님과 작품을 해보고 싶었어요. 저 사람은 뭐지? 저 미술은 뭐야?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코미디를 하자는 거예요. 사람을 울리는 건 차라리 쉬워요. 웃기는 것에 비하면. 코미디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줄 알면서 감독님이라 하겠다고 했어요. 뭔가 있겠지. 카드가 많은 분이더라고요. 힘든데 재밌었어요. 코드가 맞았고. 감독님과 어떤 영화를 재밌게 느끼는 부분이 같았어요. 작품에 대한 자부심은 있는데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너무 떨려요. 여배우가 타이틀롤로 코미디를 끌어가는 경우가 별로 없잖아요. 영화 개봉하면서 한 번도 긴장한 적이 없는데 긴장이 많이 돼요. 내 배우 인생에서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이 될지 고민하게 되잖아요. 내 서른넷은 지나갔고, 그 시간은 이 영화에 담겼어요.”
조여정의 캐릭터는 일 좀 한다는 여자들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인물 ‘보희’다. 남편과 섹스할 때보다는 업무 성과가 좋을 때 훨씬 큰 쾌감을 느끼는 워커홀릭, 직장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직원이지만, 가정생활은 엉망인 그녀가 승진을 앞둔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에서 실수를 하고 해고를 당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과의 관계도 위기에 처하고 보희가 만나는 인물은 섹스 용품점을 운영하는 여자 ‘난희’. 난희 역은 클라라가 맡았다. 한눈에도 딱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비슷한 구석도 없지만, 그렇다고 정반대된다고 할 수도 없다. 코미디 자체가 드문 한국 영화계에서 두 사람이 어떤 화학작용을 보여줄지가 영화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조여정과 만났을 때 영화는 아직 시사 전이었다. ‘주인공은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닌데 너무 진지해서 그게 웃긴 영화’가 조여정이 말하는 <워킹걸>이다. 지금까지 없었던 스타일의 코미디 영화라는 그녀의 자신감이 합당한 것인지는 관객이 평가하겠지만, 이번 영화의 결과가 어떻든 매번 자신을 던지는 조여정의 방식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게 많아서 가끔은 초조할 때도 있어요. 겉으로 볼 때는 잘해나가고 있지만, 제가 서른넷이에요. 내 장점이 아닌가 생각하는 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 저도 조금 늦게 시작돼서 한 작품이라도 더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잠깐 초조해져요. 그렇다고 성격이 아무거나 하는 편도 못 되니까요. 연기가 좋아요. 내가 이 사람을 표현해낼 수가 있을까 너무 막막하고 두렵거든요? 시커먼 벽을 앞에 둔 것 같은데, 슬슬 그 형체가 보이기 시작할 때, 내가 어떤 사람을 만들고 있다는 게 느껴질 때의 쾌감이 있어요. 그리고 파트너와 소통이 될 때 진짜 행복해요. 내 연출자, 내 상대역과 소통하고 있다고 느끼고 그게 작품에 담기면 미치는 거예요.”
조여정에게는 목표와 계획이 없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지금이고 오늘이다. 자신이 최선을 다하는 현재가 기회를 만드는 날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녀는 좋은 기회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